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2019.1.22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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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 베이비제26회 동대문학상 소설 가작

소년이 핸드폰을 꺼내 든다. 어둠 속에서 핸드폰 액정 화면이 진동하고 있다. 화면에 발신자의 이름이 나타나 있다. 소년이 평소에 알고 지내는 형의 이름이다. 소년은 그가 전화를 건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그에게 상납금을 바쳐야 할 날짜가 어느새 이틀 지났다. 소년이 마련한 상납금은 목표액에 부족했고, 주위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지 못했다. 다른 친구들 역시 상납금을 마련하는데 바빠서 여윳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끈기 있게 오던 전화가 끊기자 소년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소년은 형의 욕을 하면서 침을 뱉는다. 침이 화단의 흙과 엉긴다.

소년은 인도 옆에 있는 화단 안쪽에 서 있다. 가로수와 무릎까지 오는 관목 등으로 꾸며진 화단 근처에는 조명이 없다. 나무 뒤에 있는 소년의 모습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소년은 인도를 바라보고 있다. 소년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새벽 2시가 가까워지고 있다. 인적은 없고 자동차들만이 간간이 지나갈 뿐이다. 헤드라이트가 위협적으로 번뜩였다가 사라진다.

소년은 기분이 점점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본드에 취했던 머리가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한다. 두통이 소년의 미간을 갉아대고 있다. 소년은 가방을 뒤적인다. 담배를 찾던 소년은 안에 본드가 들어 있는 것을 본다. 친구의 집에서 본드를 불고 나왔을 때 자신도 모르게 챙긴 모양이다.

소년이 시각을 확인하는 횟수가 늘어가고, 그 간격이 짧아진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까 고민하는 찰나 어디선가 노래가 들려온다. 그녀 없이는 안돼요. 약간 쉰 목소리를 들은 소년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소년은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본다. 젊은 여자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오고 있다. 뺨에 짙은 홍조가 어려 있고 걸음걸이는 약간 힘이 풀려 있다. 여자는 취한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도 간절한 내 기도 이뤄질 수 있다면. 여자는 소년의 앞을 통과한다. 소년은 여자를 본다. 여자의 옷차림을 살핀다. 여자는 질이 좋아 보이는 연분홍색의 코트를 입고 있고 제법 괜찮은 가방을 들고 있다. 차라리 나를 데려가요. 소년은 여자의 뒤를 쫓아간다.

여자는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간다. 소년은 근처를 살펴본다. 경비실은 비어 있고 자동차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주차장은 적막하다. 다시 여자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여자는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소년이 그 뒤를 따른다. 여자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다. 소년은 계단 아래쪽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엘리베이터가 곧 도착한다. 여자가 엘리베이터에 타는 것을 보고선 소년은 급히 뛰어간다. 반쯤 닫힌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몸을 틀어 들어간다. 여자는 소년을 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여자는 7층을 누른다. 소년은 8층을 누르고서는 엘리베이터 뒤쪽에 선다. 여자는 팔짱을 낀 채 계기판을 올려다보고 있다. 2층. 오 그대여, 목이 메어 너를 불러봐도. 여자는 작게 흥얼거리고 있다. 소년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친다. 3층. 차라리 나를 데려가요. 소년은 가방 지퍼를 끄른다. 망치를 꺼내 여자의 머리통을 후려친다. 소년은 친구가 망치를 찾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여자는 조용히 쓰러진다. 소년은 망치를 쥔 채로 여자에게 다가간다. 발로 건드려보지만 여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소년은 참았던 숨을 터트린다. 소년은 친구의 말을 듣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소년은 은행에서 나오는 할머니의 지갑이라도 훔칠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친구는 소년의 발상을 비웃었다. 친구는 소년에게 본드를 짜 넣은 봉지를 건네며, 차라리 엘리베이터에서 뻑치기를 한 번 하라고 제안했다. 일이 의외로 쉽게 끝나서 소년은 조금 허탈하기도 하다. 소년은 여자의 가방을 잡아당긴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가 충격과 함께 정지한다. 소년의 몸이 크게 휘청거린다. 곧 고요가 찾아온다. 위화감이 소년을 엄습한다. 엘리베이터 특유의 미미한 진동과 소리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소년은 계기판을 바라본다. 숫자는 6에서 멈춰 있다. 곧 숫자가 사라지고 뒤를 이어 엘리베이터의 조명이 꺼진다.

