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프로야구의 늦깎이 샛별, 배영섭(체교 09졸) 동문

삼성 라이온즈의 1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면 상대 투수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게 된다. 선구안도 좋고 어느 공에도 큰 약점이 없는 선수를 만나기 때문이다. 발도 빠른데다  수비에서는 몸을 아끼지 않으며 호수비를 보여주는 이 선수가 바로 배영섭 선수다.

유니폼 입고 싶어 시작한 야구
“어렸을 땐 축구를 자주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흙먼지가 묻어 있는 야구 유니폼이 멋있어 보였어요.” 배영섭 선수가 처음 야구를 시작할 때 어머니는 반대했다고 한다. “위로 누나만 두 명있고, 제가 막내라 다칠까봐 걱정하신거죠.”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듯, 어린 소년의 간절한 바람은 곧 이루어졌다. 동시에 배 선수의 어머니는 열정적인 지원자가 되었다.

“유신고등학교 야구부 시절, 생각대로 야구가 잘 안 되고 슬럼프도 길어서 야구를 그만두려 했어요.” 십대의 모든 것을 바친 야구였지만 고등학생 배영섭은 힘에 겨웠다.  “하지만 그때 엇나간 저를 곁에서 바로 잡아주신 분이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대학 입학으로 배 선수의 제2의 야구인생이 시작됐다.

우리대학에 입학한 첫 해부터 배 선수는 주전 1번 타자로 배치됐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2007년 대만에서 열린 대륙간컵 야구대회에 발탁되어 준수한 활약을 보였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예비 엔트리에 포함되기도 했다.
배영섭 선수를 1학년 때부터 직접 지켜본 우리대학 야구부 최건용 코치는 “영섭이는 말수가 적고 항상 진지하게 훈련에 임하며 자기 관리가 철저했다. 바깥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쉬는 날에도 연습을 많이 하는 선수”라고 기억했다. 그 덕분인지 배 선수는 재학 기간 중 우승 두 번과 준우승 한 번을 경험할 수 있었다.

배 선수는 “엠티를 갔던 것”이 대학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이라고 답했다. 중ㆍ고등학교의 합숙생활과는 달리 성인이 되어 주어진 ‘자유’를 즐기며 연습했던 대학생활이 아직도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배영섭 선수에게는 대학 시절부터 별명이 있다. 바로 ‘배치로’이다. 배영섭 + 이치로(시애틀 매리너스)로 두 선수의 체구와 플레이 성향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배 선수 본인도 롤(role) 모델로 이치로를 꼽는다. 야구팬들은 배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면 “배치로, 배치로” 환호하며 안타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런 별명에 대해 “이치로 선수는 따라잡고 싶은 선수이지만 아직은 실력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부담스럽다”라고 밝혔다.

“처음 제 응원가가 나왔을 때는 신기하고 놀라웠어요. 야구를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죠. 팬 분들이 경기장에 많이 오셔서 응원해주실 때 가장 힘이 납니다.”

순탄치 않았던 프로무대 생활
우리대학을 졸업한 뒤 배영섭 선수는 2009년도 2차 4라운드 28순위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중요하지만 배 선수의 프로 입문 길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대학 선수일 때는 ‘잘 치고 잘 달리는 선수’였지만 부상의 늪은 생각보다 깊었다. 어깨 수술 때문에 첫 시즌을 재활로 보내고 다음 해도 거의 2군에서 보냈다. 당시 심정을 배 선수는 한 마디로 “프로는 오직 실력만으로 평가받는 냉정한 곳”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KIA 윤석민 투수의 공이 가장 까다롭다”라는 배 선수는 2군에서 머무는 기간 중‘언젠가는 1군 투수의 공을 받아칠 것’이라 다짐했다고 한다. 그의 다짐은 노력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2군에서 3할 타율을 유지하며 2010년 9월 처음 1군 무대에 데뷔했다.
“당시 처음 1군 무대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는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하지만 빨리 정신 차리고 내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못 하면 다시 내려가잖아요.”

첫 번째 데뷔 경기에서 대주자로 나와 도루와 득점에 성공한 배 선수는 前 삼성 선동열 감독(現 KIA 감독)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이후의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인 배 선수는 2010년 시즌이 마무리될 때까지 계속 1군에 머물렀다.

올 시즌 삼성의 1번 타자로 줄곧 활약하며 2할 9푼 4리에 도루 33개를 기록한 배 선수는 시즌 중반만 해도 ‘늦깎이 신인왕’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하지만 7월과 9월 왼손에 부상을 당하면서 그의 꿈은 멀어져 가는 듯 했다. 특히 9월에 당한 왼쪽 손등 뼈가 골절되는 부상이어서 잔여 경기를 치르지 못한 채 시즌을 끝내버렸다.
“맞는 순간 아차 싶었어요. 그래도 잠시 쉬면 복귀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밤 병원 검사 결과가 ‘시즌 아웃’이었어요. 막막했죠. 허탈하고. 2군에서 죽어라 훈련하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다행히도 구단측은 배 선수를 위해 일본에서 그가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배영섭 선수는 ‘한국 시리즈에서 다시 뛰겠다’는 일념으로 재활에 전념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그는 ‘한국 시리즈’ 엔트리에 들었다.

2011년 한국시리즈 2차전.
배영섭 선수는 결국 일을 내버렸다. 0-0으로 팽팽한 접전을 벌이던 6회 말, 2타점 적시타를 때리며 상대 팀의 추격 의지를 한 풀 꺾어 놓은 것이다. “단지 출루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치는 순간 몸이 짜릿했죠.” 공교롭게도 우리대학 야구부 선배이자 근래 가장 주목받던 SK 좌완 투수 박희수(체교 06졸)동문을 상대로 한 안타였다.
결국 챔피언 자리는 배영섭 선수가 속한 삼성 라이온스에게 돌아갔다. 배영섭 선수는 최우수신인상 기자단 투표에서 91표 가운데 65표를 얻어 다른 후보 임찬규(LG)를 제치고 신인왕의 영예를 누렸다.

작은 소망은 ‘부상없이 풀타임 출장’
‘중고 신인’ 배영섭의 탄생은 본인의 영광뿐 아니라 2군 선수들의 희망이 되었다.
우리대학 야구부 주장 김동영(체교3) 선수가 “이제 4학년이 되는데 고학년 선수로서의 자세와 프로에서 잘 적응하는 방법이 궁금하다”고 묻자 돌아온 답은 “그저 연습뿐”이었다. “저도 저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가장 최대의 적은 자기 자신이죠. 4학년이라고 부담가지지 말고 조급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연습과 경기에 온 힘을 다한다면 결과는 저절로 따라올 겁니다.”
올해 우리대학 야구부는 우승과 준우승을 한 번씩 하며 배 선수의 활약만큼 빛이 났다.
배 동문은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 “이제 시작인데 야구인생의 최종 목표는 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년에는 부상없이 풀타임 출장해 팀을 좋은 성적으로 이끄는 것이 작은 소망”이라고 밝혔다.
부상에도 굴하지 않는 ‘늦깎이 신인왕’ 배영섭 선수는 부단한 노력으로 자신을 증명했다. 그의 근성과 의지, 발전 모습은 한국 야구사에 또 다른 홈런으로 남을 것이다.

이준석 수습기자 stone@dongguk.edu

이름 - 배영섭 / 생년월일 - 86.6.27
키 - 180cm, 몸무게 - 79kg
포지션 - 외야수 / 출신고교 - 유신고
프로데뷔 - 2009년 01월
수상경력 - 2011 롯데카드 프로야구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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