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식 교수

본격적인 대학 입시 시즌의 다른 한 켠에 대학입학 자체를 거부하거나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는 사례가 심심찮게 들린다.

하나는 ‘아수나로’라는 청소년 인권단체가 주도하는 대학입시거부선언 및 대학거부선언이다.
이들은 우리의 대학서열체제와 입시경쟁에 대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대학교육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환기하고자 한다. 예상할 수 있듯이, 이 단체는 거대담론을 표방하고 있으면서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특정 학생의 대학거부라는 ‘아방가르드적 퍼포먼스’도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사례는 2010년 고려대 경영대에 재학 중이던 김예슬 학생의 ‘대학자퇴선언’이다. 이 학생은 자퇴의 사유를 대자보로 밝힘으로써 당시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자퇴의 변(辯)’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25세 대학생이 가지는 ‘실존적 고민’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25년 동안 경주마처럼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하여 왔지만 희망을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경주마가 뛰는 트랙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 currere가 바로 교육과정이 아니던가? 학생은 25년간 초ㆍ중ㆍ고등교육 전체의 무의미성을 확인하고 “삶의 목적인 삶 그 자체를 지금 바로 살기 위해 ... 탈주하고 저항”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은 ‘사회적 문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특히 그가 지적하는 ‘국가주의 의무교육’의 문제점과 자본에 예속되어 버린 현대 대학교육에 대한 비판은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이미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사회학자 왈러스틴(E. Wallerstein)은 1970년대 이후 각종 국가정책과제를 매개로 (미국의) 대학이 자본에 예속되는 경향을 비판하면서, 전통적인 학문들이 사회과학화되는 현상을 그 결과로 지적하였다.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었다고 비판하는 학생의 주장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위에 든 두 사례는 충분히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대학 졸업 후 불투명한 미래전망을 이유로, 혹은 비싼 등록금을 감당하지 못하여 대학을 스스로 떠나는 학생들이 늘고 있음에도 주목해야 한다.
물론 그 이유가 ‘과잉교육’의 징후를 보이고 있는 우리 대학의 현황 때문이기도 하고, 현재 자본주의의 만성적인 취업난과 같은 구조에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대학교육이 추구하는 교육목표 및 인간상에는 문제가 없는가?
세네트(R. Sennet)는 저서 ‘성격의 침식’에서 근대 자본주의 인간상으로서 “유연한 인간(flexible man)”을 제시한다.
여기서 유연성이란 창의성과 같은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의 “단기적 왕국”에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래서 생애 내 지속되는 인성이 사라진 바람에 이제 현대인의 성격은 끊임없이 ‘침식’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경향의 인간상에 봉사하는 대학교육은 행복한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
평생학습사회에서 대학은 노동시장에서 요구하는 제반 기능을 재교육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 삶 전체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이제 대학을 둘러싼 구조적 환경에 대학 스스로 적극 대항하여 대학교육 자체에 대해 점검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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