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동대문학상 시 희곡ㆍ시나리오 장원

등장인물

송화선/58/女/지영의 엄마
최지영/32/女/화선의 딸

무대

무대는 화선의 집이다. 중년의 여자 혼자 사는 집답게 단촐한 살림이다. 무대의 한쪽 끝은 현관문으로 반대쪽 끝은 방문으로 한다. 거실에는 오래된 소파가 있고, 그 맞은편에는 텔레비전이 놓여있다. 거실 한쪽 벽에는 벽시계가 걸려있다. 부엌에는 냉장고, 식탁과 의자 두 개가 있고, 식탁 위에는 책 몇 권과 조미료통이 함께 있다.


화선, 돋보기안경을 쓰고 식탁에 앉아서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다.

화선 (느리게) 에스. 오. 엔. 지. 에이치. 떠블유. 에이. 에스. 유. 엔. (사이) 에스. 오. 엔. 지. 에이치. 떠블유.

초인종이 울린다. 화선, 시계를 보고 놀란다.

화선 이 시간에 누가...?

화선, 현관문으로 하는 무대의 끝으로 다가가면서

화선 누구세요?
지영 (속삭이듯) 송여사, 송여사
화선 지영이야?

화선, 문을 여는 시늉한다.
지영, 준모를 아기띠로 안고 커다란 짐가방을 든 채 무대로 들어선다. 화선, 지영이 든 짐가방을 본다.

화선 (약간 화났다.) 너 또

지영, 오른속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고 쉿!한다. 화선 멈칫한다. 지영, 왼손으로는 안고 있는 준모를 가리킨다.

화선 (속삭이듯) 자?

지영, 끄덕끄덕하면 화선, 가방을 받아들고, 방에다 준모를 눕히라는 듯 방 쪽(현관문 반대쪽 끝)을 가리킨다. 지영, 현관문과는 반대쪽으로 퇴장하면

화선 (혀를 차며) 철딱서니라고는

화선, 갑자기 부랴부랴 식탁에 놓인 책을 치운다. 그러는 사이 지영, 무대로 다시 들어서서 화선 쪽으로 온다. 화선, 지영의 등짝을 찰싹 친다.

지영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악!!! (눈 흘기며) 아 왜 때려?

지영, 맞은 곳을 문지른다.

화선 이번엔 며칠짜리야?

화선, 가방을 쳐다보며

화선 3,4일치는 싸왔네.
지영 준모 기저귀에 뭐에, 내 짐은 얼마 안 돼.

지영 소파에 가 앉으면, 화선 지영 옆에 가서 앉는다.

화선 또 뭐야?
지영 몰라.
화선 어째 그렇게 철이 없어 그래.
지영 알지두 못하면서
화선 그럼 말 좀 해봐. 대체 뭔 일이야, 이게.
지영 글쎄, 그 인간이 빚보증을 섰잖아, 말도 없이
화선 뭐어, 빚보증?
지영 그렇다니까!
화선 그렇다고 이렇게 무작정 오면 어째. 준모까지 데리고, 니가 보증섰어? 잘못은 박서방이 했는데 왜 니가 나와?
지영 몰라. 30분 내로 와서 무릎 꿇고 싹싹 빌지 않음 이번엔 정말 도장 찍을 거야. 앞으로 30분, (시계본다.) 그러니까 10시 49분이 데드라인이야.
화선 말이나 못하면, (사이) 지난번에 박서방이 말도 없이 회사 그만뒀을 때도 도장 찍는다더니 며칠 여 있다, 박서방 팔짱끼고 헤헤거리면서 돌아갔지 않어?
지영 왜 지난 얘길, (듣다 보니 짜증난다) 아 그래서 마누라한테 말도 없이 보증선 게 잘했다는 거야?
화선 누가 잘했대? 그냥 내쫓든지 구워삶든지, 니네 집 일이니까 니네 집에서 해결하라는 거야.
지영 나가라면 들어? 그 인간은 도대체 잘못해도 잘못했다 말하는 법이 없어.
화선 으이구, 인간하고는
지영 무릎 꿇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내가 지랄지랄해도 멀뚱히 앉아있어. 차라리 소리라도 같이 지르면 속이나 안 답답하지.
화선 그런 인사가 뭐가 좋다고 넌!

