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동대문학상 시 희곡ㆍ시나리오 가작

등장인물
최영림 (女, 56)
남희수 (女, 22)

무대
평범한 가정집. 거실 가운데 소파가 있고 왼쪽에는 5단 서랍장이 놓여 있다. 뒤쪽으로 싱크대와 냉장고 등의 주방 살림이 보인다.

바깥에서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비밀번호가 틀린 듯 열리지 않고 삐삐거리는 소리만 난다.
몇 번의 시도가 반복되고 드디어 멜로디와 함께 문 열리는 소리 들린다.
슬금슬금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등장하는 영림.
선글라스에 스카프, 나이에 비해 젊고 세련된 모습.

영림 (속삭인다) 장우야, 장우야. 할머니 왔다. (사이) 장우야?

조용히 기척을 살핀 후 한숨 돌리는 영림.
자연스레 소파로 와 다리 꼬며 편하게 앉는다.

영림 고 간단한 게 바로 생각 안 날 건 뭐야. 진땀 뺐네 아주.

선글라스 벗고 결연한 표정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훑는다.
서랍장에 시선 멎으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 영림.

영림 옳거니. (서랍장 쪽으로 가 뒤지며) 어디 숨었니 얘들아, 언니 왔다.

영림, 콧노래 흥얼거리며 서랍 뒤적이는데 방문 열리는 소리 들린다.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의 희수, 휴지로 코 풀며 나온다.
휴대폰으로 전화하는 중이다.

희수 받아, 받으란 말이야.

영림, 희수의 갑작스런 등장에 놀라 소파로 몸 날린다.
희수는 전화 끊고 초조하게 소파 뒤를 오가다 다시 전화 건다.

희수 안 받기만 해, 안 받아? 니가 나 없이 얼마나 행복하게 즐겁게 신나게 사나보자. 나 너 때문에 죽어. 너랑 끝나서 죽어. 니가 나 버려서 죽어. 잘살아, 나쁜 새끼.

희수, 음성 저장하고 길게 심호흡 한다.

희수 엄마 미안해. 장우야 누나 간다. 아빠 안녕히 계세요.

결심한 듯 서랍장 쪽으로 오는 희수.
이 서랍 저 서랍을 뒤져 목매달만한 물건을 찾는다.
멀티탭, 브래지어 등을 자신의 목에 감아보지만 모두 마뜩치 않다.
또 다른 서랍장에서 아직 뜯지 않은 팬티스타킹을 찾아 포장을 벗긴다.
팬티스타킹을 양손에 쥐고 늘여도 보고 목에 감아도 본다.
이거다 싶은 희수의 표정이 사뭇 비장해진다.
소파에 밀착해 지켜보던 영림, 선글라스를 집어 쓰고 스카프로 얼굴 가린다.
미끄러지듯 기어 내려와 마치 군인과 같은 자세로 현관을 향해 포복하는 영림.
현관에 다다랐을 즈음 희수가 돌아선다.

희수 악, 너 뭐야!

희수, 괴성 지르며 스타킹 들고 영림에게 달려가 덮친다.
영림, 어떻게 손 써보지도 못하고 스타킹에 묶여 발버둥 친다.
레슬링 하듯 엉켜 바닥에 뒹구는 두 사람.

영림 얘, 얘! 나야 나, 나라니까.
희수 너 오늘 잘못 걸렸어.
영림 장우야, 할머니 죽는다 죽어.

멈칫하는 희수, 웅크리는 영림. 두 사람 잠시 정적.
희수, 천천히 손 뻗어 영림의 스카프, 선글라스 순으로 벗기고 놀란다.

희수 어쩐, 일이세요?
영림 너 미쳤니?
희수 왜 이러고 계세요?
영림 내가 이래놨니? 이것부터 풀어 얘.

어처구니 없어하는 희수, 성의 없이 스타킹 푼다.
영림, 그런 희수를 흘겨보며 일어나 옷매무새 정리하고 소파에 다리 꼬고 앉는다.

