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똥ㆍ바슐라의 ‘꿈과 詩學(시학)’의 경우―

  불꽃은 괴로워하는 존재이다. 어두움의 속삭임이 그 고뇌의 深淵(심연)에서 나오고 있다. 치직치직 소리를 내고, 중얼중얼 거리며 흔들리는 苦惱(고뇌)― 아무리 작은 고뇌일지라도 그것은 世界(세계)의 고뇌의 한 標徵(표징)인 것이다. 프란츠ㆍ폰ㆍ바델의 저서를 읽은 적이 있는 夢想家(몽상가)는 그의 촛불의 부르짖음에 축소된 소리를 그리고 약해진 모습의 천둥과 閃光(섬광)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타고 있는 존재의 울림, 으젠느ㆍ수지니가 말한 바에 의하면, 촛불 앞에서 고독하게 축 늘어져 몽상할 때, 사람들은 곧 이 빛나고 있는 生命(생명)이 동시에 아주 미묘하고 섬세하여 표현하기 힘든 말을 하는 생명이어서, 音(음)과 울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몽상가는 여태까지 沈黙(침묵)을 하던 불꽃이 왜 갑자기 呻吟(신음)하고 있는가를 이해하고자 한다. 불안한 마음의 주인들이 個個(개개)의 事物(사물)에 불행을 보편적인 世界(세계)에까지 깔아버리려고 할지도 모르는― 한편 이 다른 편을 압박하고 또는 한편이 다른 편을 종속시키는 것 같은 두 개의 相反(상반)되는 原理(원리)의 接觸(접촉)에서 이루어진다.
  무의미한 것을 극화시키는 몽상가의 생리, 불꽃이 흔들리며 고뇌할 때는 그의 마음에는 피까지 가물거리기 때문인 것이다.

  가스똥ㆍ바슐라르의 세계 속에 생생히 자욱한 ‘꿈’, ‘물과 꿈’, ‘空間(공간)’, ‘촛불’의 詩的(시적)인 상상의 세계 그 속에는 夢想家(몽상가)의 幻像(환상)의 그물과, 회오리바람을 알기 前(전)의 地下水(지하수)처럼 꿈이 서린 處女(처녀)가 살고 있다. 같은 땅에서 한참 불꽃이 튀기는 롤랑ㆍ바르트, 스타로빈스키, 르샤르 對(대) 피까르의 新舊(신구)의 論爭(논쟁)에도 끄덕 없이 이어온 바슐라르의 詩學(시학)이 문제가 아니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그의 ‘촛불의 詩學(시학)’에서 촛불과 夢想家(몽상가)와 이마쥬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꽃에 태워진 言語(언어)의 이마쥬는 心靈(심령)을 태우게 하고, 時(시)의 哲學(철학)이 명확히 해야 할 흥분의 색조를 준다.
  夢想(몽상)의 대상으로서 취해진 불꽃에 따라 가장 냉랭한 隱喩(은유)도 참다운 이마쥬가 되는 것이다. 때때로 은유가 가장 잘 나타내고자 한 다른 표현을 하려는 욕구로부터의 思考(사고)의 바뀜에 지나지 않음에 반하여, 이마쥬는 진실의 이마쥬는 그것이 상상력 속의 原初的(원초적)인 삶일 때 상상된 상상적 세계를 향하여 現實(현실)의 세계를 떠난다.
  詩(시)의 자국을 가지고 있는 불꽃의 이마쥬 속에서 夢想家(몽상가)(詩人(시인))의 이마쥬 發祥(발상)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天使(천사)같은 게으름으로 꿈은 감겨가고 순하고 믿음성 있는 실롯에는, 애무하는 대로 머리카락이 끊임없이 물결친다….”
  “수많은 꽃들 뒤에 푸른 하늘이 숨고/ 나뭇잎과 햇살에 싸인 물레 잦는 아가씨여―”라고 한 쁠ㆍ발레리나 “거기에 때때로 아리땁고 눈부신 하나의 유령/ 번쩍이며 나타나 몸을 뻗치고 펼쳐 보인다/. 꿈꾸는 듯한 東洋的(동양적)인 그 맵시에/ 날 찾아온 美人(미인)을 알아본다.”라고 쟌느, 뒤바르를 幻像(환상)하는 보들레르의 몽상에서 두 사람의 공통된 꿈의 이마쥬를 볼 수 있다. “철부지를 오늘 밤 가엾이 여김은/ 長安(장안)의 아비생각 못하옴이라./ 찬 안갠 자욱이 머릴 적시고/ 달바라 고운 팔이 썰렁하리라./ 언제쯤 빈 휘장에 의지하여서/ 둘의 시름 눈물을 마르게 할꼬. 長安(장안)에서 安祿山(안녹산)의 亂(난)에 갇혀 록州(주)의 妻子(처자)를 그리는 지극한 情(정)은 杜甫(두보)의 東洋的(동양적) 몽상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불꽃은 인간에 있어서만 하나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불꽃의 몽상가가 불꽃을 향해 중얼거린다면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그는 詩人(시인)인 것이다. 세계를, 세계의 운명을 확대시키고, 불꽃의 運命(운명)에 대하여 생각을 집중함으로써 몽상가는 언어를 확대시킨다.