화선, 지영의 등짝을 한 대 더 때리면

지영 아우, 송여사 진짜 왜 그래! (지영, 화선을 피해 멀찍이 떨어지며) 그럼 박서방 데려왔을 때 좀 말려주지 그랬어!
화선 언제부터 엄마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구!
지영 쑥개떡 같은 말을 하니까 개떡같이 알아듣지.
화선 말이나 못하면, (사이)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구? 정말 도장찍을 거야?
지영 몰라. 보증선 것도 친한 사람이면 몰라. 대학교 선배래. 그것도 같은 과도 아냐. 수업 몇 번 같이 들었다나.
화선 아이고, 어째 그렇게 속이 물렀어.

화선이 좀 누그러지자 지영, 다시 소파에 가서 앉으면서 푸념한다.

지영 진짜 지하철에서 파는 구두약, 치약, 뚫어뻥 그런 거 하나 못 지나치고 죄다 사서 들여온단 말이야. 요샌 내가 하도 잔소리해대니까 거실 서랍장에 넣어놓는 거 있지. 지난번에 청소하다니까 서랍장을 열었는데~ 세상에 눈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그뿐이야? 정은 또 어찌나 많은지 연애할 적에도 구걸하는 사람 있음 절대 그냥 못 지나쳤어. 지가 돈 없음 나한테 (굵은 목소리, 비아냥거리듯) 잔돈 있어? 에휴. 내가 미친년이지.
화선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지영 몰라. 송여사, 근데 밥 남은 거 있어?
화선 이럴 때도 배는 고프구?

화선, 부엌 쪽으로 가며

화선 찬밥뿐인데
지영 괜찮아. 나 된장찌개 먹고 싶다.
화선 된장찌개?
지영 송여사표 된장찌개 먹고 싶어. 두부 두툼하게 썰어 넣고, 호박, 감자, 양파, 버섯 잔뜩 넣고 끓인 거

화선, 냉장고쪽으로 가면 지영 식탁에 가서 앉는다.

화선 버섯이 있나 몰라.
지영 없음 없는 대로 먹지 뭐.
화선 밥도 안 먹고 뭐했어?
지영 그냥, 안 먹히대.
화선 박서방은?
지영 안 차려주면 지가 알아서 라면 끓여먹어. 파 송송 썰어 넣고, 계란은 닭이랑 원수를 졌는지 꼭 두 개씩 넣고, 거기다 어디서 찾았는지 소시지에 치즈까지 넣어서
화선 얼씨구

화선 식탁으로 와서 행주질하는데

지영 뒤통수 한 대 딱 때려주고 싶더라. 정말
화선 사람이 어째 그리 진상을 떨어.
지영 그치? 그치이? 그러면서 빚보증까지 서는데 내가 열 안 받고 배겨?
화선 그건 그치만

화선, 다시 돌아서 부엌 쪽으로 가면

지영 뭐어? 지금이라도 들어가라고?
화선 지금은 준모 자니까 날 밝음 들어가.
지영 지금까지 뭐 들었어?
화선 모르고 결혼했어? 니가 니 아부지랑 정반대인 남자 만나 결혼하겠다고 머리 굵어질 적부터 그러지 않았어. 박서방 첨 데려왔을 때,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보니까 밥 먹던 숟가락 내던진 게 너야, 이것아.

화선, 숟가락, 젓가락 가져와서 지영 앞에 가지런히 내려놓는다.

지영 (숟가락 보고 피식 웃으며) 그래도 좀 말리지 그랬어?
화선 자식농사가 맘처럼 되는 줄 아냐? 너 지금도 가끔씩 준모 뱃속에 도로 넣고 싶지? 준모가 걷기만 해봐라. 걷는 거나 발맞춰 걸어주는 줄 알어? 지금 말 못하고 누워있으니까 답답해도 나중에 뒤돌아 생각하면 지금이 젤 편하고 이쁠 때야.
지영 송여사도 나 어릴 때가 좋았어?