희수 저.
영림 너 어떻게 된 애 아니니?
희수 왜 그러고 계셨어요?
영림 내가 어디 못 올 때 왔어?
희수 저 서랍, 제가 안 열었는데요.
영림 손톱 좀 다듬으려고 손톱깎이 찾았다, 왜? 그런 것 까지 니 허락 받아야 되니?
희수 엎드려서요?
영림 아니 근데 너는 왜. 됐다 그러고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주스 좀 내와, 목 탄다.
희수 집에 주스 없는데요.
영림 주스도 없니? 니 엄마는 그런 것도 안 사다 놓고 뭐한다니?
희수 왜 오셨어요?
영림 우리 손주 보러 왔다. 장우 없니? (콧소리) 장우야, 할머니 왔다. 장우야.
희수 이 시간에요?
영림 넌 학교 안 갔니? 여태 잤어? 얘, 눈 부은 거 봐라. 팔자 좋구나.
희수 할머니.
영림 가서 주스 좀 사와. 알로에로.
희수 돈 주세요.
영림 여전하구나. 그래 그게 어디 가겠냐만은. 장우 애비는 어디 나갔니?
희수 알고 맞춰 오신 거 아니고요?
영림 넌 뭐 믿을 게 있다고 애가 그렇게 건방지니? 이래서 바깥 것은 안된다 안된다 했지 내가.

실성한 듯 웃기 시작하는 희수. 그런 희수 모습에 움찔하는 영림.

영림 얘가 무섭게 왜 이래. 너는 시집 안가니? 니 엄마 대학까지만 어쩐다 하더니만.
희수 제 혼사 문제까지 걱정해주시고, 황송하네요. 이번엔 뭐 가지러 오셨어요?
영림 이놈의 집구석에, 됐다 내가 너랑 뭐하니. 갈랜다. 정나미 떨어지는 기집애. (일어서며) 장우 애비한테는 내 알아서 전화 할 테니까 별 말 말고. 간다 얘.

희수, 나가려는 영림 가로막고 선다.
영림은 오른쪽 왼쪽으로 피해가려 하지만 희수가 계속 따라 막는다.

영림 얘가 왜 이래?
희수 떨어질 정이라도 있으세요? 저 싫으시죠?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영림 누가 뭐래니, 얼른 비켜 얘.
희수 저한테 이러시는 거 상관없어요. 근데 불쌍한 우리 엄마는 그만 좀 괴롭히세요.
영림 어른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얘가. 똑같애 천박하기는.

영림, 희수 어깨 밀치고 나가려다 멈춰 선다.

영림 그리고 얘,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만 듣자하니 남자랑 문제 있나본데 여자가 남자한테 죽네 마네 매달린다고 돌아올 것 같니, 얘가 뭘 몰라. 그거 질린다. 니가 니 엄마 딸은 확실한 가 보다. 어떻게 그런 것 까지 판박이니, 질긴 게. 잘 있어라.

희수, 손에 들고 있던 스타킹으로 영림의 목을 뒤에서 감는다.

영림 얘, 너 뭐하니. 이거 안 놔?
희수 제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거든요.
영림 뭐하는 짓이야, 이게?
희수 뭐하는 짓일까요, 이게?
영림 얘가 왜 이래. 알았다 알았으니까 이거 놔.

희수, 스타킹 끌어당긴다.

영림 얘, 너 왜 이러니. 아니야 이번엔 아니야. 진짜 아니래두.

자기 쪽으로 좀 더 끌어당기는 희수. 영림, 잠시 중심 잃고 휘청거린다.

영림 반지 하나, 그것만 갖고 가려고 했어. 정말이야. 희, 희수야 너 이러는 거 아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 했니,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는데 이건 아니다. 나 니 엄마 괴롭힌 적 없어. 그래, 이제 안 그럴게. 얘, 너 후회한다. 이러지 마라, 제발.

희수, 스타킹을 풀어 던져버리고 소파에 쓰러지듯 앉는다.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는 영림, 숨쉬기 힘든 듯 헐떡거린다.

영림 (가쁘게 호흡하며) 얘, 청심환, 청심환 좀 줘. 물, 물.
희수 죽여주세요.
영림 얘, 나 숨 넘어간다. 물, 물.
희수 돈 드릴게요.

몰아쉬던 숨 순간 멈추는 영림, 놀라 희수 본다.

