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學人(대학인)다운 ‘內面(내면)의 멋’살려야

  여학생의 복장
  “그 사람의 인품을 알려거든 그의 옷차림을 살펴보라.”는 유명한(?)말은 제쳐 놓고라도 그것은 한 사람의 단면적인 인상 밖에 별 뾰족한 수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역시 의복이란 사람의 인격여하에 비례하기 마련.
  소위 ‘洗練(세련)됨’이란 여러 가지 가치 평가로 일단락되기도 한다. 辭典的(사전적)인 의미로는 ‘수양을 쌓아 인격이 원만하고 성품 성취가 고상 우아함’이다. 그런데 요즈음 와서 이 우아한 단어는 전혀 다른 뉘앙스를 풍기고 이다. 지식인들 또한 그 어줍지 않은 탈바꿈을 놀라기는 커녕 이를 즐겨 사용하는 형편이다. 현대에 있어서의 ‘세련됨’이란 ‘고상ㆍ우아’보다는 차라리 외모의 치장 여하에 따라 파악하려 한다. ‘현대를 사는 超(초)미니, 맥시’의 붐은 우연이 아니라 이러한 의식의 변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학생의 옷차림은 여러 가지로 채점되기도. 東岳(동악)은 이름 그대로 높이 솟은 진리의 상아탑. 그래서 계단이나 비탈 또한 빠트릴 수 없는 名物(명물)이다. 그런데도 여학생들은 눈치 없이 超(초)미를 좋아한다.
  깜찍하고 발랄한 초미니라지만 가파른 東岳(동악)이나 강의실 구조도 한번쯤 생각해야 하는 것이 현명. 의자에 앉고 보면 마냥 삐거덕거리는 不安(불안)의 한 시간을 모두 受講(수강)의 편리함으로 대치시키는 일 또한 알아두어야 할 상식이다. 본래 이 ‘미니’는 英語(영어)의 원 뜻을 밝히면 最小(최소), 最低(최저)의 略語(약어)로써 이것은 八等身(팔등신)인 그쪽 여성들을 위해 고안된 西歐(서구)의 ‘패션’이다. 정신문화 외에도 외부구조인 의상에 까지 신경을 쓸 만큼 서양인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막 선진대열을 向(향)해 발돋움하는 韓國(한국) 속의 ‘東岳(동악)’. 게다가 한국여성들은 거의가 과히 날씬하지도 팔등신도 되지 못한다. 비근한 例(예)로 “무쪽같은 다리에 ‘미니’를 걸치니 그야말로 가관이다.”는 嘲笑(조소)를 그렇게 함부로 욕할 것은 못 된다. 어디 이 뿐인가. 이것도 모자라서 ‘진지한 토의’ 끝에 또 하나의 희한한 창조물을 내기에 이르렀으니 코에 걸친 도수 없는 ‘잠자리 안경’이 그것―. 眼膜(안막)보호라는 그럴싸한 美名(미명)아래 안경알을 주먹만큼 확대시키고 그 속에서 눈동자는 向學熱(향학열)로 반짝이기만 한다면 문제는 다르다. 그러나 거의 그런 경우는 없다는 것이 衆論(중론).