(사이)

화선 좋았지. 헤실헤실, 방긋방긋. 너 준모 한 살배기라고 암 것도 모르는 거 같지? 다 알아. 저 조그만 머리에 다 기억하고 있어. 너, 준모 앞에서 당당한 에미 될라믄 그럼 안 되는 거야.
지영 조그만 게 뭘 안다구
화선 그래두 너 그게 아니다.
지영 순 엉터리 이론만 줄줄 꿰고 있으면서, 언제는 내 사주가 잘 먹고 잘 살 팔자라더니
화선 박보살이 선무당인 줄 내가 알았대냐? 그리고 뭐 내가 뭐 너 나쁘게 되라고 그랬냐?
지영 누가 그렇대? 난 내 팔자만 믿고 금숟가락 물고 난 놈이라도 만나는 줄 알았더니 순 엉터리였단 거지. 팔자 믿지 말고 그 시간에 공부나 한 자 더 할걸. (사이) 근데 나 밥 안줘?
화선 차려, 금방 차려. 이것아. 된장찌개는 낼 아침에 먹구 지금은 늦었으니까 있는 반찬에 먹고 말어. 지금에야 배고파도 먹고 일어나봐라. 속이 부글부글 끓고 쓰리지.
지영 (투덜투덜) 잔소리는..
화선 그냥 얌전히 듣는 법이 없지?

지영, 입을 삐죽댄다.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 지영 화들짝 놀라서 일어난다. 방 쪽으로 달려가며

지영 응~ 준모야. 엄마 간다~
화선 (못미더우면서도 신통방통하다.) 에이그, 제까짓 것도 에미라구.

화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접시에 소복히 옮기고, 전기밥통에서 밥을 퍼낸다. 밥을 수북히 담다가 갸웃,하더니 다시 조금 덜어낸다. 그러다 한 번 더 갸웃,하면서 생각하더니 덜어낸 밥을 담아서 수북히 담는다. 지영, 다시 무대로 나오며 화선 쪽으로 간다.

지영 히익! 무슨 머슴밥 줘?
화선 많은가?
지영 많지이~ 아깐 낼 속 아프다고 된장찌개도 안 끓여준다더니 밥은 무슨 이렇게나 많이, 박서방도 이거 다 못 먹겠네.
화선 덜까?
지영 덜어덜어. 그거에서 딱 반만, (화선, 조금만 덜어낸다.) 아니아니 더 덜어. 딱 반만 달라니깐?
화선 알았으니까 거 가서 앉기나 해.
지영 정말 딱 반만 줘야 된다?

지영, 식탁에 앉는다. 그러면서도 못 미덥다는 듯 화선 쪽을 빼꼼 보다가 화선이 돌아서자 부리나케 젓가락을 집어 들고 반찬을 뒤적인다.

화선 반찬 그렇게 헤집는 거 아니랬지? 위에 있는 걸로 담뿍 집어서 먹어.
지영 하여간에 잔소리..

지영, 밥을 보는데 맘에 안 든다. 얘기한 것보다 너무 많다. 한 소리 하려다가 참고 숟가락을 집어 든다.

지영 남겨도 몰라. 난 말했어.
화선 먹어. (문득 생각나서) 아이구 참! 준모는 아까 왜 그렇게 울어?
지영 몰라. 배가 고픈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고 기저귀도 아직 괜찮던데?
화선 낯설어 그른가.
지영 에이, 낯설기는
화선 왔다 간지 좀 됐지?
지영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지영 밥을 뜨면 화선 반찬을 집어 지영 밥 위에 올려준다.

