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세계인 혜초스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⑥ 델리

 전용 차량을 주차시킨 곳에서 델리대학 정문까지의 거리가 상당해서 취재단은 릭샤(인력거)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길가에 주차된 수많은 릭샤 중 한 릭샤에 탑승하고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깊은 얘기를 나누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걷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짓궂은 장난을 친 친구에게 큰소리를 내며 쫓아가는 학생들도 있었다. 예상보다 수많은 여학생들이 다양하고 자유로운 복장으로 거리를 수놓고 있었으며, 어떤 여학생들은 남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대학가와 별다를 바가 없는 풍경이었다.

정문에 닿자 인도 특유의 ‘엿장수 맘대로’식 바가지 때문에 운전수와 운전비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탓에 기분이 상했지만, 막상 문 안에 들어서니 노여움이 사그라지고 호기심과 설렘으로 발을 내딛게 되었다. 가운데에 나 있는 길의 양 옆으로 단과대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고, 길에는 돌로 만들어진 원형의자와 푸른 나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비교적 깔끔하게 정비된 교정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인도 전통의상을 입은 대학생들
의자에 앉아 지나다니는 학생들을 관찰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분홍빛깔의 전통 복장을 한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페르시아어를 전공하고 있는 문과대 학생으로, 소설책을 읽는 것이 취미라고 했다. 그녀는 “부모님은 제게 많은 애정을 주시고 저를 독립적인 여성으로 키워주셨어요. 대학을 졸업하면 선생님이 될 거에요”라고 말하며 가정이나 학교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깊고 큰 눈에는 총기와 자신감이 가득했는데, 역시 능동적인 자질을 갖추도록 가르친 교육의 산실인 듯했다. 전통 복장을 한 이유에 대해 묻자 스스로가 아름답고 편해서 입는 것이며 인도 여성들이 전통복장을 입고 안 입는 것은 그들의 의지와 자유에 달려있다고 대답했다.
델리에 오기 전에 강가강 주변의 바라나시 시내에서 봤던 이슬람교 여성들은 까만 천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의 히잡 착용 금지령에 앞장서서 반대할 정도로 전통계승 의식이 강한데, 이 여학생의 말에 근거하면 힌두교를 믿는 인도 대다수의 젊은 여성들은 그에 비하면 훨씬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고를 갖게 된 셈이다.
그러나 계급에 따른 교육의 양극화가 심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대다수의 계급이 낮은 여성들까지 그녀와 같은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사고를 갖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불교를 배우고자 바다를 건넌 대중


좀 더 많은 학생들을 만나보기 위해 불교대가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 건물을 멀리서 볼 땐 잘 알지 못했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서니 마치 낡은 고등학교 건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업이 끝난 한 강의실에 여학생 두 명이 앉아있었는데 비구니였다. 그 중 한명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그녀는 그들이 인도의 불교를 배우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유학생임을 밝혔다.

그녀는 인터뷰가 쑥스러운 듯 말을 아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델리 대학에서의 불교 공부에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말했다. 인도 불교의 힌두교화는 델리 대학의 불교대에도 그 영향을 끼쳐, 학생 정원 중 절반가량을 외국인 유학생들이 차지해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해가고 있다.

불교가 태어난 국가인 동시에 불교가 쇠락해가는 국가인 인도에 여성의 몸으로 법(Dharma)을 구하고자 건너온 그 용기와 신념이 꺾이지 않기를 바라는 한편, 돌아간 나라에서 그 신념을 발휘하고 더욱 발전시켜 성숙한 불교문화를 꽃피우는 데 앞장서길 바랐다.

남녀 평등 사상 정립된 경우 많아
강의실 바깥의 복도에서는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거니 까만 눈동자들이 일제히 반짝이며 동양인의 작은 눈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녀들에게 전공학문을 묻자, 모두 델리 대학을 졸업하고 심리학 석사 학위를 얻기 위해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알고 보니 놀랍게도 그녀들은 21살로,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대학교 2학년에 재학할 만한 또래였다.

인도와 우리나라의 교육체계가 다르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말해주자 그녀들은 "코리안 뮤지션!"을 외치며 한류 가수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것을 보여줬다.
 델리 대학을 둘러본 반나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세계화와 현대화의 바람이 이곳에도 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나라와 학문을 교류하고 학생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달하는 대학의 모습과,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며 다른 나라의 문화에 민감한 신세대의 모습에서 인도의 발전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여학생들도 남성과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의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인도가 과거의 폐습을 걷고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이러한 교육의 혜택이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확대되기 위해서는 인도의 계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과제임을 절감했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이 교육을 받고 세상에 눈을 뜨면서 이러한 인도의 고질적 문제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세대가 될 것이라는 예감을 지울 수 없기도 했다.