영림 뭐라고 했니?
희수 죽여 달라고요.
영림 얘 봐, 독한 년. 시린 년. 얘, 나 같아도 너 같은 애 무서워서 못 사귀겠다. 헤어지 쟀다고 남자를 죽여? 세상에, 어쩜 애가 그러니. 죽이려면 니가 죽여라. 나한테 죽여 달랄 건 또 뭐야.
희수 그 자식 말고요.
영림 그럼 누굴 죽이란 말이야, 여자? 여자 생겨 헤어졌니?
희수 왼쪽 두 번째 서랍 수건 아래 엄마 반지랑 목걸이 다 있구요. 제 방 침대에 곰 인형 큰 거 있거든요, 걔 바지 벗기면 엉덩이 쪽에 삼십만 원 정도 있고, 냉동실 맨 위 칸 미숫가루 봉지 안에 보면 아빠 비상금도 있을 거예요.
영림 그래서 어쩌란 말이니?
희수 생각해보니까, 이게 낫겠어요. 내 손으로 죽은 거 알면 우리 엄마 따라 죽어요. 당했다고 알면 좀 덜 할 거야.
영림 가만가만, 너 죽니? 니가 왜?

희수, 일어나 싱크대 쪽으로 간다.
영림은 그 틈을 타 얼른 일어나 스타킹 소파 밑으로 밀어 넣는다.

희수 칼 좀 쓰세요?

칼 들고 영림에게 다가오는 희수. 영림, 놀라서 다급하게 물러선다.
소파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형국의 두 사람.

영림 얘, 너 가까이 오지 마. 나 그거 너무 싫다, 끔찍해.
희수 끝이 좀 뭉툭한데 세게 찌르면 그래도 들어갈 거예요.
영림 나한테 왜 이러니 정말. 당장 치워 얘.
희수 무서우세요?
영림 그럼 내가 지금 칼 보고 신나서 이러고 있겠니?
희수 너무 잔인한가, 피도 튀고 그러겠죠?
영림 말이라고 하니, 조심해 그거. 얘, 일로 오지 말고 얼른 제자리 갔다 놔. 얼른.
희수 찔러서 피 튀고 흐르고 고이고 하면 지저분하겠다.
영림 제발 나 좀 가게 해줘 얘. 살려주라. 너 애가 독한 줄은 일찍이 알았지만 이러는 거 아니다.

희수, 싱크대 위에 칼 내려놓고 싱크대서랍 열어 물건들 바닥에 던지기 시작한다.

희수 어려운 거 없어요. 그냥 강도당해 죽은 것처럼만, 그렇게만 도와주세요.
영림 아니 그러니까 왜 그런 짓을 하냔 말이야. 것도 하필 내가.
희수 혼자 깔끔하게, 이렇게 어지르지 않고 죽으려고 했거든요?
영림 그럼 그렇게 해야지, 왜이래?
희수 할머니가 도둑처럼 슬금슬금 들어와 계셨고. 이거다 싶어서, 계획을 좀 바꿨어요.
영림 왜 내가 죽이냔 말이야. 이렇게 해 놓고 찔러죽든, 목 매달아죽든 죽고 싶은 니가 알아서 죽어야지.
희수 그게요. 영화 보면 다 알더라고요. 얘가 지손으로 죽은 건지, 남의 손닿아 죽은 건지. 부검인가 뭔가 하면 다 나와서 할머니가 필요해요.
영림 죽네 마네 남자 때문에 이 짓을 한 단 말이야?
희수 발단은 그놈인데 결말이 뻔해서요.
영림 (소파에 앉는다) 나 참 기가 막혀서. 어쨌든 남자 때문이라는 거잖아. 죽을 이유가 처량하기도 하다. 얘, 너도 많이 변했다. 쪼그만 게 고개 빳빳이 들고 까불던 때가 엊그젠데, 살아보니 고게 마음대로 안 되지?

희수, 앞쪽 서랍까지 모두 열어 물건들 아무렇게나 던진다.
서랍에서 보석함 꺼내놓고 또 여기저기 뒤적인다.

희수 장갑이 여기 있었는데.

희수, 생각난 듯 주방 서랍으로 가 일회용 비닐장갑 꺼내온다.
영림, 관심 없는 척하며 보석함에 눈 쏠려 있다.