  무거운 외투와 함께 그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을 벗어 버리는 일도 건강위생에 좋을 듯.
  “얘, 국산은 안 좋다나봐. 아무개가 그러는데 말야, 日産(일산)을 써야 기미나 싹 죽는대.”
  “스커트 길이가 촌스럽지 않을까?”
  여학생들의 깨끗하고 산뜻한 차림은 어디서나 환영받을 만하다. 그러나 정도를 지나치는 경우 누구나 곧잘 눈을 찌푸리고 만다. 쉽사리 유행의 깊은 늪 속으로 빠지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社會人(사회인)과 大學人(대학인)의 한계는 우선 옷차림에서도 나타나야 한다. 종종 이 한계를 구별하지 못하는 무분별한 여학생이 있다면 社會(사회)와 大學(대학) 중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을까.
  볼펜을 딸깍이는 손끝에서 번쩍거리는 人造(인조)보석, 교수님을 주시하던 예쁘장한 한 학생 옆 친구에게 속살거린다.
  “아침에 급히 서둘렀더니 속눈썹이 자꾸만 떨어질 것 같애!”
  이러한 對話(대화)는 방향전환이 있어야 한다. 근본적인 사치성, 퇴폐성은 주위의 현명한, 검소한 학생들까지 피해를 끼치는 때가 많다. 大學街(대학가) 강의실에서 자칫 지나치기 쉬운 옷차림. 孔子(공자)님 말씀 중에 “지나치지도 말고 모자라지도 않는” 中庸(중용)이 여학생복장에서도 적용되어야 할 듯.
  진정한 가치관과 ‘세련됨’이란 의복에서 보다 마음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남학생의 복장
  女學生(여학생)이 얻지 못하는 남학생의 特權(특권)이 있다면 그것은 校服(교복). 入學式(입학식) 그 한 순간만을 위하여 만들어진 無用之物(무용지물)이 결코 아니지만 교복을 착용하고 다니는 남학생들은 드물다. 그래서 신성한 상아탑을 상징하고 東國人(동국인)의 긍지와 신념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이 校服(교복)을 아낄 줄 모른다.
  긴 장마철이 지나고 옷장을 정리하던 어머니, 문득 곰팡내 물씬거리는 奇物(기물)을 발견, 아연실색하고 만다.
  “아이고 얘야! 아깝기도 해라. 비싼 교복 맞춰서 푹푹 썩혔구나.”
  “엄만! 별로 큰 일 못 돼요”
  이처럼 멍청한 母子(모자)야 없겠지만 아무튼 교복은 남학생 최고의 멋 일진대.
  “우리는 단연코 女學生(여학생)보다 優位(우위)에 있다”는 그야말로 ‘어글리ㆍ남학생’의 사고방식으로 여학생들의 의복에 대하여 시샘을 부리기도.
  그리하여 ‘하이힐’을 모방한 굽이 높은 ‘山(산)구두’(?), 구레나룻을 기르고 점잖을 빼는 ‘히피族(족)’ 市場(시장)구석에서 골라잡은 ‘미니 작업복’― 꼭 집 동생에게 빌려 입은 것처럼 짤막한 모양을 하고 다닌다.
  日刊紙(일간지)의 社會面(사회면)에서 종종 ‘大學生(대학생)의 고뇌’라는 타이틀이 발견된다. ―이 세대의 새로운 대학인은 무엇을 고뇌하는가? 그들은 現實(현실)과 理想(이상)의 상반된 모순과 자신의 知力(지력)과 또한 자기 자신에의 회의― 이러한 문제로 대학생들은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다고 사회심리학자는 분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뇌는 대학생이라면 의당 할만한 가치가 있다. 문제는 이러한 고뇌도 갖가지 못하는 구멍 뚫린 몰지각한 일부의 학생들이다. 지나치게 외모를 꾸미기에 앞서 한번쯤 자숙해봐야 한다.

  이러한 반면, 허영 뿐 만이 아니라 지나친 자기학대(?)로 표현되는 때도 있다.
  “별꼴야! 잰 항상 저 모양이라니까…”
  잔뜩 찌푸린 여학생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이를테면 커다란 고무신을 덜컥대며 학교에 나오는 학생. 알뜰한 긴축재정 살림에 비싼 구두를 권하지는 않겠지만 깔끔히 빨아 신는 운동화 구두를 권하지는 않겠지만 깔끔히 빨아 신는 운동화야말로 대학생다운 낭만의 멋을 대신해주는 것이다.
  大學(대학)은 학문을 위한 신성한 전당이다. 지나친 사치도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예의에 벗어나는 복장을 한다는 건 생각해볼 문제. 강의실을 어줍지 않은 슬리퍼나 고무신으로 나오는 일은 아름답지 못한 광경이다.
  ‘검소한 대학인, 발전하는 동국’ 이것은 汎大學的(범대학적)인 ‘캐치프레이즈’로, 총학생회가 내놓은 신년도 ‘캠페인’만이 아니라 주위의 충고 없이도 자각해야할 꽤 상식적인 句節(구절).
  ‘뱁새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서글픈 俗談(속담)을 기억해 봐야 할 때. 주체성 없는 갈대 같은 심사로 곧잘 쓰러지는 습성은 추방해야할 문제이다.
  옷감 값은 아끼자는 여학생의 알뜰살뜰한 婦德(부덕)도 좋겠지만 지나친 절제는 오히려 비경제적인 불안을 가져오기도. 좀 편안한 마음으로 계단을 오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좋은 일―.
  젊음을 만끽하자는 남학생의 호기도 자랑스럽기는 하지만 지나친 사치는 ‘마이너스’를 가져오는 것이 하나의 법칙.
  넘치는 학구열과 폭 넓은 교양 섭취로 내면을 충실케 하는 일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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