완전한 어둠이 소년에게 찾아온다. 소년은 멍하게 서 있다. 눈은 어둠에 익숙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소년은 핸드폰을 꺼낸다. 전화를 걸어보지만 걸리지 않는다. 수신 전파의 정도를 나타내는 막대기는 바닥을 보이고 있다. 소년은 핸드폰으로 주변을 비춰본다. 여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누워 있다. 소년은 등을 벽에 기대고 앉는다.

그는 일이 귀찮게 됐다고 생각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은 수리공이 수리를 끝마쳤을 때일 것이다. 엘리베이터 밖에 서 있을 사람들은 바닥에 누워있는 여자를, 소년의 손에 들린 망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찰서에 가게 될 것이라고 소년은 생각한다. 경찰 조사를 받다 보면 시간이 지날 것이다. 붙잡혀 있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상납금을 받지 못한 형은 화를 낼 것이다. 차라리 소년원에 들어가는 편이 편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얼마 동안이나 지내게 될까? 기껏해야 몇 년 정도일 것이라고 소년은 추측해 본다.

소년은 여자의 가방을 열어본다. 장지갑에는 카드만 잔뜩 들었지 현금은 삼천 원밖에 없다. 카드도 한 장의 체크카드를 제외하고는 죄 포인트카드 뿐이다. 소년은 으르렁거리며 지갑을 내던진다.

조금씩 정신이 맑아진다. 본드 기운이 날아간 빈자리를 현실이 채우기 시작한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쓰러져 있는 여자가 있고, 엘리베이터 밖에는 이번에도 늦게 상납금을 내면 팔을 부러트리겠다는 형이 있다. 소년은 핸드폰의 폴더를 열었다가 다시 닫는다. 조명에 닿아 희석되었던 어둠이 원래의 농도로 돌아온다. 소년은 장롱 안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다. 장롱에서 본드를 불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빨리 취했다. 공기의 흐름이 차단된 그 안에서 소년은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고, 깨어났고, 웃고 침을 흘렸다. 이곳은 좀약 냄새만 없다 뿐이지 장롱이나 다름없다.

소년은 잠시라도 현실을 잊고 싶다. 가방에서 본드를 꺼낸다. 가방에 든 것을 모두 쏟아내고 그 안에 본드를 짜 넣는다. 가방에 얼굴을 집어넣는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독한 본드 냄새가 코의 점막을 자극하고 폐 아래까지 단숨에 도달한다. 머리가 멍해지며 온 몸이 둥실둥실 떠오른다.

소년은 얼굴을 떼어낸다. 그는 커다란 정원 한가운데에 서 있다. 소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본다. 평소와는 다른 본드의 효능에 조금 당황한다. 하오의 햇빛이 나뭇잎 틈새로 들어온다. 나무에 빛 방울이 맺혀 아롱거린다. 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린다. 소년은 심호흡을 한다. 물기 가득한 바람의 냄새를 맡는다. 당황스럽던 소년의 마음이 조금씩 잠잠해지고, 이런 환상을 보게된 것이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을 하며 풀밭에 드러눕는다.

차라리 나를 데려가요 아직 그녀는 안돼요.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본다. 재킷을 입은 흰 토끼가 두 발로 뛰어가고 있다. 토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달려간다. 토끼는 소년을 지나쳐 간다. 토끼는 금시계를 들고 있다. 소년은 토끼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토끼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질 않는다. 소년은 있는 힘껏 달려간다. 소년의 시야에 어떤 나무가 들어온다. 나무 아래에 맨홀만 한 구멍이 나 있다. 토끼가 그곳으로 뛰어든다. 나무 아래에 다다른 소년은 구멍 안을 바라본다. 오 그대여, 목이 메어 너를 불러봐도. 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금시계가 반짝 거리는 것이 보인다. 소년은 안으로 뛰어든다.

구멍은 생각보다 깊다. 놀이기구를 타는 것 같은 낙하감에 잠시 신이 나기도 했지만 소년은 곧 지루해지고 만다. 소년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가 느닷없이 바닥을 만난다. 바닥에 떨어진 소년은 통통거리며 튀어 오른다.

