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 特別展(특별전)을 보고

  파리近郊(근교) 바르비종의 田園(전원)에서 흙과 가난한 農夫(농부)들과 살아간 밀레(Jean Francois Millet 1814~1875). 그는 평생을 통해 自然(자연)에의 극복내지 同化(동화)를 꿈꾼 意志(의지)로서의 農民畵家(농민화가)였다. 화폭마다에 넘치는 人間愛(인간애)와 詩情(시정)은 단순한 예술을 넘어선 바로 그것이었다. 가난하고 素外(소외)한 모습, 노동하는 모습은 좋은 소재여서 훌륭한 美的價値(미적가치)로 등장하고 있다. 풍경화가라기 보단 寫實主義的(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농민생활에 침잠해 靜中動(정중동)을 기본으로 한 民衆(민중)을 위한 예술가인 것이다.
  여지껏 밀레를 바르비종派(파) 七星(칠성)(밀레ㆍ루소ㆍ디아즈ㆍ트로외용ㆍ도비니ㆍ코로ㆍ뒤프레)의 대표적 화가로 쉽게 일컬어왔다.
  그 당시 인간은 자연을 극복함으로 행복을 갖는다는 西洋(서양) 人本主義(인본주의)에 비해 그들 농민화가들은 오히려 東洋的(동양적)인 自然觀(자연관)을 갖게 되었다. 즉 自然(자연)은 인간과 함께 있고 인간은 자연과 하나 되기를 理想(이상)으로 삼은 것이다. 정복보단 이해와 包容(포용)으로 자연을 대한다는 發想(발상)은 유럽畵壇(화단)에 큰 신기원을 이룩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19세기 초까지는 거룩한 宗敎畵(종교화) 혹은 귀족층만 대상으로 삼은 他意的(타의적)(?)인 창작태도였다. 이제 평범한 인간에의 애정과 외경은 노동예찬까지 대두되게 된 것이다.
  그리해 近代(근대) 風景畵(풍경화)의 밑바탕이 되는 참신한 새 自然觀(자연관)은 客體(객체)로서 自然(자연)주시를 버리게 된 것이다.

  가난한 農夫(농부)의 長男(장남)으로 태어난 밀레는 一生(일생)을 고독하게 살아가며 自己深化(자기심화)에 열중했다. 그의 <造形(조형)하려는 意志(의지)>는 자연과 農夫(농부)가 있어 새로운 人間型(인간형)의 부각에 고독을 달랜 것이다. 결국 人間不在(인간부재)의 풍경화를 지양 새로운 美(미)의 영역을 개척한 것이다.
  예술은 투쟁이다. 對象(대상)과 作家(작가)와의 合一(합일), 거기에 진통으로의 作家意識(작가의식)은 作品(작품)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이점이 ‘꾸르베’같은 一方的(일방적)인 사실주의가 아니고 田園(전원)과 경건한 宗敎(종교)가 있어 예술적 포용으로 달리하는 점이기도 하다.
  하나의 풀잎, 새소리, 바람소리, 노을 등이 모두가 관찰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 철저한 휴머니티는 노동의 즐거운 한 순간을 포착해 드디어는 자연의 同一體(동일체)가 되는 것이다.
  밀레는 유럽의 기본정신인 사실주의와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프랑스 北方的(북방적)인 요소를 여실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낭만적이며 국제적인 반면 現實的(현실적)이고 民族的(민족적)인 北方(북방)요소는 그만큼 프랑스의 農民(농민)을 강렬하게 조형시킨 것이다.
  東洋的(동양적)인 정서감은 위대한 名作(명작)을 낳게 된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 ‘秋收(추수)하는 사람들의 휴식’ ‘이삭줍기’ ‘晩鐘(만종)’ ‘봄’등이 있고 이번 특별전에 전시된 다음과 같은 작품도 있다.
  ‘소치는 女人(여인)’ ‘양치는 少女(소녀)’ ‘여름 또는 세레스’ ‘그레빌의 사촌마을’ ‘보네트를 쓴 노르만디女人(여인)’ 그 외 素描(소묘)등이 즐비하다. 꽉 짜여진 構圖(구도)와 조화는 色感(색감)과 더불어 예술조화는 자연조화임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古典的(고전적)이어서 다만 技法上(기법상)의 다양한 質感(질감) 구도 등은 찾기 어려우나 진한 人生(인생)이 담긴 線(선) 하나마다 哲學(철학)이 샘솟는다.
  누구나 경탄하는 밀레의 데생은 새삼 훌륭하다. 짧고 간결한 線(선), 그러면서도 부드러움으로 量感(양감)을 충실히 나타내 기법인 것이다. 분명 素描(소묘)는 하나의 예술장르이다.
  이번 朝鮮日報(조선일보)주최 밀레특별전은 비록 작품 수는 적지만 原畵(원화)를 감상하게 되는 한국화단에 큰 수확이라 하겠다. 밀레는 19세기에 살고 20세기에도 산다. 그리고 來日(내일) 또 來日(내일)에도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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