희수 장갑은 이거 끼고 하면 되겠고. (영림 손에 장갑을 쥐어주며) 아, 이거 버리지 말고 태워버리세요. 그리고 저건 보석함이니까 챙겨 가시면 돼요.
영림 너나 재밌게 놀아라, 기집애. (장갑 내던지며) 나 못 오게 하려고 별 쌩쇼를 다 하는구나.
희수 이게 노는 걸로 보이세요?
영림 그래, 할 짓 드럽게 없어서 죽네 마네 장구 치고 북 치고 노는 걸로 보인다.
희수 그래서 어쩌실 건데요?
영림 어쩌긴 어째, 니 소원대로 이 집에서 나가 줘야지.
희수 못 가요.
영림 뭐?
희수 나 죽이고 가면 완전범죄 되지만, 그냥 가시면 범인 할머니로 몰고 죽을 거예요.
영림 웃기지도 않아서. 니가 형사니, 형사야?
희수 서랍에 할머니 지문도 묻었겠다. 별로 안 어려운데.
영림 얘 너 미쳤니?

영림, 잽싸게 일어나 스카프로 서랍 손잡이 닦는다.

영림 너 내가 니 엄마 돈 몇 번 받았다고 이러는 모양인데, 시어미가 며느리 도움 좀 받는 게 그게 그렇게 죽을 짓이니?
희수 죽는 건 제가 죽는 거구요. 이번엔 손녀, 손녀라고 쳐요. 손녀 도움 받으시라고요.
영림 됐다 얘. 니 엄마도 이렇게 독하진 않는데, 누구 씨를 받아와서 애가 이래.
희수 하루 열두 시간씩 서서 사람들 머리 만지는 엄마 돈 뜯어가지 마시고 이번에는 손녀 도움 받아서 할머니 좋아하시는 명품백 사시라고요.
영림 싫다 얘. 그깟 백 하나 들어보겠다고 다 늙어서 철창가기 싫어.
희수 그럴 일 없게 해드린다잖아요.
영림 내가 아무리 모질기로서니 어떻게 사람을 죽이니? (일어선다) 나 진짜 갈란다 얘.
희수 별 수 없네요. 이렇게 된 거 할머니 죽이고 죽는 수밖에.

멈칫하는 영림, 굳는다.

희수 할머니가 안 죽여줘도 나 어차피 죽어요. 이왕 가는 김에 십 년 동안 우리 엄마 있는 대로 고생시킨 할머니 데리고 가면 엄마가 덜 슬프겠죠, 그죠?
영림 얘, 너 말을 웃기게 한다?
희수 웃으세요. 마지막인데.
영림 (주머니 뒤적인다) 휴대폰, 내 휴대폰.

영림, 뒷걸음치며 휴대폰 꺼내 전화 걸려는데 희수 달려들어 뺏으려 한다.
두 사람 몸싸움 끝에 결국 희수가 전화기를 뺏는다.

영림 얘, 너 그거 안 내놔?
희수 오늘 계획이 자꾸 바뀌네. 아들 집 털러온 할머니, 멀쩡히 자고 있던 그 집 딸한테 걸려 몸싸움 끝에 숨지고, 죄책감에 못 이긴 여리디 여린 딸 할머니께 죄송하다는 말 남기고 목매 숨져. 어때요, 그럴싸하죠?
영림 희수야, 얘.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나 정말 오려고 온 게 아니다. 그냥 어제 백화점에서 본 여우털 조끼가 자꾸 눈에 밟혀서, 내려 보니 느이 집 앞이지 뭐니. 이러지 마라. 내가 어떻게 할까? 니 엄마 미용실 가서 머리라도 감길까? 바닥이라도 쓸어? 뭐든 다 하마. (희수, 떨어져 있는 장갑 주어들고 영림에게 온다) 얘, 잘못했다니까. 쌓인 거 맺힌 거 다 풀고 그만하자, 살려만 줘. 응?
희수 (빌던 영림의 손에 장갑 한 짝씩 끼워주며) 금방 끝나요

희수, 소파에 누워 이렇게 저렇게 자세 바꿔가며 자리 잡는다.
영림은 체념한 듯 엉거주춤 일어선다.

희수 제 위에 올라타서 목 조르시면 되요.
영림 희수야, 나는 사는 거 맞지?
희수 제가 할머니 욕 많이 했거든요? 오래오래 사실 테니까 걱정 말고 빨리 오세요.
영림 근데 이거 어떻게 하니, 내가 누구 목을 졸라봤어야 알지.
희수 (일어나며) 그럼 여기 누워 보세요.

희수, 영림 끌어다 반강제적으로 소파에 눕힌다.

영림 얘, 내가 그냥 해볼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응?
희수 이렇게 올라앉아서 손을 목에 얹고 손가락이 아니라 손목에 힘을 주고. 꾹 누르면.

