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常(무상)의 法則(법칙)ㆍ緣起(연기)의 原理(원리)는 不變(불변)

  人間(인간)이 이룩해 놓은 이 地上(지상)의 모든 文化現象(문화현상)이 다 그러하듯이, 宗敎(종교) 또한 人間(인간)의 産物(산물)이므로 人間(인간)에 의해, 그 必要(필요)에 응해 이루어진 것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즉 宗敎(종교)는 人間(인간)이 人間(인간)의 이익을 위하여 形成(형성)시킨 것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人間(인간)을 떠나서는 存在(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人間(인간)은 宗敎(종교)라는 테두리에 갇혀 自身(자신)의 인간을 송두리째 포기하고 즐겨 神(신)의 노예를 자처하려는 현상들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宗敎(종교)라는 이름도 오히려 神(신)을 위한, 神(신)을 떠받드는, 神(신)의 노예들의 모임이라는 代名詞(대명사)로 낙착이 되어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神(신)만을 위하기에 人間不在(인간부재)의 상태가 되고만 것이 宗敎(종교)인 것 같다. 하지만 神(신)을 위하는 그 자가 누구이며, 스스로의 人間(인간)을 포기한 그가 누구인가. 그것도 결국은 人間(인간) 스스로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고 神(신)의 노예가 된 것이 아닌가. 人間(인간)이 自我(자아)를 스스로 포기하고 神(신)의 노예가 된 편이 행복하다고 한다면 그건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밝은 태양이 싫어서 캄캄한 밤을 찾는 사람도 그 성격 나름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宗敎(종교)가 모두 그렇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그래서야 어찌 人間(인간)이 이룩한 宗敎(종교)일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또다시 佛誕節(불탄절)을 맞는다. 이 부처님 탄신 날이 큰 意義(의의)를 지니고, 人類(인류) 영원의 횃불로 언제나 꺼지지 않고 빛을 내뿜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人間(인간)에게 잃어버린 自我(자아)와 포기해 버린 스스로와 미처 몰랐던 삶의 高貴(고귀)한 값과 人間(인간)의 尊嚴性(존엄성)을 되찾아 주신 거룩한 빛인 것이다.

  부처님이 태어나실 당시의 印度(인도)는 철저한 계급의 社會(사회)였고, 바라문敎(교)라는 宗敎(종교)가 人間(인간)을 神(신)의 노예로 만들어 酷使(혹사)하던 어두운 時代(시대)였었다. 그야말로 오늘날 우리들이 상상도 못할, 사람 머리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발밑에 사람 있는 지독한 四姓(사성)계급제도였다.
  그러한 때의 宗敎人(종교인)들은 解脫(해탈)하려는 목적으로 산목숨을 죽여 神殿(신전)에 희생으로 바쳤고, 禪定(선정)과 苦行(고행)이라는 實踐方法(실천방법)으로 自身(자신)을 죽이는 연습을 일삼았다. 이러한 때에 태어났던 카필라국의 한 太子(태자)도 人生(인생) 최대의 해탈에 뜻을 두고 스스로 王宮(왕궁)을 떠나 이와 같은 修道生活(수도생활)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들의 解脫(해탈)이란 것이 죽지 않으면 이룰 수 없고 修道(수도)란 것은 죽음을 연습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체험한 그는 그 세계를 뛰쳐나와 버렸던 것이다.
  그날 太子(태자)가 苦行林(고행림)을 벗어나 강물에 無知(무지)의 때를 씻고 나무 그늘에 앉아서 다시 찾기 시작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자기는 神(신)의 노예도 아니고 祭物(제물)도 아닌, 오직 참된 삶을 누릴 의무와 권리가 있는 한 사람의 人間(인간)이었던 것이다. 人間(인간)으로 되돌아 와서 스스로를 바로 보고 宇宙(우주)의 생명을 참되게 알아서 自主的(자주적)이고 自律的(자율적)인 無限(무한)한 幸福(행복)과 영원한 삶의 人間(인간)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그늘을 주었던 그 나무를 菩堤樹(보제수)라 하였으니, 그것은 人間勝利(인간승리)의 記念樹(기념수)라는 뜻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人間(인간)을 되찾아 自律(자율) 自主(자주)의 人間(인간)이 되었으므로 그 마음 씀씀이는 결코 人間(인간)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人間(인간)은 삶의 존재이기 때문에 숭고한 생명의 존엄성을 향유할 권리가 있으므로, 남을 존경하고 서로 도와야 하며 또 人間(인간)외의 다른 생명들도 귀하게 대우해 줄 아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慈悲(자비)가 온 우주의 모든 생명에게 골고루 미쳐져 있어서 人間(인간)을 초월해 있다고들 하지만, 결코 人間(인간)을 떠난 人間(인간)이 不在(부재)하는 그런 초월은 아닌 것이다. 어디까지나 人間(인간)이요 人間爲主(인간위주)이기 때문에 人間(인간)은 모두가 平等(평등)하고 和合(화합)해야 하며 生存(생존)의 高貴(고귀)함과 슬기로움을 갖고 있으므로, 더 나아가서 人間(인간)이외의 모든 動植物(동식물)의 생명까지도 값지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人間(인간)이 無知(무지)의 노예가 되고 利己主義(이기주의) (貪진痴(탐진치))의 포로가 되어, 나는 남 속에 있는 나이며 남을 떠난 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를 위한다는 짓이 남은 고사하고 자신까지도 망치고 마는 人間(인간)이라면 결국 짐승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하는 것이다.

