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대학들의 화두 중 하나는 순위경쟁이다. 국내 대학순위 몇 위이니, 세계 대학순위 몇 위이니 하는 단어들이 대학가를 유령처럼 횡행하고 있다. 하지만 대학순위란 조금만 따져 묻다보면 모순성과 무의미성이 드러난다.

대학순위에서 중요한 기준은 외국인 유학생 수, 외국인 교수 수, 연구기금이나 발전기금의 성과, 영어강의 수, 교수 연구실적 등이다. 이 수치들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쁘거나 하지 않다. 어떤 대학의 어떤 분야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지만, 어떤 대학의 어떤 분야에서는 부정적일 수도 있다. 외국인 유학생 수가 많으면 무조건 좋은 대학인가? 그렇다면 출석도 하지 않는 유학생에게 학점을 남발하는, 취업허가증 장사를 하는 일부 대학이 가장 훌륭하다는 뜻인가. 외국인 교수가 많아야 좋은 대학이라고? 한국학에서는 좋은 연구자가 거의 내국인이다. 논문 수가 많으면 훌륭한 교수인가? 논문이란 다 아다시피 자연과학의 학문적 소통행위 수단일 뿐, 인문학에서는 저서가 핵심이다. 대학에 돈이 많을수록 교육의 질이 좋아지는 걸까? 그보다는 교육을 위해 돈을 어떻게 쓰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이런 세세한 대목을 따지지 않은 채로 모든 대학 모든 학과에 획일적인 잣대를 들이밀고, 그 잣대에 의해 1등 대학에서 1,000등 대학까지 순위를 매기겠다는 발상은 그야말로 파시즘적이다. 오죽하면 대학평가가 대학교육을 망친다고까지 하겠는가.  

평가가 교육을 저해하는 사례 중에서도 백미는 영어강의이다. 영어강의 또한 필요한 분야에만 제한적으로 적용한다면 긍정적이다. 하지만 영어강의가 기계적으로 대학평가에 반영되면서 각 대학마다 그 수치를 높이기 위해서 눈 뜨고 보기 어려운 블랙코미디가 벌어지고 있다. “굿모닝과 굿바이만 영어로 하면 영어강의”라는 만담도 있고, 외국에서 오래 지낸 학생들이 교수의 서툰 영어강의를 듣다못해 “그냥 한국어로 하자”고 건의했다는 말도 들린다. 언어라는 교육의 도구가 교육의 내용을 지배하는, ‘돼지 꼬리가 돼지를 흔드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학순위제도 자체부터도 미국정부가 대학을 길들이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하지만, 그 기원과 상관없이 보더라도 오늘날 한국의 대학에는 득보다 실이 훨씬 더 많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특장이 있고 결함이 있듯이, 대학들 역시 저마다 잘 하는 분야가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인문학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본교는, 수량주의적 지표를 기준으로 삼는 경쟁에서는 당연히 불리하다. 그렇다고 순위를 올리기 위해서 100년 동안 해온 전통을 송두리째 버려야 한단 말인가. 자기가 잘 할 수 있고 잘 해온 분야를 버리고 남들 다하는 길을 따라 가야 한단 말인가.

무의미하고도 교육을 망치는 순위경쟁을 거부하자. 교육은 스포츠가 아니다. 모든 대학, 모든 학과, 모든 교육을 하나의 잣대로 등수 매기겠다는 전체주의에 저항하자. 교육의 핵심은 어떤 인간을 길러 낼 것인가에 있을 뿐이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학문분야마다 대학마다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본래 같지 않은 것을 같은 잣대로 재단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 누운 채로, 그저 킬로틴의 칼날이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물론 필자도 안다. 대학들이 실제로 순위경쟁을 거부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이다. 하지만, 훨씬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마음 속에서 거부하는 일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동국대학이, 내가, 몇 등에 불과하다는 ‘평가’는 어처구니없는 폭력이지만, 그것이 만일 우리 마음에 각인된다면 그 순간부터는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우리가 스스로 거부할 때 그것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내가 왜 십 몇 등인가. 나는 그런 식으로 계량될 수 없는, 우주 속에 유일한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존재이다. 한용운, 서정주, 신경림, 황석영, 그리고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의 공통점은 모두 대학 중퇴자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남들이 만든 잣대에 기대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힘으로 우뚝 섰다. 그들이 했는데 왜 나는 못할 것인가.

   본사 논설위원ㆍ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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