소년은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일어선다. 주변에 있는 사물들의 색깔은 소년이 알고 있는 것과 사뭇 다르다. 오렌지 색 하늘에 보라색 구름이 떠간다. 자주색 나무에는 알이 굵은 호박이 매달려 있고, 나무 옆에는 거대한 버섯이 자라나 있다. 거대한 찻주전자와 찻잔이 보인다. 소년은 주변을 둘러보며 걷는다. 차라리 나를 데려가요. 노래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튼다. 저 멀리 토끼가 보인다. 토끼는 언덕을 넘어가고 있다. 시계의 크기는 두 배 정도 커진 것 같다. 소년은 달린다. 소년의 발아래에는 벽돌로 이루어진 길이 깔려 있는데, 토끼에게 가까워질수록 바닥의 색깔이 변하기 시작한다. 벽돌의 색이 흑과 백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소년은 거대한 체스 판에 서 있다. 소년은 토끼가 어디 갔는지 찾다가 전방에 서 있는 체스 말들을 본다. 체스 말들은 분홍색 코트를 입고 있고 질 좋은 가방을 들고 있다. 체스 말들은 모두 뒤통수를 보이고 있다. 검은 머리카락과 흰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있다. 소년은 체스 말의 가방을 빼앗으려 한다. 체스 말의 손은 아무리 힘을 가해보아도 열리지 않는다.

씩씩거리던 소년은 발아래에 망치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본다. 사람 몸통만 한 크기의 망치를 번쩍 집어 든다. 소년은 체스 말에게 다가간다. 흰 뒤통수를 내려친다. 체스 말이 앞으로 꼬꾸라진다. 도자기에 금이 가는 것처럼 머리가 갈라진다. 체스 말은 여전히 주먹을 쥐고 있다. 한 번 더 치자 그 사이로 금화가 줄줄 새어 나온다. 소년은 가방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며 웃는다. 다른 체스 말들의 머리를 두들기기 시작한다. 그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동전이 흘러넘친다. 피처럼 금화가 흘러내리자 소년은 그것을 양팔로 받아낸다. 이 정도라면 상납금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평소에 가지고 싶어 하던 바이크나 옷가지들도 모두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소년은 시시덕거린다.

금화를 집으려 바닥을 더듬거린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진다. 번뜩거리던 황금빛이 조금씩 탁해지기 시작한다. 손가락 사이를 간질이던 금화들이 사라진다. 그는 엘리베이터로 돌아와 있다.

소년은 한참이나 맨바닥을 더듬거린다. 엘리베이터 벽에 머리를 부딪친 뒤에야 제정신을 차린다. 그는 본드 기운이 빨리 사라진 것이 아쉽고 당황스럽다. 그는 이제 다섯 걸음도 똑바로 걸어가지 못하는 좁은 엘리베이터에 안에 있고, 그 안에는 여자도 있다. 여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누워 있다. 소년은 다시 가방을 집어 든다. 지퍼를 오므려 구멍을 최소한 작게 만든다. 숨을 들이켠다.

소년의 주위에 녹음이 가득 찬다. 아까 있었던 정원보다 훨씬 울창한 숲이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 있다.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지만 토끼는 없다.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소년은 발이 닿는 데로 걸어간다.

냇가가 나온다. 몇 아이들이 냇가에 있다. 그들은 뒤집어진 거북이를 괴롭히고 있는 참이다. 담뱃불을 거북이의 정수리에 가져다 댄다. 거북이는 버둥거리고 있다. 아이들은 킬킬거리며 이번에는 거북이의 뒤꽁무니에 불침을 놓는다.

어떤 남자가 다가오더니 거북이를 팔라고 한다. 남자는 사극에 나올 법한 의상을 입고 있다. 아이들은 그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보지만 남자가 소매에서 묵직한 돈주머니를 꺼내서 주자 곧 얼굴이 밝아진다. 아이들을 본다. 아는 얼굴이다. 거울 속에서 보던 얼굴이다. 소년은 아이들의 얼굴이 모두 똑같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소년은 거북이를 본다. 자신을 구해주었던 남자에게 거북이가 은혜를 갚는다는 내용의 동화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소년은 자신이 먼저 구해줄 걸 그랬나 고민하지만 저것은 거북이가 아니라 장난감 거북이니 별 상관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냇가에는 거북이와 소년과 남자만이 남는다. 남자는 거북이가 가엾다고 한다. 소년은 그런 남자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남자가 계속 소년에게 동의를 구하자 소년은 짜증을 낸다.

