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스님의 흔적을 찾아 야간열차를 타고 둔황으로

 

723년. 16살의 어린 혜초는 무명을 깨고 진리의 눈을 찾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머나먼 서역길을 떠났다.
그리고 약 천년이 지난 1908년 2월 25일. 둔황에 도착한 프랑스 학자 폴 펠리오는 먼지에 쌓인 고문서를 촛불에 비춰 웅크리고 보다 흥분에 휩싸인다. 한 권의 두루마기. 바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빛을 본 순간이었다.

혜초의 흔적을 따라 둔황으로
광활한 중국대륙의 마지막이자 서역의 길목에 위치한 오아시스의 도시 둔황. 혜초스님을 비롯한 수 많은 구법승은 이 도시를 통해 서역으로 향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둔황을 통해 실크로드를 오갔고 자연히 이 곳에는 불교문화가 쌓여 꽃을 싹 피웠다.
하지만 지금의 둔황은 황량하다는 표현이 딱 적격이다. 둔황에 도착하니 옛날의 부귀영화는 오고 간데없이 사라지고 50도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기온과 하얀 모래바람이 우리를 맞았다. 게다가 작열하는 태양과 끊임없이 구슬지어 흐르는 땀, 끊임없는 갈증이 원정대를 괴롭혔다.아무리 생각해도 이 무더운 사막을 걸은 혜초스님은 너무나도 대단하다.

‘종교예술이 아름다운 이유 세 가지’
많은 사람들은 불교미술을 전공하는 나에게 종교예술이 왜 아름다운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그 아름다움이 뭐냐고 묻는다. 둔황 막고굴이야 말로 종교예술의 미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장소다.
먼저, 종교예술은 불가능한 일도 가능케 한다. 불심이 없었더라면 이 황폐한 명사산에 어찌 수 많은 석굴을 조성할 수 있었겠는가. 한 예로 둔황 막고굴 중 96호 굴에는 무려 높이가 35.5m인 엄청난 높이의 대불이 있다. 불심이 아니고서야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둘째, 그 어떤 예술보다 화려하고 장엄하며 웅장하다. 아니 종교예술은 화려할 수밖에 없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심이 절로 우러나오게 하는 것도 종교예술의 큰 역할이기 때문이다. 당시 둔황석굴은 홍색, 청색, 황색, 녹색 등 순광물색으로 벽화를 아름답게 채색해 그 화려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 벽화의 보살은 수많은 영락(지금의 목걸이와 같은 장신구를 뜻함)을 걸쳐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종교예술에는 스토리가 있다. 불교에는 부처님의 본생담인 자타카, 석가모니의 일생을 담은 팔상도, 또 사후에 대한 두려움과 권선징악을 일깨워주는 지옥도등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중생들에게 끊임없이 깨달음을 주고자 한 것이다. 우리가 갔던 158호 굴은 석가모니의 열반장면을 담고 있다. 거대한 와상을 뒤로 슬피 우는 각 나라의 왕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신기하게도 이들 중 백제사람도 있었다. 당시 혜초스님도 이 벽화를 봤을까.
드디어 우리는 17호 굴로 안내받았다. 구멍이 있는데 내부가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불빛에 의존해 자세히 들여다보니 퇴색한 벽화가 있다. 두 개의 나무 아래 두 시녀를 아래에 두고 선정에 든 고승 홍변의 좌상 모습. 왕오천축국전은 없지만 그 속에 혜초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제자리 잃은 실크로드의 문화재들
한편 우리가 갔을 때 둔황 석굴은 외벽 보수 공사가 한창 중이었다.
이신 연구원은 “조만간 모든 석굴의 관람을 중지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148호 굴은 퇴색 속도가 엄청나며 가장 빠르다. “이 속도라면 10년 뒤에는 전부 사라질 것”이라는 그는 “때문에 둔황 공항 옆에 3년 내로 제2 둔황석굴을 조성 중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지금 둔황은 위험하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외부적 요인이다.

우리는 둔황 석굴 관람을 마치고 문화재 약탈 역사를 다룬 전시장을 방문해 그곳에서 서구 열강 세력인 펠리오와 스타인에 의한 문화재 소실의 역사를 둘러봤다. 그림으로만 남아있는 찬란한 색채. 정작 실크로드에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나 조차도 가슴이 아픈데 주민들은 오죽하랴.
의외인 것은 우리나라도 실크로드의 악마 중 하나의 세력이라는 점이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약 6백 점의 둔황 유물이 일본 오타니에 의해 ‘오타니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소장 돼 있다. 비록 자의는 아니었지만 우리도 돌려주지 않고 있으니 그들 입장에선 엄연한 ‘약탈자’인 셈이다.
최근 국내에 불고 있는 문화재 환수운동,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작 우리도 남의 가슴을 울리면서 당당하게 환수를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인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막고굴을 나오니 천개의 눈을 가졌다는 천안수가 빼곡히 줄지어 있었다.
신기하게도 수백 개의 눈모양이 나무에 새겨져 있는데 마치 제 자리를 잃은 문화재를 그리워하며 애타게 기다리는 듯한 눈빛이었다.

 

백선아 기자 amy@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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