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정상적인 얘기’를 해보자. 이 분요한 시간에. 한 季節(계절)이 비에 젖는다. 新綠(신록)의 푸르름에도, 거리에도, 陸橋(육교)위에도 그리고 南山(남산)에도.
  日記(일기)를 쓰는, 全身(전신)으로 紀錄(기록)하는 한 日程標(일정표) 위를 行動(행동)으로 메우고픈 날. 비가 온다. ‘아뽈리네르’의 19世紀的(세기적)의 憂愁(우수)가 달려온다. 그리하여 안쓰러운 것들. 정말이지 난 이렇게 초라한 얼굴로 비를 받아들어야 하나. 그 하늘의 체온을. 지워지지 않는 어떤 思念(사념)속에서.
  來日(내일)을 생각하고 흐뭇하던 날이 있어 난 부끄러워하리라. 한없이 몰두 하고픈 날이 있어 焦燥(초조)를 연습하리라. 이따금이라도 밀린 答狀(답상)이나 쓰면서.
  수시로 만나는 ‘보들레르’.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 받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취하여라! 술이건, 詩(시)건, 또는 德(덕)이건, 무엇에고 그대 좋도록”
  움츠리는 모습으로 비속에 서성거린다. 말(言語(언어))을 잃고, 멍청한 時節(시절)을 잊고 東岳(동악)에 서자.
  진한 커피라도 마시면서 광란의 ‘팝송’을 들어본다.
  그렇지만 太宰治(태재치) 얘길 들으려면 ‘로코코’의 분위기가 좋을 거야.
  知性(지성)과 女性(여성)의 함수관계 같은 <쌍소리>는 접어두고, 그냥 비나 맞아 버릴까. ‘젊음을 앓다’라고 써본다. 역시 어설프다. 피곤하다. 그냥 비만 내린다. ‘웃는 연습’이라고 써본다. 비만 내린다. 내리는 것이 아니라 스며든다. 숨 쉬는 것이 부담을 주는 순간, 이 순간들에게. 나의 깊은 부끄러움에.
  지나온 벌판을 이젠 잊자. 지금 새로운 영역에서 매진하는 나를 만나자.
  견디던 날에서 生活(생활)하는 나를 맞이하자. 참으로 건강스런 얘기를 해보자.
  비 온다.
  어떤 傳說(전설)이 내려온다
  비 오다.
  어제의 모든 單色板書(단색판서)를 걷어 내리고 비가 내린다. 새로운 시간도 오라. 열심히 호흡도 하며 굳건히 서리라. 어떤 무대도 생각하며.
  브라디밀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암, 가지’
(두 사람 움직이며 않는다)
  -幕(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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