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세계인 혜초스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⑨ 투르판, 쿠차, 탁실라, 간다라

우리는 둔황에서 기차를 타고 또 하루 동안 내리 달렸다.
투르판에 도착하니 우릴 반기는 건 고요한 모래바람과 정적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고사리같은 아이들의 두 손과 말똥말똥한 눈동자가 원정대를 반긴다.
아이들은 구걸하다시피 물건을 팔고 있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그렇다. 지금 이곳은 그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관광용품점으로 즐비하다. 혜초스님 당시에는 아마 이곳은 부유했으리라. 둔황은 문화재로 먹고산다지만 투르판은 그마저도 불가능할 정도로 문화재 약탈의 정도가 심하다. 게다가 말을 타고 고성을 둘러보는데 뼈밖에 남지 않은 말이 잘 걷지도 못한다. 정말이지 내려서 걷고 싶을 정도로 말에게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계속되는 약탈의 현장
투르판에서 약 45km를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 서유기의 무대 화염산이 나온다. 그 명성답게 창밖으로 보이는 화염산은 엄청난 열기로 벌겋게 보인다. 천불동은 바로 이 화염산 계곡에 위치한다. 버스에서 내리니 지열온도가 무려 50도. 서유기의 현장에 있다는 설렘도 잠시 땀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천불동은 스님들이 살던 곳으로 불상이 모조리 파괴되어 완전히 남아 있는 불상과 벽화가 없다. 가이드는 여기 있는 유물들은 모조리 프랑스, 영국, 러시아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또 석굴이 파괴된 이유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스타인, 펠리오, 르코크와 같은 탐험대에 의해서고, 둘째는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해서란다. 마지막으로 이슬람 세력도 한몫을 차지했는데 특히 이슬람은 불상의 얼굴이 귀신을 불러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얼굴만 다 파갔다고. 한 예로 일본인은 기술이 가장 좋아 수십 개의 금을 그은 후 칼로 줄을 긋고 활줄을 걸어 양쪽에서 떼어내는 수법으로 아주 얇게 불화를 떼어갔다고 한다.
석굴에서 나오니 한 위구르인이 부타(뱀가죽으로 만든 전통악기로 기타처럼 생겼다)를 연주하고 있다. 악사의 이름은 위수프 아이티. 1943년생인 그는 10여년을 이곳에서 연주했다며 주민등록증을 내보였다. 그날 그는 우리에게 만년설에서 내려온 손님이라는 의미의 위구르 민족음악 ‘12무카모’를 들려줬다. 너무나 경쾌한 음색이었지만 구슬프게 들리는 건 왜일까. 그의 음악에 실크로드의 아픔이 서려서일까. 문화재는 오간데없고 구슬픈 소리만 화염산을 감싸고돈다.

키질석굴과 한락연
7월 12일. 사막을 벗어나니 붉은 산들이 펼쳐지고 우리는 키질석굴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구마라집의 청동상이다. 도착한 키질석굴도 천불동과 마찬가지로 거의 훼손됐다. 그리고 10번 굴. 훼손된 키질을 복원하고자한 한락연의 글귀와 초상화를 볼 수 있었다. 한락연은 평생을 키질, 둔황 석굴 모사에 매달렸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모사에 평생을 매달렸을까. 새겨진 글귀는 그의 애정을 고스란히 나타낸다.
“애석하게도 대부분 벽화는 외국의 고고학자들이 떼어갔다. 이것은 문화상의 커다란 손실이다…(중략) 고대 문화를 발견하고 빛내기 위해 참관자 여러분은 특히 사랑하고 보호해주기 바란다.”
다음으로 우리는 버스를 타고 키질가하 석굴로 이동했다. 찾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더 이상 차로 들어갈 수 없는 도로 상태여서 내려서 이동하기까지 했다. 지금 한창 공사중인 이곳은 아직 연구된 바 없는 미공개 상태로 인적이 매우 드물었다.
옛 실크로드의 명성을 기대하고 온 나로서는 이 상황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혜초스님이 이 길을 지났을 당시 아마도 실크로드는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상인들이 서로의 문화를 교류한 덕분에 실크로드는 문화가 꽃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도착한 실크로드의 화려한 옛 명성은 찾을 수 없다. 이 가슴 아픔은 직접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백선아 기자 amy@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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