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누군가를 위해 진리를 실천하겠다는 다짐”

비폭력은 불교의 근본적인 행동 원칙 중 첫째가는 불살생계(不殺生戒)와 동일하다. 소극적으로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교훈을 뛰어넘어, 어떤 생명을 대할 때도 폭력적인 마음조차 내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행동원칙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배우고, 실패로부터 배우고, 악으로부터 배운다. 배우지 못한다면 악에 끌려가고, 실패를 거듭하며, 새로운 길을 걷지 못한다. 역사를 공부하는 까닭은 과거로 돌린 눈길에서 미래로 나가는 발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부분 지혜를 구하는 옛 가르침들은 매우 단순하고 알기 쉽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라”든가 “착하게 살라”는 종교적 교훈은 극단적으로 간명하다. 성현의 쉬운 가르침에 주석이 붙고 토가 달리면서 어렵고 복잡하고 실천하기 난해한 것이 되고 만다. 진실로 참된 것은 진정으로 쉽게 알 수 있는 법이다.
과거의 빛으로 오늘의 어둠을 물리친 대표적 인물로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 ~ 1945)를 들 수 있다. 당대 인도의 대표시인 타고르는 그에게 위대한 영혼이란 뜻의 호칭 마하트마를 선물했다. 그 호칭대로 간디는 영혼의 고귀함을 실천했을 뿐더러 자신의 민족이  잃어버린 자존심을 일깨웠다.

간디는 영국의 식민지배에 맞설 방법을 과거의 정신적 가르침 속에서 찾았다. 제국주의의 폭력에 맞선 그의 무기는 잘 알려진 대로 비폭력(Ahimsa, 非暴力)이었다. 일견 저항의 이념으로 모순돼 보이는 이 원칙을 그는 끝까지 고수하여 결국 제국주의자들의 압제를 굴복시킬 수 있었다.

비폭력은 불교의 근본적인 행동 원칙 중 첫째가는 불살생계(不殺生戒)와 동일하다. 소극적으로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교훈을 뛰어넘어, 어떤 생명을 대할 때도 폭력적인 마음조차 내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행동원칙으로 나아간다. 상대방이 사악하며 권력에 눈이 멀고 폭력에 사로잡혀 있어도 나는 그를 대할 때 연민과 진실로써 마주하겠다는 강인함이 불살생계의 근본이다. 간디가 “폭력은 나약한자의 언어이며, 비폭력은 강자의 원칙이다”고 주장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진정으로 자신의 길을 확신하는 이들만이 자신이 의지한 수단을 믿어 실천할 수 있다.

지금은 비폭력무저항운동이라는 모순된 명칭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비폭력의 행동수칙은 비협조와 불복종이다. 진실은 나의 편이며, 정의는 나의 길이므로 모든 불의와 거짓에 협조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이 간디가 이끈 비폭력운동의 핵심이다.
비폭력저항을 비롯한 간디의 주장은 ‘진리 실천(Satya Graha, 眞理把持)운동’으로 불린다. 자신들을 억압하는 영국인들에게는 물질과 무기와 폭력, 허영과 사치, 억압과 굴종, 계급과 차별이 있다면 인도인의 정신 속에는 비폭력과 고결함과 평등과 지혜와 공생의 진리가 있다는 자각을 되새겼다. 그러니 진리의 길을 가는 이는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무릎 꿇고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하신 까닭도 그렇다.

가난하여도 비굴하지 않고, 무력이 없어도 나약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옳은 길을 걷고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가능하다. 강한 자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끝내 이기는 자는 결국 강한 자이다.
간디가 주장한 진리(Satya)의 핵심은 모든 생명이 존귀하다는 불교적 가르침의 확장이다. 생명(Sat)이란 말과 진리, 존재, 신성함 등은 모두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다. 때문에 일체를 평등하게 바라볼 줄 아는 자비심을 갖는 것이 진리를 실천하는 근본이 된다고 보았다. 

간디에 이어 지금도 불교적 진리와 비폭력을 저항의 원리로 적극 실천하고 있는 이들은 티베트 민족이다. 1959년 티베트 라싸가 중국공산당 인민해방군에게 함락되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육 당하며 그들의 종교가 파괴되었을 때, 압제에 저항하는 전사들이 총을 들었다. 폭력에 맞설 수단으로 폭력을 선택하였다.
그때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의 스승들이 호소한 것은 “총을 버려라”였다. 티베트 변방의 국경지대였다가 이제는 네팔의 일부가 되어버린 무스탕 왕국에는 아직도 당시의 총칼이 봉인된 동굴들이 남아있다. 녹슨 총칼은 언제든지 전사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늙어버린 당시의 투사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총을 들라면 지금이라도 총을 들것이다”고 외친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 속 미움을 거두어 들였다. 폭력대신 선택한 것은 억압 속에서도 진리를 향한 믿음을 지키고 적을 향해 기도하는 일이었다.  

안타깝지만 폭력을 비폭력으로 맞서고, 광신을 신앙으로 맞서고, 불의를 진리로 맞선 그들의 태도는 옳다. 옳을 뿐 아니라 고결하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고, 억압이 있을 때마다 차라리 압제자를 연민한다. 그들 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위해 옛 티베트의 스승 아티샤가 남겨놓은 일상의 기도문 한 구절은 이렇다.
“고통스런 순간이 닥치더라도 피하지 않고 바로 보며 대하겠습니다. 폭력과 사악한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을 만나더라도 고귀하게 대하겠습니다. 귀중한 가르침을 주는 스승처럼 다정히 맞아 섬기겠습니다. 미움에 휩싸여 나를 속이고 모욕하여도 기꺼이 귀 기울이겠습니다. 사나운 말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승리의 기쁨을 돌려주겠습니다.” 이것이 불굴의 마음이다.

기도(祈禱)는 무엇엔가 매달려 원하는 바를 들어달라는 호소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위해 진리를 실천하겠다는 분명한 다짐이다.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선함이며, 비폭력은 폭력에 대한 진정한 용기이다.
세상은 다시 불확실하고 혼란스런 시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혼돈 속에 빠질수록 본질적인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한다. 어려움이 점점 더 커지고 불편과 불행이 더욱더 닥쳐와도 진실의 편에 선 이는 기꺼이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삶은 간혹 흔들리나 쓰러지지 않고, 고통은 때때로 찾아오나 진실은 꺾이지 않는다. 오늘도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며 나의 길이 옳다는 확신을 되새길 수 있다면 또 하루 행복한 날이 될  것이다. 그것이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는 내일의 길잡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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