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과 인연이 현재의 나를 만든 원동력”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잠시 스치는 인연도 소중히 해야 한다. 이렇게 사람관계를 중요시하며 자기가 속한 회사에 모든 걸 바친 사람이 있다. 일반 사원으로 시작해 다양한 요직을 거쳐 현재 종합검진병원 한신메디피아의 행정원장인 김철순(경영학과 75졸) 동문이다.

 약속시간 전 인터뷰 장소에는 김 동문과 함께 그의 경영학과 후배 2명이 있었다. 학교 근처에 온 김에 후배들을 만나 진심어린 격려와 조언을 해주기 위해서 김 동문이 자리를 같이한 것이다. 잠시나마 사회적 지위를 벗어 던지고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인연을 중시하는 김 동문의 삶의 철학이 그대로 비춰지는 듯했다.

김 동문은 대학교 재학 당시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생운동에 참여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어요.” 5남매 중 장남인 김 동문은 “고등학교 때도 공부만 할 수 없어 생계전선에 뛰어 들었는데 대학교라고 다를 게 없었지요. 학교를 졸업해 하루 빨리 사회에 진출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다들 시위에 나갈 때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며 웃었다.

지금도 취업은 어렵지만 당시에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전하는 김 동문은 취업을 위해 조금 더 집중해서 공부하고 싶었다고 한다. 당시 도서관 분위기는 현재와 달리 조용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現 이순용 동국대 명예교수의 지도 아래 뜻이 맞는 학생들 14명이 모여 ‘경영학연구실’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경영학연구실’은 현재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선후배간 교류의 장이 되고 있다.

현재 경영학과 총동창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 동문은 “선배들이 앞장서서 장학기금을 마련해야 해요. 후배들이 편하고 우수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조성해줘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후배들이 성장할수 있고 이들이 또 다시 후배양성에 힘 쓸 것”이라며 경영학과의 발전을 기대했다.

사우디아라비아 현장 근무
“누구나 그렇겠지만 입사 초기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로 인해 소외받는 기분이 들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더욱 노력했습니다.” 김 동문은 졸업한 75년 10월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건설회사인 만큼 현장 근무가 많아서 힘이 들었지만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중 김 동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현대건설은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3년간 9억 3천 달러의 주바일(Jubail)항만공사를 수주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 1년 예산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주바일 공사에 화약담당을 뽑는 영어시험이 치러졌고 김 동문은 지원자 40명 중 1등으로 통과했다. 그렇게 김 동문의 길고 긴 사우디아라비아 파견 근무가 시작 됐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겪은 황당한 일 중 하나”라고 운을 뗀 김 동문은 “한 번은 화약 2만톤을 세관 통과시키기 위해 공항에 나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사우디 경찰이 자국어를 쓰면서 통과를 막았습니다. 신고한 화약의 양이 실제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온갖 손짓 발짓을 더해 의사를 전달했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결국 근처의 대학교로 가 영어 잘하는 학생을 데려와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경찰이 단순 계산을 잘못 해 생긴 일이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노사관계에 합의점을 찾다
1977년 3월 사우디 공사 현장의 열악한 근로 조건에 불만을 품은 근로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후 김 동문은 회사와 근로자들의 중간자 역할을 맡았다. “근로자들의 모든 입장을 들어줄 수는 없지만 양쪽이 최대한 이익을 누릴 수 있게 어떤 방법이 있을까생각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노동법 책을 공수해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엔 노동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고 많이들 꺼려해 익숙해지기까지 6개월 정도가 힘들었죠 .”라고 말했다. 하지만 근로자들과 같이 생활하다 보니 적성에 맞음을 느꼈다고 한다.

1987년 사우디에 있을 당시 국내에서 현대 자동차와 현대 중공업의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사우디에서 열린 회의에서 김 동문은 현대 건설에서도 노조가 생길 수 있다고 이에 맞춰 대비를 해야 한다고 했으나 무시되었다. 1년 뒤, 한국에서 갑작스런 귀국 지시가 떨어졌다. 김 동문의 생각대로 현대 건설 노조가 결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동문은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형평성에 맞지 않은 퇴직금, 부족한 휴가, 성과에 따른 수당 불이익 등 몇몇 문제가 있었고 이를 노사 사이에서 원만하게 해결하려 노력했다. 그 해 12월에 노사 사이의 문제를 푸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두 거목과 함께한 인연
김 동문은 故정주영 명예회장과 인연이 깊다. “정말 대단한 분이었어요. 불가능도 가능으로 만든 분입니다.” 그렇게 정주영 명예회장을 회상했다. 김 동문은 정 회장의 대선 출마에 힘을 보태기 위해 국민당의 중책을 맡았다. 대선 결과 정 회장은 대통령으로 국민의 부름을 받지 못했으나 총선에서 국민당은 여러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을 배출시켰다. 김 동문의 주도 하에 국민당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치에 기업의 논리를 적용한 일이다. “국회의원 활동비를 법정기준에 따라 지급하지 않고 성과에 따라 배분하는 기업 논리를 적용하기도 했어요.”

또한 이명박 대통령이 현대건설 사장으로 있을 당시 2년간 같이 근무를 했던 일을 회상하며 “이 대통령은 기억력이 남달랐습니다. 반복되는 실수는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기억했어요. 또한 임무가 주어지면 직원들을 잘 이끌어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라고 이 대통령과의 인연을 밝혔다.

성공의 열쇠는 실력과 열정
김 동문은 이후에도 여러 중책을 맡으며 승승장구 해나갔다. 현대 여자 배구, 농구 단장과 현대 건설 총무 이사, 현대아산 개성사업소 총 소장을 역임한 김 동문은 “남들이 꺼려하는 일을 맡은 이상 열심히 해야만 해요. 실력과 열정 두 가지 모두가 충만해야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며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강조했다.

대기업 일반직 사원으로 시작해 실력과 열정으로만 보이지 않는 차별을 이겨낸 김 동문은 남들이 꺼려하던 쉽지 않은 일을 맡을 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다양한 길을 경험할 수 있었고 남들보다 한 발 앞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김 동문의 발걸음이 끝나지 않는다. 김 동문이 가진 행동력과 의지력이 여전하기에 앞으로 그가 어떤 일을 맡아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지 기대가 된다.

이준석 수습기자 stone@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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