화선 저저번달 마지막 주말에 왔다가지 않았어? 왜, 마산 이모네 은주 결혼식 하던 그 주에
지영 으응, 그러네. 벌써 두 달이 됐나? 근데 은준 잘 지낸대?
화선 그 집은 시어매가 그렇게 속을 썩이나 보더라. 은주는 속 풀 데가 없으니까 즈이 언니들하고 엄마 붙들고 그러고, 걔네 엄만 또 친구라고 해봤자 나랑 대전 이모밖에 더 있어? 그니까 우리한테 풀고, 그거 땜에 요새 아주 속 시끄러워죽겠어.
지영 (먹으면서 건성건성 듣는다) 으응 그래?
화선 모피코트에 명품가방 안 해왔다고 그렇게 애를 잡는대. 아니 그럼 즈이 집은 뭐 해줬나? 다이아라도 큼지막한 거 하나 해주고 그런 말 하면 밉지나 않지.
지영 (계속 먹으면서 건성건성) ‘시’자들은 하여간에 그렇지 뭐.
화선 그러고 보면 느이 새언니는 효부지.

지영, 멈칫하더니 화선을 바라본다.

지영 한 게 뭐 있어서?
화선 효부지. 우리 집서 해준 게 뭐 있냐. 다이아를 해줬어, 그렇다고 집을 해줬어.
지영 그 쪽 문화는 원래 그렇다니까? 지들이 번 돈으로 결혼하는 거야. 그리고 엄마가 뭐 은주네 시엄마처럼 빅토리아를 잡아먹을 듯 하기나 했수? 하기사 영어가 돼야 잡기라도 하지.

지영, 웃는다.

화선 엄마를 가지고 노는구나, 아주
지영 그리고 걔네는 혼수, 예물 그런 문화가 없잖아. 그냥 지들끼리 알아서 결혼하는 거야. 왜 또 그래?
화선 그래도 느이 오빠 혼사를 너무 격 없이 한 거 같어.
지영 (답답해서) 아 정말 왜 그러우?
화선 (서운해서) 뭘 왜 그래. 그냥 그렇다는 거지. 엄만 맘에 있는 소리두 못허냐?

지영, 다시 밥을 먹으려다가 생각하니 뭔가 있구나 싶다. 화선을 보는데 화선 지영의 시선을 느끼지만 딴청을 피운다.

화선 나물이 아주 맛있게 됐어. 나물이나 좀 먹어라.
지영 (역시 뭔가 있구나 싶다.) 왜에, 캐나다 가려구?
화선 그냥, 한 번 가볼까 했지.

지영, 벌떡 일어난다. 무언갈 찾듯이 사방을 살펴보다가 거실장을 열어본다.

화선 쟤가 왜 저래?

화선, 만류하듯 일어나는데 지영, 방을 보더니 걸음을 빨리한다. 화선 따라가면 지영 방 쪽으로 퇴장,

화선 (놀라서) 아이고, 얘! 너 그러다 준모 깬다!

화선, 숨겨둔 책을 다시 숨기려는데 지영, 다시 무대로 나오면서 무언가를 들고 나온다. 여권이다. 지영, 화선이 들고 있는 책을 보며

지영 언제부터 준비했어?
화선 얼마 안됐어.
지영 엄만 정말 왜 그래?
화선 뭐가 또.
지영 몰라서 물어?
화선 모르겠다, 왜? (하소연하듯) 내가 내 아들 집 가는 게 뭐가 그리 큰 죄라고 이렇게 딸년이 에미한테 따박따박 대드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이번이 첨이잖아?

