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등잔 어슴한 사립문을 들어서면 녹두지짐 부치는 자욱한 기름 냄새…

  피양?
  내 고향의 이름인 평양을 사투리 흉내 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표기(表記)다.
  그러나 ‘이북내기’, 그중에서도 평양출신인 것을 슬며시 자랑으로 알고 있는 우리 식구들은 정확히 ‘페양’이라고 발음한다.
  피양과 페양. 나는 아직도 어떤 것이 정말 본토인(本土人)들의 발음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그 차이는 이런 것뿐일까.
  집 앞산(아마 작은 언덕이었을게다)에 송전탑이 있었다. 하늘 높이(그 높이는 가능한 한 가장 높이 생각된다) 솟아 있는 파리의 에펠탑형(型) 구조를 가진 그 송전탑의 수십 가닥 전선이 하얀 사기로 만든 애자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가까이 가기만 하면 전기에 붙어 죽는다는 엄포에도 우리 꼬마들은 곧잘 어른들 눈을 피해 그곳에 숨어가 무슨 보물을 훔치듯 송전탑 받침쇠에 손가락을 가져가며 금세 전기에 붙어 죽는 죽음의 공포에 짜릿짜릿해 가는 스릴을 만끽했다.
  개천인지 연못인지, 아니면 물대는 작은 웅덩이인지 하여튼 게를 잡던 생각도 난다.
  일 년만 더 있으면 ‘김일성국민학교’에 입학했을 테니까 여섯 살 때인 1ㆍ4후퇴 당시 우리 형제는 이불보퉁이를 머리에 둘러멘 어머니를 따라 남하해야했다.
  고무신 대신 이불솜을 뜯어 발을 싸고 그 위에 광목을 둘러 신발을 만들어 걸어왔다는 어머니의 말씀이지만 그 기억은 생각 안 난다. 그러나 지금도 왼쪽머리 가마꼭지 옆에 나 있는 흉터를 만져볼 때면 임진강을 도하하던 장면이 눈앞에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우리 식구는 얼음이 꽝꽝 얼어붙은 임진강을 밤에 건너 가야했다. 강가에는 콜탈 묻은 전봇대를 불 질러 놓아서 그 불빛이 얼음 위를 환히 비췄다 했다.
  얼음을 밟으며 건너가던 내가 강 복판에서 그만 미끄러져 넘어졌다.
  피난 중이라 순서를 차릴 수 없어 상처가 덧나 곪을 때 까지 치료는 생각도 못했다. 그 때문에 악화된 상처의 크기가 깊어졌지만.
  밤이었다. 나중에 커서야 알았지만 외할머니 집이었다 한다. 석유등잔이 어슴히 비추는 초가집 사립문을 들어섰을 때, 녹두지짐(빈대떡) 부치는 차르르 소리와 ,자욱한 기름 냄새가 코에 훅 끼쳤다.
  가난한 외할머니셨지만 오랜만에 보는 외손자들이 큰손님같이 반가와 지짐을 부친 것이다.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 외할머니의 얼굴이지만 지금도 빈대떡을 먹을 때마다 외할머니의 빈대떡사랑이 가슴을 툭툭 치고 들어온다.
  평양에서 열린 제1차 적십자 본회담에 평양거리의 낯익은 지명(地名)들. ―이름하여 선교리, 기림리….
  형을 따라 모란봉에 올라갔다가 형의 손목을 놓쳐 길을 잃고 헤메다 기림리 파출소(?)에서 앙앙 울고 있는 것을 찾아왔다는 어머니의 후일담은 내 머릿속에 ‘기림리’의 세 글자를 깊이 각인(刻印) 시켜 놓았다.
  북한 적십자대표가 입경(入京)하던 12일 낮. 강의시간 중에 과우(科友) 세 명과 함께 장충단공원 연도에 서서 그들을 기다렸다.
  그들은 왔다. 레닌모를 쓴 윤기복과 연두색 한복을 입은 이청일 등, 나는 들고 있던 신문을 흔들었다. 휙휙 지나가는 차량의 행렬 속에 그들은 타고 있었고 손 흔들어 답례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소리를 지른 것 같은데 나 자신도 무엇인지 몰랐다. 아마도 짐승 같은 소리였으리라.
  추억은 이미 지난 시대의 것이다. 정녕 페양이 그리우면 술이나 마시고 ‘이수일과 심순애’나 읊으며 꿈속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만나 ‘기림리 파출소’에 들려 인사나 할까?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