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세계인 혜초스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⑤ 쿠시나가라, 타지마할

▲쿠시나가라 열반당에 모셔진 불상
붓다가 눈을 감은 곳, 쿠시나가라.
왜 붓다의 입멸지가 이곳인지는 붓다가 입멸한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여러 마을을 거치면서 가르침을 베풀던 붓다는 병을 얻었지만 쉬지 않고 계속 길을 걸어갔다. 대장장이 춘다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 춘다는 붓다에게 달려와 스카라 맛다바(연한 돼지고기 혹은 버섯 요리)로 공양을 올린다. 이 때문에 붓다의 병세는 악화되었다. 피를 토하면서도 붓다는 그를 돌봐주는 제자 아난다에게 쿠시나가라로 갈 것을 청했다. 혜초는 붓다의 입멸지에서 일행과 함께 보리심이 일어남을 느꼈다고 말했다.

구시나국(쿠시나가라)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이자만 성은 이미 황폐화되어 아무도 살지 않는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곳에 탑을 세웠는데 한 선사가 그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있다. 해마다 팔월 초파일이 되면 남승과 여승, 도인과 속인들이 그곳에 모여 크게 공양 행사를 치르곤 한다. …(중략)…

과연 쿠시나가라는 가난한 동네였다. 열반당 앞에는 사라쌍수가 서 있었다. 열반당 안은 비교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꽃장수가 우리 취재단에게 건네준 노란 꽃을 붓다의 와상 앞에 두고 와상을 바라보았다. 옆으로 누워 있어 편안해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금방이라도 신음소리를 토해낼 듯한 모습이었달까.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는 자신의 흔적을 이 세상에 남기고 가려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평소에 쓰던 물건들을, 어떤 이는 자신을 닮은 아이를, 어떤 이는 자서전을 남기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붓다가 남긴 것은 오로지 가르침뿐이다. 후계자도 정하지 않았으며, 계율의 자질구레한 폐단은 없애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로, “모든 사물은 반드시 소멸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샤 자한이 아들에 의해 갇혀있던 아그라 성의 공간
붓다의 열반은 그의 선인들이 말하는 열반과는 완전히 달랐는데, 3가지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첫째, 영혼의 구원과 지각적 존재의 행복은 별개라는 것이다. 두 번째 사상은 윤회 속에서 지각적 존재가 얻는 행복이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세 번째 사상은 항상 타오르게 마련인 정념의 불길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번뇌와 탐욕의 족쇄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이 곧 그가 열반에 도달하는 순간인 동시에 행복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니르바나는 ‘불을 끄는 것’이라 해서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올바른 생활의 다른 표현이다. 라다의 니르바나에 대한 물음에 대답한 붓다의 말은 죽음을 단지 고통으로만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준다.

“니르바나가 무엇입니까?”
“니르바나는 정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라다, 니르바나에 뿌리를 내렸을 때 올바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니르바나는 올바른 생활의 목표이자 목적인 것이다.”

타지마할에 도착하니 작은 쇼핑백 하나를 주는데, 그 안에는 생수 한 병과 함께 신발을 감싸는 덧신이 들어있다. 신성한 곳에서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는 예법이 이곳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한곳으로 손꼽히는 타지마할, 과연 맑은 하늘 아래 하얀 대리석은 밝게 빛났고, 또 하나의 타지마할이 연못에 은은히 비춰지며 장관을 이룬다.

타지마할이 유명한 것은 비단 미적 우수성 때문만은 아니고, 축조에 관련한 비극적 일화가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기 때문이다. 타지마할은 무굴왕조의 다섯 번째 왕 샤 자한 때 축조되었다. 샤 자한에게는 그가 가장 사랑했던 왕비 뭄타즈 마할이 있었고, 그녀의 조력과 사랑으로 그의 왕국은 번영하고 안정된 시기를 누렸다. 그러던 어느 날 타지마할이 전쟁터에서 샤 자한을 정성껏 돌보다 열 네 번째 아이를 낳던 중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왕비의 간청 때문인지 자신의 집착 때문인지, 그는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다운 무덤’을 짓는 데 전력을 다한다. 하지만 약 20년이 넘는 대공사는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다운 무덤’의 탄생을 예고하는 동시에 백성들의 원성과 아들 아우랑제브의 불신을 낳았다. 샤 자한이 세금을 무리하게 걷고, 일을 마친 건축가들의 손가락을 자르는 등 판단력을 잃은 지경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아우랑제브의 반란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고, 아그라 성에 갇혀 최후를 맞이한다.

이 일화는 사랑과 일, 두 가지를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모두에 적절히 관심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 주었다. 두 가지 중 어느 한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붓다의 중도가 떠오른다. 고행과 쾌락의 중간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듯, 일과 사랑의 중간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붓다에게는 태자 시절에 고파, 아쇼다라, 마노다라, 이 세 명의 아내가 있었다. 그 당시 그는 세 개의 침소에 번갈아 가며 머물렀는데, 이는 곧 외부의 암살 시도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왕족 특유의 관습이었다고 한다. 이런 관습과 상관없이, 붓다는 세 부인 중 어느 한 부인만을 끔찍이 아꼈던 것은 아니었다. 출가 후 집에 보내는 서한은 주로 아쇼다라에게 보내는 것이었지만 그 또한 아쇼다라가 그의 아들인 라훌라를 낳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끔 만나거나 서한을 주고받는 것으로 붓다는 가족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를 갖췄다. 그리하여 태자는 사랑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었다.

▲무굴왕조의 왕인 샤 자한이 왕비‘뭄타즈 마할’를 기리며 축조한 타지마할
깨달음을 삶의 이유로 여겼던 붓다와 달리, 어쩌면 세속의 인간들은 오로지 사랑을 위해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타지마할은 불교 성지 순례에서 느꼈던 경건함에서 잠깐 벗어나 우리네의 삶으로 시선을 옮겨 자신을 반성하게 하는 곳이었다. 타지마할은 불교 성지들에 비해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고도의 예술성이 마치 사랑을 거둬가는 삶의 유한성을 막아보려 하는 인간의 마지막 반항으로 보였다. 때문에 이 거대한 무덤이 사랑에 목을 매고 죽음 앞에서 약해지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평범하고 작은 공간으로 느껴졌다.

샤 자한은 죽어서까지 함께하고픈 그의 부인과 나란히 잠들어있다. 그러한 그들의 영원한 합일을 부러워하는 이 중생의 마음은 역시 스스로가 속세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했다. 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자한과 타지마할의 무덤이 몇 겁을 지나도 없어지지 않을 양으로 환히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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