영림, 기겁하여 희수 밀치며 일어나 앉는다.

영림 진짜 누르면 어떡하니? 얘가 정말 누굴 잡아먹으려고 이래.
희수 아시겠죠? 저 누워요.

희수, 다시 소파에 누워 자세 잡는다.
영림, 희수 배 위에 올라 앉아 천천히 천천히 목에 손 갖다 댄다.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이 내려와 바닥에 주저앉는다.

영림 안되겠어.
희수 할 수 있어요.
영림 얘, 술 없니? 맨 정신엔 못 할 짓이다.
희수 냉장고에 어제 제가 마시다 만 소주 있어요. 갖다 드려요?
영림 아니다, 내가 찾아 마실게.

영림, 다리에 힘 풀려 힘겹게 일어나 걷는다.
냉장고에서 소주 꺼내 병째 들이켜고 심호흡한다.
그때, 희수가 들었던 칼 발견하고 희수 쪽 본다.
꿀꺽 침 삼키고는 칼 들고 희수에게 온다. 긴장한 모습.

영림 얘, 너 거기 가만있어라. 오면 나 정말 찔러.
희수 바꾸신 거예요?
영림 장난 같니? 장난 아니야 얘, 내가 죽겠는데 나 못한다.
희수 그럼 제가 일어나서 갈 테니까 이쪽 갈비뼈 아래로 푹 아시겠죠?
영림 나 정말 찌를 거야.
희수 근데 뭐라도 걸쳐 입으셔야 할 텐데? 다 튀어요, 할머니.
영림 얘, 너 어쩌다 이렇게 됐니. 응?
희수 장우 우비라도 갖다 드릴게요. 그거 입고하세요.
영림 오지 마. 나 이 칼 그냥 폼 아니야. 나 정말 찔러, 너 죽어.
희수 칼이 편하셨으면 미리 말씀하시지. 그럼 바로 갈게요.

희수, 일어나 영림에게 다가가고 영림 벌벌 떨며 뒷걸음친다.

희수 할머니, 저 가요.

희수 달려들자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나는 영림, 칼 떨어트리고 넋 나간 모습.

희수 (웃는다) 그래요, 칼은 좀 아닌 것 같아요.
영림 넌 이러는 게 재밌는 모양이다?
희수 장우 아직 어린데 피는 충격이 클 것 같아요. 이게 나아요. 얼른 올라오세요.
영림 내가 이 칼을 잡은 거니? 이 무서운 걸 내가.
희수 저 누웠어요.
영림 그래, 찌르느니 조르지.

영림, 이제 포기한 듯 희수 배 위에 올라앉아 다시 천천히 목에 손 갖다 댄다.
눈 질끈 감고 손에 힘주는데 희수, 발버둥 치며 저항한다.

영림 어머, 얘 너 뭐야. (놀라 바닥에 떨어진다) 아이고 아이고 나 죽네.
희수 힘을 주셔야죠.
영림 얘, 너 정말. 나 가지고 장난치니?
희수 뭐가요?
영림 그렇게 살고 싶어 흔들어 대면서 죽여 달라는 건 또 뭐야.
희수 이렇게 해야 돼요.
영림 얘는, 발버둥 치는데 어떻게 목을 졸라.
희수 저항 흔적이 있어야 한단 말이에요. 강도한테 당했으니 반항했을 거 아니에요. 저항한 건지 순순히 목 내놓은 건지 다 나와요.
영림 뭐가 그렇게 까다롭니 정말.
희수 올라오세요.

영림, 다시 희수 배 위에 올라앉아 천천히 목에 손 갖다 댄다.
이번엔 좀 더 과감하게 이 악물고 손에 힘주는데 희수 다시 저항한다.
영림, 힘주며 버텨보지만 곧이어 다시 바닥에 나가떨어진다.
희수, 켁켁거린다.

영림 내 허리. (소리 꽥 지른다) 얘, 니가 죽기 전에 내가 먼저 죽겠다.
희수 (목 만진다) 이번엔 괜찮았는데 그걸 못 버티세요?
영림 내 잘못이니? 그렇게 힘을 쓰면서?
희수 어쩔 수 없다니까요.
영림 너 그거 몸부림, 절대 죽겠다는 애 아니야. 살고 싶어 하는 발악이야 너.

