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범 동문

요시다 겐코의 ‘도연초(徒然草)’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스님이 머무는 방 앞에 커다란 팽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팽나무 스님’이라고 불렀다. 스님은 자신에게 붙여진 별명이 무례하다고 여겨 팽나무를 잘라 버렸다. 그런데 뿌리가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를 ‘그루터기 스님’이라고 부르자 스님은 노발대발하며 그루터기를 뽑아버렸다. 하지만 그루터기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웅덩이가 생기자 사람들은 다시 ‘웅덩이 스님’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더구나 사람의 흔적은 죽은 뒤에 더 도드라지는 법이다. 최근 우리는 이 시대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족적을 남긴 두 사람을 잃었다.  IT분야의 혁신적 기업인 스티브 잡스와 산악인 박영석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스티브 잡스는 기업인으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의 삶 자체는 평탄치 않았다. 그는 등록금이 없어 대학을 중퇴했고,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났다. 망해가는 회사로 돌아와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켰지만, 2004년 췌장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올 10월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스탠퍼드대 졸업식 연설에서 남긴 말대로, 죽음 앞에서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며, 잃을 게 없는 사람은 가슴이 명령하는 대로 실천할 수 있다.

산악인 박영석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의 삶 자체가 새로운 시작이었고, 도전에서의 성공은 곧 죽음에서의 재생이었다.
얼마 전 그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8,091m) 남벽 신 루트를 개척하러 나섰다가 실종되어 한 장의 영정사진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불과 48세다. 그에게는 살아 있는 매순간이 죽음과의 대면이었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와 박영석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지만,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았다는 점에서는 같다. 죽음 앞에 선다는 것은 절망을 가져다주지만, 다른 한편으론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다. 잃을 것도, 가져갈 것도 없다. 이 원초적 상태에 섰을 때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첫 걸음을 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을 친구처럼 가까이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창조자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갔고, 그 길에서 삶의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갈 수는 없다. 더러는 원하지 않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행복한 삶을 사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아예 좋아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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