고작 거북이 장난감이잖아요.

아니야. 이건 살아 있는 거북이야.

무슨 개소리야. 그건 장난감인데.

아니야. 이건 살아 있는 거북이야.

소년과 남자는 서로 자신의 말이 맞는다며 옥신각신한다. 소년이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자 남자는 혀를 차며 등을 돌린다. 남자의 옷가지 사이로 무언가가 보인다. 엉덩이에 하얀 토끼 꼬리가 달려 있다. 허리춤에 매달린 것은 금시계다. 남자를 쫓으려 하지만 이미 그는 사라져 있다.

소년은 어느새 숲 안쪽으로 들어와 있다. 널따란 장소에 도착한다. 집이 한 채 있다. 나무로 지어진 집 옆에는 우물이 있다. 나무 사이에 걸어둔 빨랫줄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다. 소년은 문고리를 잡고 돌린다. 문이 부드럽게 열린다.

집 안은 어질러져 있다. 기다란 테이블 위에 있는 나무 그릇이 엎어져 있다. 그릇에서 흘러나온 희뿌연 수프가 말라붙어 있다. 의자들은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고 식기 중에 성한 것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소년의 발치에 무언가가 닿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빈 술병이 잔뜩 굴러다니고 있다.

2층 계단이 보인다. 소년은 위로 올라간다.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소년은 가사가 없는 그 노래가 낯설지 않다. 위로 올라가니 두 개의 방이 있다. 노래는 안쪽 방에서 들려온다. 계단 가까이에 있는 방을 지나치며 안을 흘낏 본다. 방에는 일곱 개의 침대가 놓여 있다. 안쪽 방으로 소년의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 있다. 여섯 명의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를 둘러싸고 있다. 알몸의 여자아이는 그들과 비슷한 나이이거나 조금 어려 보인다. 여섯 명의 아이들 중 가장 뒤편에 서 있던 아이가 뒤를 돌아본다. 아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소년을 잡아끈다.

이제 오냐?

소년은 아이를 본다. 이제야 그가 누군지 알 것 같다. 그 아이 역시 형에게 상납을 하는 처지에 놓인 아이이다. 자세히 살펴보자 아이들 모두 익숙한 얼굴이다. 그에게 뻑치기를 알려준 친구도 껴 있다. 소년의 친구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홀딱 벗은 하체가 축축하게 젖어 있다. 아이들이 소년을 여자아이 쪽으로 밀어 세운다. 소년의 친구가 뒤에서 말한다.

설거지해야지.

소년은 주춤거리다가 허리띠를 푼다. 여자아이에게 들어간다. 여자아이는 아무 말이 없다. 어떤 소리도 움직임도 없이 누워 있는 여자아이를 보자 소년은 기시감을 느낀다. 어디에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주에 데려온 아이인가? 지지난주였던가? 소년은 여자아이의 허벅지를 쓰다듬는다. 매끄러운 감촉이 차갑게 달라붙는다. 여자아이의 피부는 도자기 인형 같다. 설거지라는 말을 들어서인지 접시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자아이의 안쪽이 차가운 걸 보면 정말 접시나 도자기인 걸지도 모르겠다고 소년은 생각한다.

소년은 여자아이의 가슴을 강하게 쥔다. 가슴이 미끈거려 잘 잡히지 않자 소년은 주먹질을 한다. 여자아이의 몸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체스 말의 뒤통수를 쳤을 때처럼 부서진다. 그러나 금화는 나오지 않는다. 그 안은 텅 비어 있다. 친구가 소년의 뒤통수를 갈긴다.

너 때문에 하나 버렸잖아.

