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직관적 행위가 인식과 행동을 낳는다”

▲히말라야 산간의 다르쵸
다시 해가 바뀌니 새해가 됐다. 시간에 신구(新舊)가 없을 것이니, 단지 스스로가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것이리라. 옛 것과 새 것이 본디 다르지 않고, 성인과 범부가 태생이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무엇을 어떻게 바라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본다는 직관적 행위를 통해 인식이 생기고 그로부터 행동을 낳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는가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진다.
역설적이지만 인도에는 철학과 역사가 없다. 인간은 영겁을 살아가기에 찰나 속에 변해가는 역사의 과정이란 무의미하다고 보았고, 이론으로 삶의 지혜를 논하는 것이 무용하다고 했다. 말로 선(善)을 이야기한다고 선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도의 현자(賢者)들은 철학과 종교, 역사관을 아울러 다르샤나(Dharshanam, 觀)라 표현했다. 무엇인가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열반경(涅槃經)에서 부처님을 일러 ‘세상의 눈’이라 표현하였다. 그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세상의 눈이 사라졌다”고 슬퍼했다. 눈이 사라졌으니 빛도 사라진다. 세상은 캄캄한 어둠에 싸이게 된 것이다. 세상의 눈은 사라졌지만 개개인의 눈은 살아있다. 적어도 진리를 향해 눈을 뜨고 있다면 언젠간 마음 또한 밝아질 것이다.

인간의 감각 중에 시각을 으뜸으로 삼고 있다. 오감 중에서 시각은 나머지 네 가지 감각이 합친 것과 맞먹는다고 이른다. 그러니 보지 못한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지각을 잃었다는 뜻이다.
근본불교의 수행법 중 관법(灌法, Vipassana)은 감각을 통해 사물을 정확히 보고 느끼고 알기를 강조하였다. 모든 것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면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어온 것이 더러는 거짓임을 깨닫게 된다. 자의식, 고통, 분노, 우리를 억압하는 한계들이 사실은 실재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바로 보는 것(正見)이 모든 행동의 기본임을 일깨운다.

우리 눈은 앞을 향해 열려있어, 안을 보지 못하고 뒤돌아보지 못한다. 더구나 시력의 한계는 멀리 볼 수 없게 한다. 제 모습은 아예 볼 수조차 없다. 그러니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지만 실상은 자신을 보지 못하고, 살아 온 시간을 뒤돌아보지 못하며, 살아갈 길을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계기가 있어야 비로소 눈을 부릅떠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땐 여지없이 고통스럽다.
도시의 안락과 편리 속에 살아가면서 사람들의 시력은 점점 나빠져 간다. 멀리 있는 것은 형체조차 구분해내지 못하게 됐다. 대초원에서 살아가는 몽골의 족속들은 아직도 십리 밖 지평선 즈음에 서 있는 양떼를 구분해낸다. 멀리 보지 못하면 자신의 것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멀리 볼일이 없으니 결국 멀리 볼 수 없게 됐다. 육체적 시력 뿐 아니라 하루하루 코앞에 매달린 일만을 보며 살아간다.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향해 눈길 돌릴 틈마저 잃어버렸다. 목숨은 숨 막히는 찰나를 버텨갈 뿐이다.

누구나 자신이 보는 것이 옳으며 모든 것을 잘 보고 있다고 믿는다. 눈앞에 것은 분명히 다 보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최근 심리학의 연구결과는 그것이 착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들은 대부분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 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본 것 또한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며, 보지 못한 것도 보았다는 기억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충격적이지만 제대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 수 있다. 욕망과 명분, 선입견, 살아온 습관 따위가 우리의 직관(直觀)을 방해한다.
어떻게 지각의 장애로부터 놓여나 바르게 볼 수 있을까. 마음을 닦는 오랜 방식은 일단 멈추라고 권하고 있다. 마음을 움직이는 복잡한 생각과 바라는 것들과 사로잡힌 관념을 일단 세워두고 더 이상 고장 난 태엽을 감지 말라는 것이다. 멈추는 것(止, Samatha)은 흩어진 생각을 고요하게 만드는 첫 번째 계단이다. 엉클어진 실타래는 풀면 풀수록 꼬이니 가만히 놓아두거나 맺힌 곳을 끊어버려야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다. 마음이 멈추어야 비로소 세상을 고요히 돌아볼 수가 있는 것이다. 흙탕물 속에서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으니, 진흙탕이 가라앉을 때까지 고요히 기다려 숨겨진 것들을 하나하나 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지켜보라고 했다.
히말라야 산간의 족속들은 새해가 되면 산을 오른다. 누군가 길을 잃을지도 모를 언덕 위 갈림길이나 세상을 두루 내다보는 산꼭대기에 이르러 오색 깃발을 세우고 바람을 향해 축원을 날린다. 그들이 들고 올라가 세우는 깃발은 다르쵸며, 룽따이다. 다르쵸란 오색 깃발에 세상의 행복을 비는 기도문을 적어둔 것이다. 더러는 지혜의 가르침도 적었다. 새날 새아침에 그들은 세상을 향해 평안과 행복을 기원한다. 바람은 그 깃발들을 쓰다듬고 읽으며 행복의 축원문을 멀리까지 전해줄 것이다. 바람이 닿는 영토까지 사람들의 선의와 지혜를 실어간다. 늘상 잊고 살더라도, 더러는 악행을 저지르더라도 새날에는 마음속에 선의를 잊지 않고 일으킨다. 거칠고 어두운 삶의 역정에서 새해 첫날 마음의 눈을 뜬 그 순간의 바람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원하는 것이다.

태양력의 새해는 동지(冬至)가 지난 지 일주일 남짓 후에 시작된다. 긴 밤이 비로소 짧아지고 하루하루 빛의 길이가 늘어나는 시절이다. 겨울은 아직 매서운 바람으로 다가오고 있지만, 봄은 이미 시작되었다. 얼음 속에도, 말라붙은 대지에도 해가 비추는 시간은 한뼘한뼘 늘어가고 있다.
날과 때가 달리 경계가 없어도 굳이 새날을 잡아 마음을 다잡는 것은 그로 인하여 낡은 것을 결별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의 다짐 때문이다. 새날이 필요한 것보다 새 결심이 유용할 것이다. 시간이 우리를 새롭게 할 수는 없지만 자각은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를 일러 “새로운 것은 없으며 다만 새롭게 바라보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정신의 행로라 했다. 낡은 것일지라도 새롭게 봄으로써 새로워질 수 있다.
새해에는 매일이 첫날처럼, 하루가 마지막 날처럼 세상을 바라보길 바란다. 그리하여 찰나(刹那)를 영겁(永劫)처럼, 영겁을 찰나와 같이 지나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다큐멘터리 PD,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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