지영 화선을 노려보다가

지영 엄만 정말 해도 너무한다.
화선 재선이 본지도 한참 됐구
지영 제이슨 사진은 오빠가 6개월에 한 번씩 보내준다며
화선 그거 가지고 되?
지영 안될 건 뭐야?
화선 오빠가 바다 건너 사는데, (넋두리하듯) 잠이나 제대로 자는지 밥이나 제대로 챙겨먹고 다니는지 궁금하지도 않어?
지영 빅토리아가 어련히 알아서 해.
화선 새언니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말랬잖어.
지영 파란 눈에 금발은 아니어도 갈색머리에 초록 눈 가진 며느리 들였음 이젠 깨어야 되는 거 아니우? 걔네 문화에 시누, 새언니 그런 게 어딨어?
화선 아무리 그래도 얘, 난 이해 안 간다. 새언니 이름을 어찌 그렇게 함부로 불러? 너보담 세 살이나 많은데
지영 말 바꾸지 말고, 송여사 오빠가 빅토리아랑 결혼한다고 할 때 뭐라고 했어? 여기서 결혼해서 여기서 자리 잡고 살 테니까 엄만 신경 쓰지 마세요. 제 삶은 제가 알아서 살아요. 했잖아. 근데 엄만 뭐가 그렇게 그립고 보고프고 그래서 오빨 또 쫓아가느냐구
화선 그립고 보고프고 눈에, 가슴에 사무쳐. 됐냐?
지영 엄만 정말 속도 없다.
화선 속없지. 엄마가 아들 앞에서 속차릴 건 또 뭐야? 넌 준모 앞에서 그래?
지영 준모 얘기가 왜 나오우?
화선 준모 자다 깨면 밥 먹다 말고 종종 거리며 쫓아가지? 오랜만에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데 갑자기 준모 울면 나오던 똥도 도로 들어가지? 그런 게 에미다.
지영 (짜증스레) 표현하고는 진짜
화선 넌 고상해서 좋겠다, 엄만 너랑 달리 촌스러우니까 느이 오빠 찾아 갈랜다.
지영 진짜 말이나 통하는 언니나 낳아주지, 왜 꼴도 보기 싫은 오빠만 낳아줬는지
화선 그것도 엄마 탓이구나.
지영 그럼 내가 오빠 낳아달라구 빌었수?
화선 하여간에 따박따박, 넌 왜 에미가 하는 것마다 어깃장이냐?

지영, 눈을 흘긴다.

지영 또 뭐?
화선 접때 그 복덕방하는 김씨랑도 한참 잘 되가던 참에 김새게 만들었잖어.
지영 또 그 얘기...(사이) 하필 복덕방 김씨 아저씨랑 그럴 건 뭔데?
화선 그럼 넌 고르고 고른 게 박서방이구? 복덕방 김씨야 훤칠허니 잘생겼지, 애들 다 결혼시키고 이제 남은 여생 같이 잘 보내기만 하면 되는데 넌 내가 하는 게 왜 다 그렇게 못마땅해?
지영 기왕에 한 번 더 가는 거 삐까뻔쩍하고 으리으리한 데로 가면 좋잖아. 그럼 내가 왜 걱정을 해?
화선 그게 중허냐?
지영 행복슈퍼 아줌마가 그 아저씨 주사 장난 아니라더라. 아버지한테 당한 16년으론 부족하우?
화선 그 여편네 입놀리는 건 하여간에, 남잔 그 나물에 그 밥이여. 뭐 다른 게 있다구
지영 중국산 고사리랑 제주도 고사리가 같어?
화선 그래도 그만한 자리가 없는데
지영 냉수 줘? 마시면 속차릴래?

지영 냉장고 쪽으로 간다.

화선 그걸 말이라고! 너도 담번엔 꼭 너 같은 딸이나 하나 더 낳아서 나중에 이 꼴 당해봐라. 응? 먹이고 입히고 재웠더니 기집애가 뚫린 입이라고

지영 가다가 멈추고 다시 돌아오면

지영 왜? 내가 남편복은 없어두 자식복은 있다더라. 준모가 오빠 같이 할 거 같애?
화선 그럼 규영이는 뭘 그리 잘못했냐?
지영 (어이없다는 듯) 송여사 수술할 때 들어와보길 했어, 전화 한통을 제대로 하길 했어. 그 수발 다 든 건 누군데? 그것도 간단한 수술이길 해? 암 덩어리를 잘라냈어. 송여사 지금 신장 한쪽뿐이잖어?

화선 지영을 노려본다.