인도에도 세계화ㆍ현대화 바람이


지난 8월, 인도 전역에서 이례적으로 수 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와 대규모 시위를 벌였던 적이 있었다.
인도인 스스로를 놀라게 하였고 세계적으로도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다. 대규모 시위는 강력한 반부패법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한 ‘현대의 간디’로 추앙받는 사회운동가 아나 하자레(74)가 긴급 체포되면서 시작됐다.
하자레는 정치 부패를 근절하기 위해 고위 공직자 부패 수사 기구 설치 등을 내용으로 한 ‘로크팔(힌디어로 옴부즈맨)’법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에 들어갔고 수천명이 동참했다. 놀란 정부는 반부패법 제정과 하자레와 사회운동가 그룹을 법 제정에 참가시키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달 초 정부는 총리와 사법부를 대상에서 제외하고, 각종 예외 규정을 둬 실제로는 극히 일부의 정치인과 관리에게 적용되는 허수아비법을 내놨다. 싱 총리와 정치권은 문맹률이 50%에 달하는 인도에서 법의 구체적 내용을 파악해 문제 삼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하지만 하자레는 단식 투쟁으로 맞섰고, 그를 지지하는 시위대는 갈수록 늘어나 델리에서만 6만명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우리는 인도에 대하여 너무 많은 환상을 가지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 또는 책에서도 인도에 대한 환상을 인도의 본 모습인 것처럼 표현한다.
필자 또한 인도에 대해 신비와 환상의 나라, 모든 사람들이 철학자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곳이라는 환상이 있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인도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정보를 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환상이 점점 커지고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8월에 있었던 대규모 시위가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던 이유는 카스트 제도와 빈부격차로 굳어있는 인도에서 시민사회의 출현과 중산층에 기댄 실질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새롭게 보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단식을 주요 저항의 수단으로 삼는 하자레가 비폭력 운동을 펼쳤던 마하트마 간디를 연상시키며 오랫동안 인도 사회에 부재했던 ‘사회적 롤 모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단식을 주요 수단으로 마하라슈트라주 정부의 부패 관리들을 몰아내기 시작했고, 이어 전국적인 반부패운동을 이끌며 인도 중산층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인도의 현실을 보는 계기돼
 인도는 다양성을 특성으로 한다. 그러나 그 다양성이 사회를 나누고 있다. 나누어진 사회는 갈등이 되고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인도는 카스트 제도, 종교와 연계하여 차별화가 되어 있다.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차별은 인도의 다양성을 구성하면서 사회를 나누고 있고,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 내고 있다. 불교의 탄생에서도 카스트제도와 관련한 내용을 볼 수 있다. 불교는 처음부터 종교로 시작되지 않았다.

단지 사회 개혁 성향의 신진사상이었을 뿐이었다. 수행자 고타마의 주장은 인간평등에 있었다. 특히 인도의 뿌리 깊은 카스트 제도의 타파에 있었다. 그는 민중에 편에 서서 “사람은 누구나 출생에 따라서 신분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브라만은 출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행위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라는, 당시에는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온 선언을 했고 이를 평생 실천했다. 물론 고타마 자신도 브라만이 아니기도 했었지만 당시는 브라만이 주도해온 사회가 사제들의 부패로 많은 병폐가 드러나고 있었을 때였기에 도처에서 반(反) 브라만 사상이 성숙되던 시기였다.
이런 결과로 고타마 사문은 브라만 사회에서는 기피인물로 배척을 받았지만, 국왕이 브라만의 견제세력으로 불교라는 신흥사상을 이용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의 권력과 금력은 종교라는 집단이 거대해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기에 불교는 붓다 재세시(在世時) 이미 ‘종교’의 골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현대 인도사회에서 종교적 갈등이 카스트 제도와 연계되어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간의 갈등을 가져오고 있다. 카스트에 의한 차별을 인도의 헌법에서 금지하고 있지만 차별은 사회의 곳곳에 존재하면서 인도인의 삶을 억누르고 있다.
 이러한 인도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가능한 것일까? 놀랍게도 인도인들은 자신들이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한다. 한번도 강력한 중앙집권제에 의하여 지배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방은 무수히 많은 지역의 마하라자(왕)들이 자치권을 가지고 통치를 했다. 인도의 민주주의는 국가발전과 비교하여 과잉민주주의가 되고 있다. 이러한 과잉민주주의가 빠른 발전이 요구되는 인도의 발목을 잡고 있지만 이것이 인도인들로 하여금 세계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는 꽃피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인도식 민주주의의 한계이다.

윤선주ㆍ방혜정 기자 besensible@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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