아이들이 여자를 옆으로 끌어낸다. 나머지 아이들은 서랍장을 연다. 서랍 안에는 접시들이 나란히 들어서 있다. 그 중 한 장을 꺼낸다. 아이들이 접시를 둘러 싼다. 친구는 창가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소년은 상납금에 대해 물어보려 한다. 혹시 남은 돈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하는데 앞으로 가지질 않는다. 손을 들어 앞으로 뻗자 벽이 느껴진다.

소년은 또다시 엘리베이터로 돌아왔음을 깨닫는다. 소년은 벽을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짧은 약효에 소년은 분노한다. 주먹을 휘두르고 싶지만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발과 손끝이 저리다. 그는 아직도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것을 보고 질색을 한다.

도대체 언제쯤 고쳐지는 거야.

소년은 투덜거리며 몸을 움직여보려고 노력한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소년은 바닥을 길 수 있다. 소년은 옆으로 몸을 누인다.

소년은 허기를 느낀다. 소년은 점심때부터 쭉 굶었다. 친구의 집에 갔을 때 이미 저녁 식사는 끝난 참이었다. 본드 때문에 잊을 수 있었던 허기가 불현듯 소년을 찾아온다.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집에 가면 냉장고가 있고 그 안에는 음식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도통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소년은 자신의 소지품을 확인한다. 핸드폰과 지갑, 담배, 라이터, 본드뿐이다. 소년은 그 중 본드를 택한다. 다시 한 번 본드를 불어본다.

이번에는 어둠이 사라지는 속도가 느리다. 소년은 엘리베이터가 장롱만큼 좋은 공간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여명을 기다린다. 주위가 밝아진다. 아니, 덜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소년은 어두운 골목에 서 있다. 옆에 서 있는 가로등의 조명이 침침하다.

발아래가 차갑다. 눈은 제법 많이 쌓여 있고 아직 그치지 않은 상태이다. 소년은 낡은 숄을 두르고 있고 발은 맨발이다. 소년의 어깨와 머리에도 눈이 쌓여 있다. 소년은 피곤해서 움직이기가 어렵다. 그런 소년의 어깨를 누군가가 건드린다.

정중해 보이는 신사이다. 얼굴에 하얀 털이 부숭부숭하게 난 신사는 성냥을 하나 팔라고 말한다. 소년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다. 신사가 재촉하자 소년이 몇 마디 욕을 한다. 신사는 주머니에서 금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자리를 뜬다.

소년은 자신의 손에 들린 바구니를 본다. 성냥이 든 바구니이다. 소년은 반가워하며 근처에 있는 폐지나 빈 박스 등 장작 대용으로 쓸 것들을 주워 쌓는다. 바구니를 덮은 천을 들추고 성냥을 꺼낸다. 성냥갑을 열어 보니 안에 든 것은 성냥이 아니라 본드이다. 소년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불은 온기만을 주지만 본드는 온기뿐 아니라 만복감까지 가져다주니 말이다. 소년은 가로등 옆에 주저앉아서 본드를 불기 시작한다. 본드를 한 번 불자 큰 놋쇠 난로가 나타난다. 소년이 손을 뻗는다. 손끝이 녹는 것이 느껴진다. 빨갛게 얼은 발도 앞으로 뻗는다. 그러자 불길이 사라져 버린다. 놋쇠 난로는 봄을 맞은 눈사람처럼 허물어져 사라진다.

소년은 본드가 불량이라고 생각하며 바구니 안에 가득 들어 있는 본드 중 하나를 꺼내 든다. 다시 한 번 본드를 분다.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나타난다. 온갖 장식이 달려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트리. 트리에는 지갑이라든지 옷이라든지 신형 핸드폰 따위가 걸려 있다. 소년은 함박웃음을 짓는다. 소년은 두 손을 뻗어 크리스마스트리를 잡으려 한다. 트리는 만져지지 않는다. 소년이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두르는 사이 트리에 달린 장식들이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소년은 본드를 하나 더 뜯는다. 커다란 테이블이 나타난다. 숲 속의 집에서 보았던 것처럼 커다란 테이블이다. 깨끗한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 위에는 온갖 음식이 차려져 있다. 거대한 칠면조가 놓여 있고 따뜻한 수프와 더운 채소들도 보인다.