화선 그래서 그 때 수발든 게 그렇게 아니꼽냐?
지영 그래. 아니꼽다, 왜? 박서방은 그래도 장모님이라고 회사 끝나면 바로 달려오기라도 했지. 빅토리아는 안부전화 몇 번이나 했어?
화선 또또 빅토리아래지.
지영 그럼 그런 올케 뭐가 이쁘다구, 새언니 소릴 해? 이름 넉자 제대로 불러주면 감지덕지지.
화선 캐나다에서 여기 오는 비행기값이 얼마냐.
지영 그렇대도 그 큰 수술을 하는데 전화 몇 통으로 입을 싹 씻어?
화선 누가 보면 너만 큰 일한 줄 알겠다? 느이 오빠랑 같이 들어준 보험에서 보험비 꼬박꼬박 나오고 간병인까지 두지 않았어?
지영 간병인둔 게 누군데? 그 뿐이야? 준모 베고 입덧하면서도 매일같이 병원 드나들었는데!
화선 아이고, 효녀 나셨구나. 그렇게 잘나서 엄말 이렇게 깔아 뭉게냐?
지영 비꼬지마.
화선 내가 내 아들, 내 손주 보고 싶다는데 그게 그렇게 아니꼬워?
지영 손주라면 제이슨뿐이야? 준모도 있잖아.
화선 제이슨이 뭐냐. 재선이가 훨씬 이쁘지.
지영 제이슨이 (이름 부르듯) 재선아~ 하면 알아듣기나 하구? 왓? 왓? 이러기나 안 하면 다행이지.
화선 또또! 느이 오빠가 한국말도 조금씩 가르친다더라.
지영 그래봤자 뼛속부터 캐나다인이지, 걔가 한국말은 해봤자 또 얼마나 하겠어?
화선 넌 애가 왜 그렇게 꼬였냐.
지영 뭐가 또 그래? 제이슨 보고 싶으면 준모한테나 좀 더 잘해주면 되잖아.
화선 친손주랑 외손주랑은 다른 거여.

지영, 멈칫한다. 짜증이 갑자기 난다.

지영 왜, 준모는 엄마 제사상 안차려줄 거 같은데, 제이슨은 그래도 친손주니까 챙겨줄 거 같아서?
화선 넌 어째 말을 그 따우로 밖에 못 허냐, 응?
지영 어쨌든 준모가 외손주니까 제이슨보다 못하다는 거잖아.
화선 그걸 또 그렇게 꼬아?
지영 오빠한테 전화해서 제이슨한테 홍동백서, 어동육서 그런 것도 가르치라고 해. 눈 새파란 손주 며느리한테 제삿밥 얻어먹게 생겨서 좋겠수.
화선 이게 뚫린 입이라고! 너 엄마한테 이렇게 밖에 못 허지? 아주 딸년이니까 내가 참지. 아이고, 남이었음 머리채라도 잡는다, 이것아!
지영 잡고 싶음 잡어! 난 뭐 괜히 참고 있는 줄 알아?
화선 이게 정말! 내 새끼래도 그 따위로 굴면 줬던 것도 도로 내놓으라고 하고 싶어. 물렸던 젖까지 토해내라고! 이런 심정을 니가 아냐?
지영 그럼 친손주랑 외손주가 다르단 건 맞는 거고? 그럼 지금까지 준모 볼 때마다 그 생각했어? 그래서 잘 안아주지도 않고 그런 거야?
화선 그건 허리가 아프니까 그런 거지. 내가 준모를 때리길 했냐, 뭘 했냐.
지영 때리진 않았어두 맘은 늘 그랬다는 거 아냐. 어쩜 엄만 그래?
화선 그래! 준모 안고 있음 한 번도 못보고, 한 번도 못 안아준 재선이 생각이 나서 그랬다. 손주새끼 사진으로 밖에 못 보는 내 신세가 처량해서 그래. 왜! 그렇대도 준모보다 재선이가 아픈 손가락인 건 아니다, 너.
지영 준모 제대로 안아준 적이 있기나 하구?
화선 아이고, 그만 못해? 너 꼴도 보기 싫으니까 방엘 들어가서 준모나 보든지, 아님 다 싸들고 느이 집에 가!
지영 가! 가면 될 거 아냐! 왜 또 내가 다 잘못했지. 난 딸년이니까, 보기도 싫은 딸년이니까! 나 낳기 싫다고 경운기 타고 가다가 논두렁에서 굴렀다며! 송여산 나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랬던 사람이잖아!
화선 그건 또 어디서 주워들었어?
지영 어디서 들으면 뭐! 그게 중요해?
화선 느이 작은 고모구만. 아이고 그 여편네 참 별 소릴 다하고 다니네, 정말
지영 잘못했음 잘못했다고 해! 괜히 고모 탓하지 말고, 고모가 구르랬어?
화선 그 때 어땠는지 니가 알기나 알고 이래? 난 뭐 좋아서 그랬는줄 아냐?
지영 왜 이렇게 내 주위엔 잘못은 지들이 해놓고, 미안하다 소리 한 번 못하는 인간들뿐이냐고!
화선 그래. 내가 다 잘못했다. 그러니까 그만 허자.
지영 (말 끊으며) 뭘 그만 해. 나 아직 시작도 안 했어.
화선 그만 허자고
지영 엄만 엄마가 시작하고 그만 하자고 하면 다야?

