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와 함박눈이 내리고 바람도 싸늘하다. 더불어 期末考査(기말고사)가 끝나고 다시 겨울방학이 시작된다. 이 긴 휴일에 우린 진지한 하루 학업과 趣味生活(취미생활)로 윤택한 나날을 맞이해야겠다. 無趣味(무취미)가 趣味(취미)라고 역설하지만 知性人(지성인)으로의 취미 또한 갖가지다. 山(산)으로 江(강)으로, 혹은 스포츠나 情緖的(정서적)인 취미도 많겠지만, 여기 敎養人(교양인)의 趣味(취미)로 三章(삼장)을 엮어본다.

  映畵館(영화관)을 나설 때 잠시 막연해지는 기분에 매력을 느꼈나보다.
  심상에 투영되는 영화 속 주인공의 몸짓에서 同類意識(동류의식)을 강하게 느껴보는 젊음의 기대인지는 더더욱 모른다.
  오래전부터 外畵(외화)에 대한 나의 취향은 비록 放畵(방화)의 질을 얘기하기에 앞서 다분히 異國化(이국화)되어 가는 젊은 우리들의 기호라는데 더욱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비교적 보수적인 내가 ‘불랙 커피’를 서슴없이 마시는 친구의 세련(?)됨에 몸서리를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外畵(외화)가 내게 어필되어오는 것은 언어의 뉘앙스가 다르다는 문제로 게제된 것 같다.
  비록 언어가 다르다 해도 外畵(외화)가 낯설지 않다는 것은 내가 걸친 의류 내가 생활하는 환경이 낯설지 않다는 자신 있는 결론의 소산인 것이다.
  外畵(외화)의 매력을 놓고 볼 때 小說(소설)에서 말하는 ‘하드ㆍ보일’體的(체적)인 요소와 주인공의 과묵한 성격이 장황한 설명을 원치 않는 현대인의 구미에 맞는다는 것이다.
  한때 젊은이의 우상이었던 ‘몽고메리ㆍ크리프트’같이 몸 전체로 관객과 ‘텔레파시’가 통하는 배우나 ‘잃어버린 양지’에서의 ‘시드니포와이티어’ ‘브릿트’에서 ‘스티브맥퀸’의 연기 등은 主演(주연)인 배가기 그 작품의 분위기를 모습으로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西歐人(서구인)의 정신적인 집념을 보여주는 영화는 이루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다. 마약밀매업자를 쫓는 ‘진행크민’이 동료형사를 실수로 사살하고도 추적을 계속하는 ‘후렌치ㆍ코넥숀’이나 ‘더스틴ㆍ호프만’주연의 ‘리틀ㆍ빅맨’에서 카소타장군의 집념 近着(근착)영화 ‘타겟’의 하리(오리버ㆍ리드)의 증오는 잠시도 시선을 화면에서 놓아주지 않는다.
  카메라 앵글의 기교나 대화의 간결은 배우들의 연기력과 더불어 영상미학의 에센스라 할 수 있다.
  개인교수에서 ‘르노베르데’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장면은 배우의 방황하는 마음의 배회처럼 빗속을 질주해간다.
  확실히 우리들은 外畵(외화)속에서 강렬한 인상을 주는 주인공에게서 간혹 미모를 원치 않을 때도 있음을 알고 있다.
  천박한 여인상을 그려주던 ‘훼이ㆍ더나웨이’가 중후한 여기를 보여주는 ‘파리는 안개에 젖어’나 ‘개인교수’에서 완벽한 미모라고 볼 수 없는 ‘나타리ㆍ드롱’은 외려 오랫동안 그 영화를 되새길 수 있게 한다.
  각설하고 外畵(외화)의 최고 가치를 나름대로 정의해보면 심장의 고통을 잠시 멈추게 하는 라스트 신이 아닌가 한다.
  경찰에 쫓기는 애인(시드니ㆍ포이티어)과 정사하는 ‘잃어버린 양지’의 피날레는 관객들에게 다른 세계에서의 행복을 약속해주도록 강요하며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오열하는 ‘록ㆍ허드슨’과 오버랩되는 애인(제니퍼ㆍ존슨)의 얼굴, ‘황야는 통곡한’에서 후랑크ㆍ네로의 절규는 나를 울리기에 벅찬 라스트였다.
  짧게 나열한 외화의 매력은 설명할 수 없을 감동을 내게 준 몇 개의 작품에 불과하다. 구성의 완벽과 대화의 간결한 요소는 오늘도 나의 발길을 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邦畵(방화)의 水準(수준)이 현저히 차이나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김동인원작의 ‘무녀도’는 내가 近年(근년)에 본 가장 충실한 연출작품으로 생각되었다.
  시선과 시선으로 대화를 할 수 있고, 그 시선의 참의미를 관객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영화, 그렇다고 너무 드라이한 것도 내 구미는 맞지 않는다.
  ‘젊은이의 양지’에서 죠지 몽코데리ㆍ크리프트의 모습이 나에게 있어 영원한 외화의 잔영이라면, 빅카스(리즈)의 미모는 내가 그릴 수 있는 최고의 여인상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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