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수 교수의 大學을 論하다

장학금이란 가난하지만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이 배움의 기회를 박탈당하지 않도록 해주는 사회적 장치이다. 따라서 장학금 수혜자를 선정할 경우 대부분은 가사곤란도와 성적을 함께 고려한다. 그러나 필자는 가사곤란도를 훨씬 더 중시해야 마땅하다고 판단한다. 한국의 경우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이 세습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장학금의 기능이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이 필요한 사회라고 보는 것이다.

게다가 학업우수자에 대해서는 꼭 금전적인 혜택 말고 다른 방식의 인센티브, 예컨대 다양한 형태의 명예를 부여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마땅하다. 부유한 가정의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장학금은 그 화폐가치보다는 상징적 가치가 더 클 것인데, 굳이 제한된 경제적 자원을 그들에게 배분해야 할 것인지 재고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대학의 장학금제도는 대체로 정반대이다. 경제사정보다 성적을 훨씬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그러다 보니 현재 한국의 가난한 학생들은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고, 그러느라 공부시간이 줄어들어 장학금조차 못 받는 악순환에 시달리고 있다.  대학제도의 골간을 미국에서 따왔다지만, 장학금제도만은 미국에조차 미달하는 셈이다. 미국의 대학등록금은 잘 알려져 있듯이 살인적으로 비싸지만, 학생들의 경제형편에 따라서 장학금을 차등지급함으로써 교육의 기회를 비교적 폭넓게 보장하고 있지 않은가. 유럽의 많은 국가는 거의 무료로 대학공부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가정의 경제적 사정을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데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에는 금융실명제가 되지 않고, 조세형평성이 미흡하다는 점 때문에 가사곤란의 정도를 측정할 지표가 믿을만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금융실명제의 결여나 조세형평성의 미흡이란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를 불러오는 대학 외부의 제도이다. 대학 내부에서도 그 외부의 조건만을 탓하고 있으면, 불평등은 확대재생산되지 않겠는가. 빈부격차의 세습으로 사회의 활력은 약화되고 소외층의 불만은 쌓여가지 않겠는가. 대학 내부에서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마땅할 노릇이다.

경제적 형편을 정확하게는 파악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대체적으로는 파악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게다가 가사 장학금 대상자를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결정하도록 맡겨보는 방식도 시도해볼 만 하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국문학과에서는 동문들이 ‘빈자일등’으로 모은 돈으로 ‘만해가사장학금’을 운용 중인데, 매학기 거의 이런 방식에 의해서 수혜자를 선정하고 있다. 학생들은, 물론 고통스러운 합의의 과정을 겪지만, 대부분의 경우 별 문제없이 대상자를 스스로 선정한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한국의 제반 형편에서라면 이런 방식이 좀 더 정확하게 가사곤란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방식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는 사회적 갈등을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하는 능력을 배양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산 체험이기도 하다.

물론 가난한 학생들에 주는 장학금에는 조건이 붙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졸업후 적절한 시기에 상환하도록 하거나, 또는 대학을 위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봉사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공짜복지’ 논란을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세세한 방법이야 어찌 결정되건 간에 장학금을 가난한 학생 위주로 주어야 한다는 원칙 만은 확립되길 바란다. 모든 것을 행정가가 지표에 의존해서 결정해야 한다는 신화에서만 벗어나면 얼마든지 방법은 고안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우리 대학은 종립대학이다. 그럼에도 동국대가 다른 대학과 비슷하게 성적 위주의 장학금제도를 운용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대학운영의 철학을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길어오자. 빈자일등의 가르침대로, 기계적 평등이 아니라 실질적 평등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자. 우리 대학의 등록금과 장학금 제도가 모두 빈자일등의 정신을 본받을 수 있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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