  50年(년)가까운 세월을 한 결 같이 일깨우고 바로잡아 주셨던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람답게 사는 人間(인간)이 되어라’는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人間(인간)다운 人間(인간)이 되어 산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平和(평화)롭고 행복하겠는가. 무조건 人間(인간)답게 살아라고만 강요하고 주장하였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왜 人間(인간)답게 살아야 하며 어떤 것이 인간다운 삶인가 하는 것을 부처님은 가르친 것이었다. 人間(인간)답게 사는 것은 神(신)에 의하여서도 아니고 남의 힘에 의하여서도 아니며 機械(기계)에 의하여서도 아닌 오직 人間(인간) 스스로에 의하여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탄생에서 보여주는 ‘天上天下(천상천하) 唯我獨尊(유아독존)’이라는 말도, 人間勝利(인간승리)의 實現者(실현자)요 人間眞實(인간진실)의 發見者(발견자)이며 無限生命(무한생명)의 實證(실증) 讚美者(찬미자)인 世尊(세존)의 거룩한 생애를 상징한 소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부처님의 人間主義(인간주의)는 절대적인 座標(좌표)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방대한 經典(경전)으로 수록되어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가 人間(인간)을 위한 가르침일 뿐이다.
  神(신)이나 無知(무지)나 利己心(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를 잃어버린 人間(인간)이 되어도 좋다는 가르침은 있을 수가 없다. 經典(경전)마다 끝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은 大衆(대중)들이 모두 歡喜奉行(환희봉행)하였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부처님의 참 人間(인간)이 되라는 說法(설법)에서 모두가 힘을 얻고 삶의 歡喜(환희)를 만끽하였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리어 人間(인간)의 올바른 길은 멀고 어렵게 보이는 지도 모른다. 참다운 人間完成(인간완성)이 쉬운 것이라면 人類社會(인류사회)는 이처럼 복잡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복잡하고 미묘하기 때문에 人間(인간)들은 자신의 선 자리를 모르고 허우적거리며 헤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自己(자기)의 알맹이는 잊어버리고 껍질만을 진짜 自己(자기)인줄 믿고 죽어라 매달려 있는가 하면, 자기 집은 어디 있는지 모르고 남의 처마 밑을 기웃거리는 迷兒(미아)인 경우가 대부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때는 도깨비굴을 찾고 어떤 때는 은행금고의 지폐뭉치를 갉아먹는 좀벌레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은 손오공이 될 수 는 없다. 장이 설 때마다 자리를 옮기는 장꾼이라도 인간은 人間(인간)다워 지려고 한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선 자리를 똑바로 알고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잘 분간하기만 한다면 좀 더 보람 있는 人間(인간)은 形成(형성)되어질 것이다.
  세상의 모든 事物(사물)은 다 변천하는 것이며 그 변화는 반드시 그럴 수 있는 條件(조건)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조건 따라 人間(인간)도 변해지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러한 無常(무상)의 規則(규칙)이나 緣起(연기)의 原理(원리)만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처럼, 人間(인간)이 삶의 존재라는 것만은 언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산다는 조건 때문에 생활이 기계화하고 성격도 복잡해져서 人間(인간)을 亡失(망실)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人間(인간)은 人間(인간)이기에 찾을 가능성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모든 사람에게 佛性(불성)이 있고 人間(인간)은 모두가 平等(평등)하다고 하였던 모양이다. 복잡하고 살벌한 세상일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자비의 따사로운 마음을 불어넣어준다면 메말랐던 가슴 가슴마다에 인정의 불꽃들은 피어나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사는 오늘의 人間(인간)관계에 있어서 뚜렷한 座標(좌표)로 삼을 것은 자비라고 본다. 자비는 차별적인 박애정신이 아니고 절대 平等(평등)의 사랑이다. 내가 優越(우월)하기 때문에 同情(동정)하고 救濟(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몸과 같으므로 남이라는 생각을 두지 않고 행할 따름이다. 여기에는 神(신)과 人間(인간)과의 從屬(종속)관계도 없고 不信(불신)과 기계에 짓눌릴 人間(인간)도 없이 오직 능률과 活力(활력)있는 人間(인간)의 참세계가 있을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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