영림, 힘겹게 일어나 희수 밀치며 소파에 앉는다. 거친 숨 몰아쉰다.

영림 하래두 지금은 못하겠다. 갑자기 손목에 힘줬더니 얘가 저리다고 난리야.
희수 죽는 것도 쉽게 안 되네요.
영림 죽을 마음은 있고?
희수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있는 힘 다해서 생각하고 결정한 거니까.
영림 얘, 너 힘 아직 세고 셌어. 생각을 덜한 모양이다?
희수 처음부터가 잘못이에요.
영림 이제라도 그만 두자, 응?
희수 (고개 젓는다) 또 반복할 수 없어요. 여기서 끝, 그만 해야 돼요.
영림 나도 그만하고 싶다, 여기서.

두 사람, 나란히 앉아 있으려니 어색하다.

희수 그 할아버지, 잘 지내세요?
영림 누구 말이니?
희수 그 왜, 눈썹 짙으시고 입술 밑에 점 있으시던. 집에 오셨던 분이요.
영림 그 양반, 글쎄다. 그때가 언제니. 그 사람 얘긴 꺼내지도 말어. 사기꾼이다 사기꾼.
희수 또 당하셨던 거예요?
영림 당하긴, 말을 뭐 그렇게 하니. 그리고 얘, 내가 너한텐 할머니로 불리지만 아직 오십 중반이고 그때면 딱 쉰 됐을 땐데 그 양반도 그 또래였고. 근데 할아버지가 뭐니, 누가 들으면 내가 칠십 먹은 꼬부랑 영감탱이 만나는 줄 알겠다.
희수 근데 왜 오셨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랑 아니 아저씨들이랑 쫑날 때쯤 들르시잖아요. 돈 빌려 달래요, 만나시는 분이? 안돼요, 할머니. 그러시다 또 당해요.
영림 여우털 때문이라니까. 너는 뭐 내가 남자한테 돈이나 뜯기며 사는 줄 아니? 하필 있어도 니가 있을 게 뭐래니 정말.
희수 잘 못 걸리신 거죠.
영림 그리고 지금 니가 내 걱정할 때니? 고마워 죽겠다, 얘.
희수 힘들 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죽고 싶단 생각 안하셨어요?
영림 죽긴 왜 죽니, 질기게 어떻게든 살아야지. 난 그런 짓 절대 안한다. 어머, 얘 술 술. (냉장고 쪽으로 달려간다) 술에 내 지문 묻은 거 아니니?
희수 장갑 끼고 드셨잖아요. 괜찮아요.
영림 맞다, 아이고 놀래라. 심장아. 내가 너 때문에 별 걱정을 다한다. 잠깐 얘, 술 한 모금 더 해야겠다. (냉장고 열고 남은 술 꺼내 모두 마신다) 얘, 장우 애비 올 시간 안 됐니?
희수 아빠, 수영 다니세요.
영림 수영을 한다고, 걔가?
희수 집에만 계시니까 엄마가 억지로 떠밀어 등록했어요. 몇 주 됐는데.
영림 걔 물가에 절대 안 가는 애잖아. 걔 때문에 여름에 계곡 근처도 못 갔잖니.
희수 그랬다고 들었는데, 엄마가 가라니까 알았다고 가시더라고요.
영림 그 놈이 내 말을 그렇게 들었으면 이렇게 집에서 살림이나 하고 안 살지. 기껏 사내 만들어놨더니.
희수 누울게요.

영림, 다시 희수 곁으로 와 이제는 자연스럽게 올라탄다.

