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가는 혜초스님의 ‘도전정신’, 스토리텔링을 통해 위대한 그의 업적 길이 남겨야

“서안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는 행운을 뜻하죠. 비 오는 오늘, 서안을 방문하신 여러분은 행운아십니다.”
7월 5일 오후 1시, 서안에 도착했다. 뜻밖에도 취재단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어두운 하늘.
연 강수량이 600mm인 건조지역 서안에서 그 누가 비를 예상했을까. 이곳에선 비가 행운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혹여 이 비는 서안에서 승려 혜초의 흔적을 만나게 되는 ‘행운’을 암시하는 걸까? 행운일지 불행일지 모르는 비를 맞으며 취재단의 서안 여정은 시작됐다.

혜초스님이 50여년간 머물렀던 서안
서안은 혜초스님이 인도에서 구법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만년 오대산에 들어가기 전까지 50여 년 동안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의 서안은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오는 국제적인 도시였다. 다양한 문화와 문명이 꽃피는 곳이었기에 혜초뿐만 아니라 현장법사, 불공 등의 유명한 구법승들 또한 이곳에 머물러 불법을 공부했다.

취재단은 현장삼장원에서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을 만났다. 현지 중국인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아 일일 외국인 관광객 방문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1시간 동안 대안탑에서 만난 외국인 관광객 무리는 10쌍. 적으면 3명, 많게는 20명이었다. 이는 대안탑을 방문하는 일일 외국인 방문자 수를 가늠하게 했다.

외국인들은 현장삼장원에서 일하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가이드는 현장삼장원에 조각된 그림을 따라 순차적으로 현장스님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현장스님의 탄생, 불교 경전을 번역하기 위해 떠났던 서역여정, 저팔계, 사오정, 손오공이 등장하는 소설 서유기가 설명의 핵심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몰래 엿들었던 기자도 마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 마냥 계속 귀를 기울였다. 원숭이와 돼지처럼 생긴 제자라는 말에 외국인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현장스님과 불교에 대한 외국인들의 끝없는 질문은 계속되었다.

현재는 흔적과 기록 찾을 수 없어
반면 혜초의 숨결이 살아있는 대흥선사는 자은사와 달리 인적이 드물었다. 이곳은 승려 혜초가 오랜 기간 머물면서 역경에 몰두했던 곳이다. 또한 수-당 시대 때 제일 컸던 사찰로 밀교의 중심 사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재 그 찬란한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보였다. 보수공사가 진행중이어서 여기저기 페인트 냄새가 진동했고, 나무들에 걸려있는 빨간 천들은 비로 인해 축축 가라앉아 있었다. 몇몇의 공사인부들을 제외하고는 주위에 다른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취재단과 함께 동행했던 법타스님(정각원장)도 대흥선사에서 혜초스님에 관한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안타까움을 표했다. 혹여 석비 한 귀퉁이에 남겨진 기록은 없을까. 아쉬운 마음에 대흥선사에 있는 석비 하나하나 모두 읽고 살펴보았지만, 그곳에 혜초의 기록은 없었다. 40년간의 불법을 구하고자 서역여행을 떠났던 승려 혜초의 도전정신과 흔적은 사라져 갈 뿐이었다.

삼장법사와 승려 혜초는 구법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미지의 세계를 여행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었다. 그 누구도 둘의 도전이 성공할 것이라고 장담하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그들이 걸었던 미지의 세계는 ‘길’이 되었다.

각자의 목표를 향해 도전하다보면 우리의 행적도 결국 길이 되리라. 두 구법승의 이야기는 꿈을 향해 도전하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취재단은 인생 선배 혜초의 이야기를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다. 현장법사의 삶과 정신은 이야기가 되어 남아있지만, 승려 혜초는 어디에도 없었다. 스토리텔링은 위대한 선인들의 업적을 기억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하루빨리 혜초스님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박지현 기자 bungaeo0@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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