소년은 군침을 흘리지만 쉽사리 그것들을 집지는 못한다. 또다시 사라질까 두려워 손을 만지작거리고만 있다. 그때 칠면조가 벌떡 일어나더니 소년의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칠면조의 갈라진 배 안으로 사과와 오렌지, 양파가 보인다. 칠면조는 스스로 자신의 다리 하나를 뜯어내 소년에게 권한다. 소년은 머뭇거리며 그것을 집어 든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년은 칠면조 다리를 덥석 문다. 칠면조의 몸통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데 비해 다리는 미지근하다. 살은 부드럽게 씹히지 않고 고무처럼 설겅거린다. 비리기까지 하다. 소년은 참으려 하지만 이상한 기분에 칠면조 다리를 입에서 떼어낸다.

입에서 무언가가 흐른다. 손등으로 그것을 닦아본다. 침일 거라 생각했던 그 액체는 붉은색을 띠고 있다. 소년은 손에 들린 칠면조 다리를 내려다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소년은 그것을 더듬어 본다. 칠면조 고기치고는 지나치게 매끄럽다. 소년은 조금 더 만져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비춰본다.

소년의 손에 들린 것은 여자의 팔이다. 소년은 그것을 떨어트린다. 잇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다. 붉은 피가 흘러 바닥으로 떨어진다. 소년은 침을 뱉는다. 뱉어도 쇠 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손가락으로 입안을 양치질 한다. 무언가가 씹히는 것 같다. 소년은 여자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고 하지만 엘리베이터 안은 좁다. 길게 누운 여자는 엘리베이터를 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소년은 핸드폰 폴더를 닫는다. 빛이 사라지자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 어둠은 여자의 모습을 가려주지만 피 냄새는 어떻게 해주지 못한다. 소년의 입에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가득 고인다.

소년은 주위를 더듬어 본드를 짚는다. 본드는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소년은 모두 가방에 짜 넣는다. 코를 박고 간절히 숨을 쉰다. 본드가 폐뿐만 아니라 온몸을 가득 채울 수 있도록 깊고 깊은 숨을 들이마신다.

소년은 토끼를 따라 들어온 구멍 속으로 돌아와 있다. 노을 때문에 하늘이 붉게 젖어 있다. 수풀 너머로 토끼 귀가 삐죽 튀어나와 있다. 소년은 토끼의 귀를 낚아챈다. 토끼는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고 시계도 들고 있지 않다. 평범한 토끼가 빨간 눈으로 소년을 올려다보고 있다. 소년이 토끼를 놓아주자 네 발로 도망을 간다.

소년은 배가 고파 근처에 있는 나무를 찾는다. 호박이 달린 나무를 찾아보지만 나무에는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다. 대신 아래에 호박밭이 생겨나 있다. 주먹만 한 호박을 딴다. 호박은 딱딱하고 따뜻하고 물컹하다. 소년의 손에 들린 것은 호박이 아니라 거북이다. 거북이가 한가득 밭을 차지하고 있다. 거북이의 머리와 꽁무니는 검게 그을려 있고 고기 탄내가 진동을 한다.

소년은 거북이를 내던진다. 오 그대여, 목이 메어 너를 불러봐도.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소년은 그 노래를 따라간다. 소년은 체스판과 조우한다. 하얗고 검어야 할 체스 판에 붉은 얼룩이 생겨 있다. 누워 있는 체스 말들을 본다. 체스 말들의 머리 안은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지 않다. 붉은 얼룩은 체스 말의 머릿속에서 새어나오고 있다.

소년은 도망간다. 숲으로 들어간다. 햇빛이 소년을 따라오고 있다.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다. 소년은 냇가를 지나쳐 숲 속의 집을 향해 달려간다. 거기에는 그가 알고 있는 얼굴들이 있을 것이다. 친구가 있을 것이다. 집에 도착하지만 소년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안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다. 여자아이의 비명이 숲을 울리고 있다. 울부짖으며 거부하고 있다. 소년은 저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저 비명이 저런 목소리였나, 저런 울음이었나 싶다. 그전에 들었던 목소리는 단순한 소음일 뿐이었다. 접시가 깨질 때 내는 것 같은 소리였다. 소년은 그 비명을 이겨내지 못한다. 비명으로 만들어진 대바늘이 귀를 통해 들어와 머리를 들쑤시는 것 같다. 소년은 땅바닥에 머리를 박는다. 귀를 틀어막는다. 입안에서 피 맛이 난다. 여자의 식감이 떠오르고 거북이를 쥐었을 때 느껴지던 감촉이 아직도 남아 있다.

