父親(부친)의 漢詩集(한시집)은 家寶(가보)

  남이 <애장서>를 가지고 있다고 나도 가지고 있다 할 것인가. 남이 장에 간다니까 나도 씨레기 갓을 짊어지고 장으로 가야만 하나!
  언젠가 나는 책을 인쇄하기 위하여 인쇄소에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인쇄소 사람은 나와의 약속을 어겼었다. 그래서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내가 말하였더니 그 인쇄소의 어린 직공 한 사람이 나에게 이르기를 ‘인쇄소란 거짓말 공장’이 아니냐고 하였다. 나는 지금도 그 때의 이 말을 가끔 되새겨보는 때가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책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할 때 <애장서>가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애장서>란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귀한 책을 간직하였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을 고이고이 간직하였다가 읽지도 않으면서 무슨 보물처럼 그저 가지고만 있거나 혹은 남몰래 꺼내어 어루만지며 때로는 남에게 자랑도 하고 또 그렇지 않으면 혹시 그 책을 잃을까 두려워서 근심과 걱정으로 일삼는 그런 책을 일러 애장서라 하는 것인가!
  그런 뜻도 있으리라. 그러나 <애장서>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한 푼의 값도 없는 것이지만 자기만은 그것이 이 세상 어떠한 것보다도 사랑스럽고 귀한 것으로 애지중지하여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는 책을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애장서>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귀한 책을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다는 뜻, 또 하나는 남이야 귀하건 말건 자기만은 애지중지 간직하고 있는 책이라는 뜻이 그것이다.

  돈 많은 사람은 귀한 책도 사들여서 간직하고 있는 이가 있다. 그러나 책이란 읽기 위한 것이고 읽지 않는다면 그 책은 가지고 있으나마나,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오직 공부하는 사람만의 말일까! 그렇지도 않다. 공부하는 이도 남이 가지고 있지 않은 귀한 책을 자기만 가지고 싶어 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 때로는 남이 자기만이 가지지 않은 책을 가지고 남에게 보여주지도 않고 그것을 독점하려는 그런 학자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공부하는 이가 아무리 공부가 중하고 연구가 귀중하다 할지라도 그와 같이 책에 욕심을 내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공부하는 이가 자기의 책을 가지는 것은 필요하다. 더욱 책을 읽을 때에 글 가운데에 밑줄을 치거나 또는 자기의 생각을 적어두는 이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같이 밑줄을 치거나 자기 생각을 적어둔 책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런 책은 그에 있어서 <애장서>가 될 수도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거의가 밑줄을 친 것이거나 무엇인가 적어 넣은 책들이다. 내다 팔아야 제 값을 못 받는 휴지감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비록 철학이 전공이지만 폭 넓은 책을 읽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자연과학일지라도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는 무엇이든지 읽으려 하는 것이 나의 독서버릇이고 따라서 책의 수가 많다는 것보다는 다방면의 책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는 내가 좋아하는 난초에 대한 책도 있다. 난초를 기르는 법이 설명되어 있는 책이다.
  그런데 요즘, 책을 외상으로 사라는 바람에 몇 가지 들여놓았더니 그것 때문에 빚에 쪼들리는 수가 많다. 그 가운데는 해적판인 ‘토인비’의 ‘A study of History’ 열권과 사진판의 대한화사전 열세권, 그리고 ‘플라톤’ 전집과 ‘The upanishads’ 네권이 있다. ‘플라톤’전집은 사가지고 와보니 세권 모두가 출판사가 다른 것을 샀으나 보는 데는 별 지장이 없겠지만 그야 말로 <장서>로서는 아무 값이 없는 것이다. 

  굳이 나에 있어서 <애장서>라 이르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내가 고서점에서 산 일두집 두권과 일본사람이 쓴 화랑고(花郞攷)와 신라왕위호(新羅王位號)라는 옛 책을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보다도 또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애장서>가 참으로 있으니 그것은 나의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에 지으신 한시(漢詩)와 그리고 친구 분과 같이 지으신 漢詩(한시)를 손수 붓으로 써서 두 권의 책으로 만들어서 나에게 물려주신 것과 그리고 주역(周易)과 또 사례편람(四禮便覽)이 있다.
  주역은 그 가운데 한 권이 빠지는 것이지만 옛 책이고, 사례편람은 옛날의 의식절차에 관한 책이지만 지금도 그것을 다시 훑어보면서 오늘날 우리사회의 예의에 대한 것을 다시 재검토해 볼 만한 일이고 모두 나의 아버지의 손길이 간 책이며 때 묻은 책이다. 더욱 이 책들 가운데서 나의 아버지가 손수 지으신 책으로 만들어 주신 두 권의 시집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값이 되지 않겠지만 나에게 <애장서>가 되지 않을 수 없고, 우리 집의 대대로 내려가는 가보(家寶)가 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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