(사이)

화선 자신이 없었다!
지영 뭐가?
화선 그 때 느이 오빠도 먹을 거 제대로 못 먹일 때야. 그래서 매일같이 빽빽 울리고 그랬는데 너까지 태어나면 어쩔까 싶었어. 두 생명을 굶기느니 하나라도 잘 키우자 싶었지. 느이 아부지가 그 때부터 제 몫이나 했게? 나라고 뭐 그렇게 독한 년인 줄 알어? (가슴을 치며) 여기 들어와보지 않았음 누가 그 심정을 알어? 느이 고모가? 즈이 남동생 귀한 줄이나 알지, 올케 고생하는 게 보이기는 허구?
지영 그래놓고 왜 낳았어? 아니, 애초에 어떻게 애를 떼어낼 생각을 했어? 첨엔 이해해야지 싶었는데 준모 가지고 낳고 그럴수록 못하겠더라. 준모 이쁜 짓할 때마다 독하구나, 송여사 참말 독하다 하고 살았어.

(사이)

화선 생명이 그렇게 질겨. 얼마나 꼭 붙들고 있었는지 안 떨어지더라. 그러니 하늘이 주신 거구나 하고 낳았지. 낳아보니 얼마나 이뻐. 낳길 잘했구나 내가 몹쓸 짓을 했구나, 미안허다, 내가 잘못했다 싶었지.
지영 (비웃듯) 최지영 그 때부터 똥고집이었구만
화선 최씨 집안 고집이 어딜 가? 황소심줄만하다잖어.
지영 그래서 아직도 왼쪽 무릎은 성하질 못하고?
화선 어찌 아냐?
지영 그래서 수술했을 적에 그 쪽은 절대 안 주물러줬지.
화선 언제 알았길래?
지영 아부지 장례식날, 고모가 술 취해서 송여사 독하다고 그러면서
화선 (놀라서) 십 년을 넘게 그걸 담고 살았어? 이것아! 아프면 아프다고 내지르기라도 하지!

화선, 지영을 가서 껴안으면

지영 (안긴 채로) 왜 날 죽이고 싶었냐고 물어, 그럼?
화선 그럼 지금은 어떻게 물었어?
지영 지금이야 머리끝까지 화가 났으니까 그랬지.
화선 (지영의 등을 쓸며) 낳고 보니 너무 예뻐서, 예뻐 죽겠어서 힘든 것도 모르겠더라. 그 때 니가 포기 안 해줘서 고맙구나, 하고 살았어.
지영 한 번도 죽어주지 그랬냐고 한 적 없어?
화선 없어. 죄지은 마음으로 너 아프면 그 때 내가 그래서 그런가 싶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께 비나이다. 그렇게 아침저녁으로 빌어가면서 빚지는 마음으로 살았지.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 들리고

화선 왜 우나, 가봐라.

지영 다시 방 쪽으로 가면

화선 준모야, 아가야. 울지 마라. 느이 엄마 힘들다. 느이 엄마 힘들면 느이 할매도 힘들다.

