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떨치고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가자”

추운 계절이 다가온다. 산은 탈색한 황량함으로 변했고, 거리는 냉기로 덮여간다. 초겨울 사색의 아름다움을 느껴볼 틈새 없이 마음은 걱정을 가득 짊어지고 있다. 날이 추워지면 몸 보다 마음이 더 얼어붙는다.

수십 년 전 어느 날, 이때쯤의 강의실에서 있던 일을 떠올렸다. 대학 4학년을 거의 마쳐갈 무렵, 정년을 앞둔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셨다. 선생님께도 학생들에게도 긴 시간을 마쳐야할 수업이었다. 선생님은 잠시 학생들을 둘러보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셨다. 나뭇잎들이 제멋대로 바람에 날라 가고, 잔디는 누렇게 빛을 바래 황량하고 또 황량한 풍경이었다. 십여 분을 말이 없던 선생님의 눈길을 따라 학생들은 모두 정적(靜寂) 속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문득 선생님께서 입을 여셨다. “무상(無常)하지 않은가?” 갑작스런 말씀에 모두 말을 잊었지만, 그 절절함이 마음에 박혔다.
“4년 전 여러분은 봄날의 햇살을 맞으며 배움을 위해 저 언덕길을 올랐을 것이다. 그 때의 그 마음, 그 때의 그 모습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선생님은 그 질문을 남기시고 수업을 마치셨다. 아마도 선생님께 받은 대학시절의 마지막 수업이었을 것이다.

해가 기울어 가고 한해 살림을 돌아볼 때마다 그 수업을 떠올린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늘 잘살아야지 다짐하지만 지나친 시간은 언제나 초라했다. 마음은 늘 아쉬움 속을 살아간다. 일생이 그러해왔다. 그러나 분주한 시간도 무상하고, 아쉬움과 두려움 또한 무상하다.

대학은 지금 가장 번잡할 시간이다. 한편에서는 신입생을 뽑을 준비로 바쁘고, 한쪽에서는 졸업 후 살아갈 일을 위해 취업과 진로를 위해 바쁠 것이다. 특히 대학의 마지막 시간을 남겨둔 이들에게 초겨울의 냉기는 뼈를 얼리고 마음을 도려낼 수도 있다. 세상은 점점 먹고 살아가기가 힘들어진 전쟁터가 되어가고 있어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정말 세상은 먹고살아갈 길이 없어지고, 경제는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으며, 취직은 하염없이 힘든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평생을 근근이 살아왔지만 수십 년을 돌아보아도 늘 그런 걱정과 한탄이 세상에 가득했었다. 망하기로 치자면 우리는 진즉 굶어 죽었어야했다. 경제는 이미 끝장나고 일자리는 하나도 없어야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되지 않았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자.

역사적으로 보면 거의 모든 독재자들과 경제적 사기꾼들은 공포를 통해 대중을 기만해왔다. 히틀러는 국가 경제가 파멸할 것이라고 겁박하며 대중의 지지를 강탈했다. 어떤 주장은 노동자들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면 국가가 망한단다. 종교적 기만자들은 세상이 종말에 이를 것이라 협박해왔다. 그리하여 자신의 성전에 재물을 쌓아 바친 이들만 살아남는다고 주장한다. 그것도 자기들끼리만. 수천 년을 두고 거듭되어 온 기만과 협박과 두려움의 통치술은 아직도 힘을 잃지 않았다.

먹고살기가 어려워질 것이라 겁을 주며 국민의 민주주의적 주권, 노동자의 법적인 지위, 학생의 당연한 권리, 소비자의 합당한 권한까지 제약해왔다. 심지어는 국가 간의 조약마저 국민의 소리에 귀를 막은 채 권력의 힘을 앞세워 추진해버린다. 이 모든 것의 명분은 경제이다.
비경제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지금의 경제정책은 낙제점이다. 정책의 모든 명분을 경제에서 찾고 있지만 젊은이가 취업을 걱정해야하는 현실이다. 한마디로 이제껏 진행한 경제논리와 시스템이 엉터리란 반증이다. 자본주의적 경제 정의도 실종한지 오래이다.

좀 더 근원적으로 살펴보면 노련한 주인은 노예와 일꾼에게 절대 배불리 먹이지 않는 법이다. 일꾼이 배부르면 말을 듣지 않는다.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먹여주면, 아사의 두려움 때문에 굴종한다는 것이 사악한 진실이다. 노동자와 국민이 배부르면 권력자와 재벌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것이 두려움을 통해 현실을 지배하는 메커니즘이다.
인간의 이기적 행동동기 중 탐욕은 악(惡)의 정점에 서있다. 현대 인문학적 관점에서 ‘사악(邪惡)함’과 ‘악’의 정체를 탐구한 이 중 하나는 미국 메릴랜드 대학 정치학과의 찰스 앨퍼드(Charles F. Alford) 교수이다. 전공과는 달리 인간의 악행에 대한 본질적 탐구를 위해 그는 미국교도소에 수용된 범죄자 수십 명을 인터뷰했다. 주로 연쇄살인, 존속 살해 등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 보고서를 담은 저서 ‘인간은 왜 악에 굴복 하는가 (What Evil Means to Us, 1997)’에서 악에 대한 결론을 한마디로 규정했다. “자신에게 닥칠 일의 두려움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행위”가 악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치 권력자, 탐욕에 빠진 경제인, 거짓으로 허명을 쌓은 학자 따위는 끊임없이 상실과 박탈, 결핍과 소멸, 무지와 빈곤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권력자가 사적 이익을 위해 정책적 결정을 악용하고, 경제인이 공동체의 이익을 파괴하며 자신의 부를 쌓는 일, 학자가 실험과 이론을 조작하며 스스로의 명성을 탐닉하는 일 모두 악행의 정점에 서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밖으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체는 끊임없는 두려움에 빠진 초라한 군상들이다. 그러니 젊은이들은 그들을 두려워말고, 그들이 세운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한다.

대승불교의 신앙대상 중 두드러지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Avalokitesvara)은 무지(無知)와 세상의 고난은 두려움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니 두려움을 떨쳐버리라 말하고 있다. 지혜의 핵심을 가르치는 반야심경(般若心經)에는 두려움이 없어야(無有恐怖), 모든 잘못된 생각을 떨칠 수 있다(遠離顚倒夢想)고 이야기한다. 두려움이란 닥치지 않은 허상일 뿐이다.
이제 막 세상으로 나설 젊은이들이 기억할 것은 자신의 나약함과 나태함 외에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는 사실이다. 길이 없다 느껴져도 두려움을 가라앉히면 세상은 살아갈 길을 열어준다.
변화의 시기에 스스로의 용기를 자각하자. 세상 어느 것 하나 변치 않는 것은 없으니, 자신으로부터 두려움 없는 미래를 만들어가자.

다큐멘터리 PD,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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