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학생은 좋은 스승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맨큐 하버드대 교수
우리의 정신은 계속 성장하여야하고,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학생은 배우는 사람이다. 배움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극복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스승은 배움을 이끌어 뒤따르는 자들을 성장할 수 있게 돕는다. 스승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로부터 배움의 실마리가 시작되고 바른 삶의 자세를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유교적 도덕관은 국가와 스승, 부모를 동격으로 보았다. 국가는 인민을 행복하게 이끌어가며 공동선을 행사한다는 묵시적 동의가 있었다. 군왕은 하늘을 대신하여 세상을 통치하고, 부모는 생명을 주었으며, 스승은 배움을 통해 인격을 성장시키기에 그 은혜를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지금의 관점으로는 별로 공감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런 이념이 지배하던 시절에도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주장은 기득권 유지를 위한 방편에 불과했을 수 있다. 국가가 절대 선을 행하던 시절은 별로 없었고, 스승이 늘 진리의 지남(指南)도 되지 못했다. 부모가 자식을 팔아넘긴 냉혹한 일도 심심치 않았다.

요즘 세태를 들어 교권 추락을 염려하는 소리가 들린다. 스승에 대한 존경을 잃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지금은 구시대가 아니다. 스승이라 하여 무조건 우러러 받들어야한다는 주장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경험에 비추어 돌아보면 존경받을만한 스승이 존경받았다.
학식은 물론 인격까지 고개 숙이게 하는 스승들이 계셨다. 그런 분들께는 그야말로 그림자조차 밟지 못할 권위를 느낄 수 있었다. 살아가며 좋은 스승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한다면 불행한 일이다.
얼마 전 미국 하버드 대학 강의실에서 일어났던 학생들의 항의는 이 시대 학문과 스승의 좌표를 되새기게 한다. 2011년 11월 2일 하버드 대학 경제학 수업을 듣던 학생 70여명이 학보와 하버드 정치학 저널 등을 통해 교수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담당교수는 그레고리 맨큐(Gregory Mankiw). 그의 저서 ‘맨큐의 경제학’은 전 세계에서 경제학 입문의 주요 교재로 쓰이는 초베스트셀러이다. 국내 각 대학도 기초 경제학교재로 쓸 정도로 인기가 드높다.

공개서한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경제 이론의 기초학습을 통해 정부의 공공정책과 환경 등에 유용한 다양한 지적 활동과 지식을 얻기 위해 당신의 수업을 선택했다. 그러나 당신의 경제학적 관점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경제 불평등 문제와 비효율적인 경제시스템을 영속시키는 내용 밖에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업을 거부하고 교실에서 나간다”는 내용이다. 이어서 수업시간에 학생들은 조용히 교실에서 퇴장했다. 학생들은 대놓고 그의 학문이 금융위기와 국가경제의 파탄을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월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99퍼센트의 저항이 학교에까지 번진 것이다. 
맨큐 교수는 그동안 조지 부시 정권하에서 경제자문위원회 회장을 맡았을 뿐 아니라, 지금도 공화당 대선후보의 경제정책 자문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론과 동시에 국가 경제정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이다.

맨큐의 경제정책에 대한 조롱은 과거에도 있었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은 오바마 정권 출범을 앞두고 부시 수하의 경제정책자들을 향해 “돈만 주면 뭐든 하는 엉터리들이여 잘 가라”고 조롱했다. 맨큐는 꼭 집어 누군가를 적시하지 않은 그 말에 격렬히 반응했었다. 비난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정책조언자로써 맨큐의 주장은 주로 감세론(減稅論)과 복지축소 등으로 대표된다. 미국 경제의 앞날을 두고 그는 “그리스를 닮아간다”고 비판한 바 있었다. 부자들과 기업에 대한 감세 정책과 복지 축소의 주장은 오늘 우리사회에서도 흔하게 듣는 내용이다.
맨큐 교수는 학생들의 행동을 존중한다며 이런 행동을 오히려 학교가 직업훈련소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자위했다. 그의 수업을 듣는 학부학생들 중에 수업거부에 가담한 학생수는 약 10퍼센트. 적지 않은 학생들이 떨쳐 일어선 셈이다.

시장경제의 관점에서 보자면 학생들은 교수가 내어놓은 상품을 불량으로 판정하고 반품시킨 것이다. 최근의 경제활동 지침은 소비자는 자신의 소비행위가 미칠 경제적 이익 뿐 아니라 사회적 파급까지 고려하는 것이 현명한 소비라 가르치고 있다. 불량품을 파는 가게, 조악한 상품을 포장하여 속임수를 쓰는 상인,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고 속아 넘어가는 소비자. 이 모두가 시장을 파탄으로 이끄는 주역들이다.
돈만 주면 뭐든지 다해주는 학자와 지식인의 모습을 우리는 흔히 보아왔다. 일제에 부역한 자들이 그랬고, 독재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위해 재주와 학문을 판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과오를 뼈저리게 인정하지 않았다.
국립대학에서조차 과거 친일부역 교수를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하면 학계에서 매장하는 분위기였다. 한마디로 지성의 자살이다. 학문과 예술의 이름으로 민족을 배신하는 악행을 자행했어도 단죄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사회에서 정의란 개가 물어갈 남루한 명분에 불과한 것으로 추락했다. 그것이 우리 사회와 학계의 가장 큰 비극이다.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자신의 과오를 드러내 뼈저린 참회가 있다면 잘못이 성장의 발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잘못을 그릇된 것으로 보지 못하고, 덮어 감추고 허물조차 미화하기에 급급하다면 그곳은 미래가 사라진 불모의 땅이다.
학생은 스승의 뒷모습을 따라 성장한다. 모든 스승은 또한 가르치며 스스로를 정화하고 삶과 학문을 바로 세워나간다. 학생들의 살아있는 시선이 있다면 스승의 허물 또한 뼈아픈 교정의 교재가 될 것이다.

전통적 관점에서 보면 이상적인 스승이란 학식만으로 학생을 가르치지 않는다. 스승의 눈짓 하나가 작은 몸짓까지 따라 배우게 하는 삶의 표본이 된다. 좋은 스승은 많은 지식 보다 삶에 대한 바른 자세와 관점을 전해주는 이다. 좋은 학생이란 스승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올곧게 완성해가는 이다. 비록 이상에 그칠 수 있지만, 모든 학생은 좋은 스승을 택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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