  그는 세계의 美(미)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汎美的(범미적) 表現(표현)에 의해 心靈自體(심령자체)가 확대되고 높아지는 것이다.”라고 바슐라르는 촛불의 시학에서 또 이렇게 적고 있다. 즉 불꽃과 詩(시)의 形成過程(형성과정)을 나타낸 것이다.

  촛불의 美觀(미관)으로서의 立場(입장)을 神秘(신비)의 상태에 있는 이마쥬가 形態化(형태화)하는데 言語(언어)로써 象徵化(상징화) 될 때의 확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을 뒷받침이나 하듯 Jㆍ꼭토는 ‘夢想家(몽상가)는 언제나 약한 詩人(시인)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夢像(몽상)내지 幻像(환상)은 프로이드의 말을 빌리면 科學(과학)이 우리에게 미칠 수 없는 것이 어딘가 다른 곳에서 손에 들어올 수 있는 것처럼 믿는 것을 幻像(환상)이라 하고 있다.
  ‘이 숲이 黃金(황금)과 재로 물든 時刻(시각)에/ 향연이 벌어진다 죽은 잎사귀에서 /에뜨나 山(산)이여! 네 鎔巖(용암)위에 비너스가 찾아와/ 그녀의 순진한 발을 디딜 때/ 슬픈 졸음은 천둥치고, 불길은 꺼진다’라고 한 “半獸神(반수신)의 午後(오후)”에서의 스떼판ㆍ말라르메, ‘놀란 半獸神(반수신)이 두 눈을 빠끔히/ 빨간 꽃들을/ 하얀 이빨로 씹는다./ 오래 묵은 포도주처럼 적갈색인/ 그의 입술은 웃음을 터뜨린다, 나뭇가지 아래서.’ “半獸神(반수신)의 머리”에서의 아르뛰르ㆍ랭보, ‘그리고 물그스름한 색깔로 물든 유리窓(창)이 있고/ 거대한 公園(공원)으로 둘러싸인, 그리고 城(성)의 발목을 적시며/ 꽃 사이로 江(강)이 흐르는 緣石(연석)의 벽돌城(성)을 그리고 검은 눈에 金髮(금발), 옛 의상을 입고서/ 높은 窓門(창문)에 나타난 한 貴婦人(귀부인)’ “환상”에서의 제라드ㆍ드ㆍ네르발 등의 환상은 東洋的(동양적)인 것과는 美觀(미관)의 差(차), 象徵(상징)의 地域的(지역적) 거리 때문에 좀 그로테스크 한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들대로의 아름다움이 구절마다 가득가득하다. 神秘的(신비적)인 데 대한 경향이 짙은 말라르메와 랭보, 아름다운 수채화를 보는 듯한 네르발의 여인의 환상이 언어로 형상화되었다.
  ‘네 잔인한 입이 공중에 뿌리는 것은, /무도한 살인자여/ 그것은 바로 내 머릿골이며/ 내 피와 내 살인 것을!’ ‘그녀가 내 골수를 죄 빨아 먹은 뒤/ 내가 사랑의 입맞춤을 돌려주려고/ 기신없이 그녀를 돌아다보니, 내 눈에 보인 건 오직/ 옆구리가 진득진득한, 고름으로 가득 찬 가죽부대 뿐!’ 라고 괴상망칙한 환상으로 가득 찬 “악의 꽃”의 기형스런 환상이다.