소년의 손에 무언가가 있다. 물컹하다. 소년은 피 냄새를 맡는다. 손에 피가 묻는다. 그는 여자 앞에 누워 있다. 여자의 팔을 쥐고 있다. 소년은 그것에서 도망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엘리베이터의 문은 단단히 잠겨 있다. 차라리 환상 속이 낫겠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곳에는 거북이와 흐르는 뇌수와 비명이 있긴 하지만 도망칠 공간은 있다. 그는 가방 안에 머리를 들이민다.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머리를 집어넣는다. 그러나 아무리 숨을 쉬어도 그는 여전히 엘리베이터 안이다.

소년의 머리카락과 뺨이 본드 범벅이 된다. 소년은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미친 듯이 누른다. 거기 누구 없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엘리베이터 문을 두드린다. 대답은 없다. 그 누구도 소년의 호출을 받지 않는다. 소년은 침착하려 애쓰며 여자를 돌아본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가 보인다. 날것의 냄새와 맛이 되풀이된다. 바닥에 거북이들이 잔뜩 깔려 있다. 그가 바닥을 짚거나 밟을 때마다 딸꾹질을 하듯 거북이들의 단말마가 튀어 오른다. 비린내와 탄내가 여기저기서 진동을 한다. 그는 다시 문에 매달리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소년은 엘리베이터 구석으로 기어들어간다. 핸드폰을 연다. 작은 액정 화면은 소년의 발치밖에 밝혀주지 못한다. 전화를 걸어보지만 걸리지 않는다. 여기저기에 문자를 보낸다. 소년은 액정을 본다. 거기에 날짜가 적혀 있다. 액정화면에 찍힌 날짜는 1년 뒤를 가리키고 있다. 다시 보니 10년이, 100년이, 한 번 보는 것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있다. 소년은 이곳에서 영원을 보내게 될 것만 같아 두렵다. 소년은 자신의 숨소리를 듣는다. 과한 호흡이 엘리베이터를 가득 채운다.

소년은 여자의 팔을 물었을 때를 떠올린다. 그 팔에는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혹시 여자가 살아 있지 않을까, 기절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여자의 몸을 흔들어 본다. 여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소년은 여자의 가슴에 귀를 대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소년은 조명으로 여자의 얼굴을 비춰본다. 그녀의 얼굴은 핏기 없이 가라앉아 있다. 머리카락 사이에서 흘러나온 피가 여자의 얼굴을 적시고 있다.

소년은 여자를 계속해서 부른다. 그녀의 몸을 흔들어 본다. 그녀의 팔다리를 주물러보기도 하고 인공호흡을 해보기도 한다. 소년은 여자를 깨우려고 하다가 호출 버튼을 누르기도 하는 등 정신이 없다.

그는 이제 여자의 위로 쓰러져 울기 시작한다. 긴 울음이 엘리베이터를 왕왕 울린다. 그녀 없이는 안돼요. 차라리 나를 데려가요. 그는 노래의 뒷부분을 모른다. 소년은 몇 소절만을 되풀이해서 부른다. 여자가 일어나 후렴구를 받아 불러주길 바란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가 덜컹거린다. 소년은 고개를 든다. 밖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안에 누구 있느냐고 묻고 있다. 소년은 소리친다. 내가, 여자가 여기에 있다고. 그의 구조요청을 들은 사람들이 점점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소리를 통해 보인다.

출산이 임박한 자궁처럼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빛이 들어온다. 소년은 여자를 안은 채 함박웃음을 짓는다. 빛이 닿자 바닥에 있던 거북이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피비린내도 이젠 없다. 엘리베이터 문밖에는 경비원과 수리공으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풍기는 본드 냄새에 얼굴을 찌푸린다. 피에 범벅이 된 여자의 얼굴을 본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소년의 소지품과 소년의 얼굴을 본다. 소년은 눈앞에 펼쳐진 빛의 세계에 기뻐하고 있다. 경비원이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소년은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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