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민 영화평론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크레인에 올라섰던 김진숙씨가 드디어 다시 땅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무려 309일 만에 땅을 밟았다. 장기간 고공농성으로 심신의 피로를 호소하며 병원으로 후송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5시간에 걸친 경찰 조사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경찰, 참, 빠르다. 빠르지 않아도 되는 일만 골라서 빠르게 움직이는게 문제지만. 어쨌든, 나는 크레인에서 내려오던, 마지막 계단에서 팔짝 뛰어내리며 마냥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뜬금없이 ‘언감생심’이라는 한자어를 떠올렸다. 어찌 언(焉), 감히 감(敢), 날 생(生), 마음 심(心). ‘어찌 감히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겠느냐’, 라는 뜻이다. 비슷한 한자어로는 감불생심(敢不生心)이 있다. ‘힘이 부치어 감(敢)히 마음도 먹지 못한다’ 라는 뜻으로, 간단히 말해, 어차피 안 될 테니 꿈도 꾸지 마,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김진숙씨가 309일 동안 싸웠던 대상은 한진중공업의 경영진만이 아니라, ‘언감생심’이라는 시대의 무력감과 무관심이기도 했을 것이다.
한진중공업 사태가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지만, 그들 대부분이 언감생심을 속삭이며 지레 포기했던 일에 그녀는 자신의 몸을 던졌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지지하며 부산으로 내달렸던 희망버스는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녀가 크레인에서 309일을 머물며 구체적으로 어떤 성과를 이끌어냈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비겁을 합리화하기 바쁜 무력감의 시대를 온몸으로 거부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으니까 말이다.
마치 포스트잇처럼 떼어낼 때 아프지 않을 만큼의 신념으로 달라붙는 것이 아니라, 비록 살점이 떨어져 나가 상처가 남더라도 자신의 신념에 질기게 매달리는, 행위의 숭고함. ‘언간생심과 포스트잇.’ 어쩌면 이들은 다치지 않기 위해 미리 설정해놓은 비겁의 방패였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싸움을 포기하거나, 싸우더라도 상처받지 않을 만큼만 싸우기. 또는 눈앞에 벌어진 싸움을 애써 외면하기. 결국에는 나만은 다치지 않기 위한 몸사리기.

이러한 무력과 비겁의 시대정신이 우리에게 스며들게 된 것은 MB정권의 실정이나 여야 정치인의 무능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이 어떻게 발생되었든 간에, 우리가 동조하고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인 이상, 우리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반가운 것은, 서울 시장 선거에서 나타났듯, 그 변화의 조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무시무시한 말 하나.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에 선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 ‘신곡’에서 단테가 한 말이다.
지옥 따위야 없을 수도 있겠으나, 분명한 것은 때로 정치적 중립이라는 말은 비겁과 무력함의 이명(異名)이거나 그에 대한 핑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 편향성이 필요한 시기, 그러니까, 우리는 모 아니면 도, 아니 빽도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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