영림 장우는?
희수 걔가 제일 바빠요. 태권도에 피아노에 다니는 학원이 많거든요.
영림 아니 초등학교 1학년이 무슨 학원엘 그렇게 다닌다니?
희수 2학년이요.
영림 어쨌든, 너네 엄마 미용실이 잘 되는 모양이다?
희수 아빠 말로는 할머니가 배우고 싶어도 보내주질 않아서 자기가 이렇게 됐다고, 장우는 다 시켜보고 잘하는 걸로 키울 거라고요.
영림 장우 애비가 그리 말해? (갑자기 손에 힘주며) 형편이 안돼서 못 보냈지, 내가 보내기 싫어 그랬어?
희수 (숨 막혀한다) 잠깐만 잠깐만.
영림 이게 할수록 는다?
희수 갑자기 누르시면 어떡해요.
영림 사람 죽일 때 지금 죽여도 되냐고, 언제쯤 괜찮냐고 물어보고 죽이니? (잠시) 장우 애비가 얼마짜리 반지 해준 거라니?
희수 무슨 반지요?
영림 엊그제 니 엄마 생일이었다면서. 통화하는데 장우가 말하더라, 아빠가 엄마 반지 사줬다고.
희수 장우한테 알아내신 거예요?
영림 니 엄마는 무슨 복을 타고 났다니, 여덟 살 어린 총각 만나 결혼해. 그 나이에 떡하니 아들 낳아, 남편이 살림 해줘, 반지도 해줘.
희수 복은 아빠가 타고 났죠. 잠깐만요, 오래 앉아계시니까 무거워요. 내려 왔다 다시 해요.
영림 (내려 와 앉으며) 젊은 애가 배가 나와 어쩌니. 관리 좀 하지 그랬어.
희수 이제 죽을 건데요 뭘.
영림 죽어서 좋겠구나.
희수 저 그때 열두 살이었는데 다 기억나요. 아빠, 진짜 생 날라리 건달이었던 거. 우리 엄마 만나 개과천선 제대로 했지, 안 그랬음 뻔해요.
영림 너 남의 아들 말을 웃기게 한다, 건달이라니?
희수 맨날 엄마 미용실 앞에서 기웃기웃, 쭈쭈바 하나 물려주고선 갖은 생색 다 내고. 땡잡은 거죠.
영림 걔가 그래도 나쁜 짓은 안했다 얘.
희수 좋으세요.
영림 그 놈이 어릴 때 하도 지 아부지한테 맞고 자라서 결혼하면 똑같이 하는 거 아닐까 겁났는데, 지금 봐라. 얼마나 장우한테 끔찍하니. 너한테도 그렇고.
희수 알죠, 다 알아요.
영림 근데 너 이러고 있니?
희수 나는 엄마처럼 살기 싫어요. 혼자 애 키우면서, 애 외롭게, 춥게 그런 거 싫어요.
영림 니가 왜 혼자야? 장우 애비도 있고, 니 엄마도……. 얘!
희수 왜요?
영림 너 애 뱄니?
희수 아니요.
영림 맞네.
희수 아니에요.
영림 아이고, 이게 뭔 일이라니. 세상에 지금이 어느 땐데 그걸.
희수 아니라니까 왜 그러세요.
영림 그 놈이 지우라니? 지 애 아니래? 도망갔어?
희수 그런 거 아니에요.

영림, 자리에서 일어나 한숨 쉬고
희수, 잘못 걸렸다는 표정으로 인상 쓴다.

영림 세상에. 너 그래서 이 생난리를.
희수 엄마 몰라요. 절대 안 돼요.
영림 어떻게 아는 놈이니?
희수 신경 쓰지 마세요. 죽어버리면 그만이에요.
영림 죽여버리면 그만이야. 어떤 놈이냐니까? 걔 좀 사는 애야?
희수 그게 왜 궁금하세요?

영림, 거실에 널브러진 물건들 정리하기 시작한다.