지영, 준모 안고 나오는데 계속 아기 울음소리

화선 왜 울어?
지영 기저귀도 갈아주고, 젖은 물지도 않으면서 자꾸 울어.
화선 이리 줘봐.
지영 (아직 서운함이 남아서) 됐어.
화선 줘봐. (안으며) 우리 준모가 뭐가 그리 서러워서 울까.
지영 (옆에서) 준모야. 준모야.
화선 거봐. 아직 젖먹이래도 다 안다니까. 이 어린 게 지 에미가 바락바락 소리 지르니까 놀래서 그러는 거지 뭐.
지영 (눈 흘기며) 갖다 붙이기는
화선 갖다 붙이긴, 봐라. (준모 다독이며) 준모야, 우리 강아지야. 엄마 때문에 니가 놀라서 그러지, 응?

화선이 준모를 계속 토닥이며 달래면 울음소리 차츰 잦아든다.

화선 지영아, 봐. 응?
지영 (준모를 들여다보며) 신기하네.
화선 인제 가서 눕혀도 되겠다.

지영, 준모 받아들고 토닥이면서 방 쪽으로 퇴장

화선 울지 마라. 아가, 울지 말아라.

지영 다시 무대로 들어오면

지영 갈 거야?
화선 가야지.
지영 추운 것도 싫어하면서
화선 그깟 게 겁나?
지영 외할머니가 한겨울에 태어난 막내딸, 꽁꽁 싸매서 키웠댔어.
화선 그랬댔지.

(사이)

지영 오빠 못 먹이고 못 입히고 그런 게 사무쳐서 그랬어?
화선 사무치지. 그 생각만 하면 먹던 밥도 얹혀. 내 새끼 잘 있나 싶고 궁금해서 자꾸만 얹혀. 밥이 아니라 느이 오빠가, 재선이가 자꾸만 가슴에 얹혀. 그래서 그래.

(사이)

지영 영어 공부는 얼마나 했는데?
화선 이름이나 좀 쓰고, 인사나 할라나?
지영 그래서 제이슨하고 말이나 통하구?
화선 보면서 그 얼굴 쓰다듬어줄 수나 있음 딱 좋겠다.
지영 송여산 정말 배알도 속도 없구나.
화선 (웃으며) 그래. 엄만 그런 사람이다. 왜?
지영 못났어.
화선 그럼 넌 못난 에미 밑에서 큰 못난 딸이구
지영 그렇지.
화선 들어 갈 거지?
지영 낼 아침에
화선 된장찌개 끓여줄게. 먹고 가.
지영 됐어.
화선 행복슈퍼 여편네 입은 가벼워도 두부는 좋은 걸로 들여놓잖아. 낼 아침에 사다가 맛있게 끓여줄게.
지영 두툼하게 썰어 넣고?
화선 그래.
지영 그래서 가면 언제 오는데?
화선 갔다 도로 와. 걱정 말어.
지영 그래서 언제?
화선 한 보름은 있다 오겄지.
지영 근데 여태껏 말 안해줬어?
화선 말하면 그 꼴 날 거 뻔히 아는데?
지영 그래두 한바탕 하고 나니 속이 시원하지?
화선 그래. 날 잡았구나, 아주

(사이)

지영 나중에 나도 그럴까?
화선 뭐가?
지영 준모 다 크면
화선 그렇겠지. 너 준모랑 다른 하늘 이고 살 수 있을 거 같애?

(사이)

지영 어떻게 살았수?
화선 살다보니 살아지더라.

준모가 칭얼거리는 소리 들리면 지영 일어나려는데 화선 손사래치며

화선 내가 갈게. 있어.

화선 방 쪽으로 퇴장하면 지영 어디론가 전화 건다. 신호음이 가고 딸깍 소리 들리면

지영 나야. (사이) 안 자고 뭐해? (사이) 웬 걱정... 어디긴 어디야. 내가 갈 데가 어디 있다구. 당연히 엄마네지. (사이) 준모? 자나 봐. 엄마가 보고 있어. (사이) 그래. 내일 아침에 갈게.

차츰 조명 어두워진다. 준모 재우는 화선의 목소리가 들린다.

화선 아가야. 준모야. 울지 마라. 느이 엄마 힘들다. 느이 엄마 힘들면 느이 할매도 힘들다. 준모야, 아가야. 울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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