  地獄(지옥)ㆍ머리털ㆍ뱀ㆍ송장ㆍ深淵(심연)ㆍ吸血鬼(흡혈귀)ㆍ고양이ㆍ유령ㆍ부엉이ㆍ虛無(허무)ㆍ恐怖(공포)ㆍ해골ㆍ무덤ㆍ殺人者(살인자)로 일관하는 그의 異常的(이상적) 心理(심리)의 환상은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唐詩(당시)에서 나타나는 李賀(이하)같은 作家(작가)도 안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그의 꿈 속의 붙은 寶石(보석)들은/ 그의 꿈속의 바다 속으로/ 하나하나 떨어져 내리어 가라앉고/ 한 寶石(보석)이 거기 가라앉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한 이별을 갖는다.’라고 한 “님은 주무시고”에서의 宗敎的(종교적) 久遠(구원)의 꿈과 ‘무지개 일곱 빛깔 타고 내려와/ 구름 속에 묻히어 앉아 쉬다가/ 빗방울에 싸여서 山(산)수유에 내리면/ 山(산)수유꽃 피어서 사운거리고,/ 山(산)수유꽃 떨어져 시드시어서/ 구름으로 날아가 또 앉아 쉬다/ 햇빛에 무지개를 타고 오르면/ 구름 없는 하늘에서 다시 살아요.’라고 “내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은”에서 東洋的(동양적) 思想(사상)과 獨特(독특)한 “멋”에 의한 幻像(환상)으로 一貫(일관)하는 徐廷柱(서정주)의 夢像(몽상)이다. 彩虹(채홍)과 山(산)수유와 구름의 幻像(환상)에 의해 韓國的(한국적)인 “멋”이 映像化(영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幻像(환상)의 文學(문학)은 모두 꿈속에 작가의 Animus(Animus, Anima는 칼융의 用語(용어). Animus는 “精神(정신)”이란 意味(의미)로 人間內部(인간내부)의 男性的(남성적) 要素(요소)이고, Anima는 Animus의 女性形(여성형)으로 精神(정신)의 女性的(여성적) 要素(요소).

  바슐라르는 夢像(몽상)을 Anima로 규정하며, 꿈은 Aniamus에 속한다고 하고, Anima를 그의 詩學(시학)에선 강조하고 있음.)가 그곳에 作用(작용)하는 여러 가지 圖式(도식)으로 나타난다. 精神分析學者(정신분석학자)가 꿈에 이마쥬를 연구하는 것은 Animus속에서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마쥬란 二重(이중)의 것으로 항상 그 自身(자신)과는 별도의 뜻을 갖고 있다. “또한 바슐라르는 시의 환상성과 精神(정신)과의 關係(관계)를 이렇게 적고 있다. 그가 이미 밝히고 있듯이 모든 감미롭거나 황홀한 夢像(몽상)은 女性的(여성적)인 면이 짙은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평소 남에게 내놓기를 꺼리던 무엇이라도 나타나게 마련인 것이다.” “자기의 꿈을 쓰려고 하는 者(자)는 도리어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明白(명백)한 純粹(순수)의 알맹이를 追求(추구)하는 시인답게 견해를 달리 말한 뽈ㆍ발레리도 있지만, 이마쥬를 낳게 하는 作家(작가)의 환상은 屬性(속성)이 그렇게 分明(분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의 受容(수용)은 現代繪畵(현대회화)에서 현저하다. 르네상스 때의 부르겔이 있기는 했지만 누보ㆍ포비즘의 샤갈, 메까니즘의 훼르낭ㆍ레제, 큐비즘의 죠르쥬ㆍ브라크, 레알리즘의 모리스ㆍ드블라망크, 쉬르레알리즘의 프랑시스ㆍ피카피아, 한스ㆍ아르프, 키리코, 미로, 에른스트, 살바르도ㆍ달리가 있고, 절대회화의 바실리ㆍ간단스키, 추상회화의 호안ㆍ미로, 쉬프마티즘의 마래ㆍ비치, 프리즘의 삐에르ㆍ쟌느레, 신크로미즘의 모르강ㆍ라셀, 올피즘의 로벨ㆍ드로래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특히 달리의 “기억의 고집” “추억”, 호안미로의 “달밤의 여인과 새” 파울ㆍ쿨리의 “습격 받은 거리”, 피카소의 “게로니카”, 샤갈의 “전쟁” “어두운 太陽(태양)의 거리” 등이 특히 두드러진다. 詩(시)는 그 이마쥬의 生成(생성)에 환상의 受容(수용)이 절대적이다. 그는 思想的(사상적) 標像(표상)도 확대해 들어간다. 그를 바슐라르는 “비범한 이마쥬가 宇宙的(우주적) 가치를 지닐 때 그것은 어지간한 사상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런 사상으로써의 아마쥬, 이마쥬로서의 사상은 문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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