영림 얘 뭐하니, 이것부터 원상복귀 시켜라.
희수 뭐 하시는 거예요?
영림 너 지금 나를 아주 나쁜 년 만들려고 했어, 이 나쁜 년아. 너만 죽으면 됐지, 애는 왜 죽이니? 얼른 치워라 얼른.
희수 저 죽어요. 죽을 거예요. 가만두세요.
영림 괘씸하지도 않어? 그런 놈 어디 좋으라고 죽어 죽길? 그런 나쁜 놈 아작을 내야지.
희수 싫어요. 살기 싫어요. 다 싫어요. 죽을래요.
영림 이기적인 기집애, 끝까지 지 편할라고 만하지. 죽더라도 그 놈 아주 개망신을 주고 죽어야지 여기서 이러고 죽으면 뭐 알아줄 것 같니. 독한 대신 멍청하구나 니가.
희수 (고개 파묻으며) 사랑하는데 어떡해요.
영림 (혀 끌끌 차며, 긴 한숨) 질척한 애가 건조한 사람 흉내 내려니 더 힘들지. 애가 촌스럽게 뭘 우니 울기를.
희수 이대로는 안 돼요.
영림 니 엄마처럼 살기 싫어 결정한 게 죽어버리자, 이거니?
희수 애 혼자 낳아 못 키워요. 지우고는 못 살아요. 방법이 없잖아요.
영림 니 엄마 지금 너 이러고 있는 거 보면, 이러고 있는 거 알면, 어떨 거 같니?
희수 그래서 죽겠다잖아요.
영림 얘가 얘가, 그 죽는 다는 소리 그만 못해? 뱃속에 애가 다 들어 얘.
희수 엄마 알면 쓰러져요.
영림 니 시체보고 쓰러지는 것 보다는 백 번 천 번 낫겠다.
희수 저도 애기 낳아서 그 새끼랑 잘 키우면서 그렇게 살고 싶었어요.
영림 그러면 되잖니, 그거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래.
희수 끝났어요 걔랑, 방법 없어요.
영림 너, 니 엄마 어쩌고 하는데 그거 다 핑계야. 그 놈 잡을 자신 없어서 죄 없는 니 엄마 끌어다 그러는 거 아니야. 결과적으로 봐라, 장우 애미 지금 얼마나 잘 사니? 그런데 애가 춥네 어쩌네.
희수 할머니가 뭘 안다고 그러세요?
영림 니가 지금 이러고 죽으면 안 된다는 건 안다. 죽더라도 일단 해볼 건 하고 죽자.
희수 뭘 어떻게 해요.
영림 어떡하긴 울음 그치고 이쁘게 꾸미고 그 놈 집을 가든, 찾아가 단박을 내든 뭐라도 해야지.
희수 쪽팔려요.
영림 인생 내내 쪽박 차느니 잠깐 그러고 말어. 얘가 뭘 몰라. 얼른 이거나 치워라 얘.
희수 할머니.
영림 그래. 니 할머니 여기 있다. 얼른 일어서.

영림, 희수 억지로 끌어 세운다.

영림 죽을 땐, 누구 부를 힘도 없어. 넌 아직 멀었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희수와 영림, 널브러진 물건들 함께 정리한다.

영림 근데 걔 어디 사는 애니?
희수 일산 쪽이요.
영림 아파트?
희수 네. 왜요?
영림 몇 평이래니? 지네 집이지?
희수 할머니!
영림 얘는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알았다, 알았어. 얼른 치우기나 해라.

다시 깨끗해진 거실, 소파에 풀썩 주저앉는 두 사람.

영림 씻어라. 니 꼴, 말도 아니다 얘. 같이 다니는 사람 생각도 해줘야지.
희수 같이 가주시는 거예요?
영림 그럼, 너 혼자 가서 어디 말이 되겠어? 안되면 돈이라도 뜯어 와야 하는데, 혼자서는 부족하지. (눈치 살피며) 말이 그렇다는 거야. 얼른 들어가라. 나도 스케줄이란 게 있는 사람이야.
희수 뭐했나 싶어요.
영림 내가 할 소릴 니가 하니.
희수 진짜 죽으려고 했는데.
영림 죽기 싫어도 죽으려면 다 죽게 돼 있어. 뭘 서둘러.
희수 놀래셨겠어요.
영림 너 앞으로 좀 편안히 살라면, 그 독기부터 빼야겠다. 애가 원, 씻고 와라.
희수 금방 나올게요.
영림 천천히 구석구석 깨끗하게 씻어. 서두르지 말고.

희수, 일어나 나가다 영림 한 번 뒤돌아보고 퇴장한다.

영림 독한 것. 아이고 삭신이야. 죽어 달라는 거보다 죽여 달라는 게 더 무섭네. (잠시 상념에 잠겼다가) 그렇게 사는 거다. 질기고 길다. 결리고 저려. 그렇게 사는 거야. 다 그렇게 살아.

영림, 희수가 완전히 사라지자 고개 빼고 확인한다.

영림 (속삭인다) 희수야, 희수야. 물 잘 나오니?

슬금슬금 서랍장 쪽으로 가 서랍 열어 보석함 꺼내 온다.
무대 조금씩 어두워지며 영림의 모습만 남는다.
얼굴 가득 번지는 영림의 미소가 더욱 밝게 보인다.
소파에 앉아 보석함 열고 반지와 목걸이를 꺼내보는 영림, 환희와 감격의 표정.
그때,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놀라는 영림.
문이 열리는 멜로디에 안타까워하는 영림의 표정 위로 경쾌한 음악 흐른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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