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사라진 갠지즈 강가엔 이름모를 의식만이 계속되고 …

보드가야에서 장장 6시간 버스를 타고 달려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혜초 스님도 갠지스강을 따라 파라날사국, 즉 지금의 바라나시를 다녀갔다. 혜초스님은 이렇게 적고 있다.
 
“어느 날 피라닐사국(彼羅痆斯國,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이 나라 역시 황폐화되었다. 왕도 없다. 구륜(俱輪) 등 다섯 비구의 소상(塑像)이 탑 안에 있는 것을 보았다. 당간(幢竿) 위에 사자상(師子像)이 있다. 당간은 매우 화려하다. 다섯 사람이 함께 안을 다섯 아름 정도 되지만 새겨진 문양이 섬세하다. 탑을 세울 때 당간도 함께 만들었다. 절 이름은 달마작갈라(達磨斫葛羅)이다. 여기도 외도들이 있다. 옷을 입지 않고 몸에 재를 바른다. 대천(大天)을 섬기는 이들이다.”

日 至彼羅痆斯國 此國亦廢 無王 卽〈六〉〔缺, 約十三字〕 彼五俱輪見素形像在於塔中 〔缺, 約十五字〕 上有師子 彼幢極? 五人合抱 文里細 〔缺, 約十三字〕塔時 幷造此幢 寺名達磨斫葛羅〈僧〉〔缺, 約十二字〕外道不着衣服 身上塗灰事於大天

혜초스님이 남긴 다섯 비구의 소상이라는 말로 봤을 때 바라나시 북쪽의 유적지 사르나트를 찾아간 것 같다. 붓다가 탄생한 룸비니와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 그리고 입열반에 드신 쿠시나가르와 더불어 불교 4대 성지로 손꼽히는 사르나트.

이른 아침에 찾았던 탓일까. 도착하자 한산함이 느껴졌다. 수행 중이던 몇몇 수행자를 제외하고는 찾는 이를 보기가 어려웠다. 사슴정원의 전설이 내려오는 이곳은 녹야원이라고도 부르는데 붓다의 다섯 제자들이 수행하던 곳이다.

초전법륜의 고향에는 외도의 모습만이

고행만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아님을 터득한 붓다가 자신의 지혜를 나누고자 사르나트의 다섯 제자를 찾아갔었다. 그리고 그 다섯 제자들에게 이곳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펼쳤다. 사르나트의 상징 다메크 스투파, 붓다가 다섯 제자들에게 행한 첫 설법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6세기 유적으로 혜초 스님도 이 탑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3세기에 새겨진 아쇼카 석주는 지금은 대부분이 파괴돼 하단만 남아있었다. 8세기 혜초 스님이 봤다는 석주 위의 사자상은 사르나트 박물관에 소장돼있었다.

첫 설법지인 사르나트. 이곳에 사는 현지인들은 80%이상이 힌두교이다. 그 때문인지 현지인들의 발길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사르나트 유적지 보안을 담당하고 있는 비루(31)씨는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처의 자취를 찾는 수행자이거나, 외국인이다”며 “현지인들은 드물다”고 말했다. 스리랑카에서 온 소다마자르(28)스님. 그는 사르나트 다메크 탑을 바라보며 부처의 설법을 느끼고 있었다. 소다마자르 스님은 “부처님의 영광을 확인하러 왔지만, 현재 이곳은 불교가 많이 쇠락해 씁쓸한 심정이다”고 말했다.
8C 이곳을 찾은 혜초스님의 심정도 이러했을까?

혜초스님의 눈에 비친 중천축의 불교는 이미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당시 혜초스님은 바라나시에 도착해서는 ‘이교도들은 옷을 입지 않고 몸에 재를 바르며 힌두신을 섬긴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당시 바라나시의 이교도들에 대한 기록이다. 사르나트를 돌아서는 취재단의 발걸음도 무거웠다.

갠지즈강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종교

인도의 ‘젖줄’이라 표현되는 갠지스강. 릭샤를 타고 수많은 인파와 차들, 소, 염소들이 북적이는 바라나시의 시장을 지나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인도사람들에게 갠지스강은 또 하나의 종교라고 볼 수 있다. 이곳은 힌두교의 성지일 뿐 아니라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 등 다양한 종교인들에게 의미있는 곳이기도 하다.

불교도에게는 부처님의 사리가 담겨진 ‘신성한 물’이라고 여겨진다. 1794년 바라나시 지방장관 ‘쟈갓 싱’이 자신의 저택을 짓기 위해 부처님의 사리탑인 ‘다르마라지카’ 탑을 헐어 벽돌을 채취하던 중 알 수 없는 고대 문자가 새겨진 상자를 발견했다.

자갓 싱은 상자에 쓰인 문자를 해독하지 못했지만 사리함과 안에 들어있던 대리석으로 만든 사리호에는 관심이 있어서 사리병에 담긴 내용물을 갠지스강에 버리고 사리함과 사리병으로 보관했다. 그 후 조사와 연구 끝에 갠지스강에 버린 내용물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그 후로 많은 불교도들은 갠스강을 찾아 부처의 자취를 좇고 갠지스강물을 담아가기도 한다.

흐르는 강물위로 신들의 축제가

취재단이 이곳을 찾은 지난 7월  15일. 이날은 힌두교의 ‘시바 축제’가 있는 날이었다. 많은 힌두교인들로 갠지스강 주변을 물론 바라나시 시장 전체가 발 딛을 틈이 없었다. 갠지스강은 힌두교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갠지스강이 힌두교 신 ‘시바’의 머리에서 나오는 신성한 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지난 7월 14일부터 열린 ‘시바 축제’에서 많은 힌두교인들은 갠지스강에 목욕하고, 기도하며 축제를 즐겼다. 저녁 7시가 되자 시바축제의 본격적인 막이 올랐다. 강가 전체가 주황색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 중 시바신에게 기도드리기 위해 아젬가르에서 장장 1020km를 걸어 갠지스강까지 왔다는 18살 인도 소년 로션. 그에게 갠지스강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를 보고 있자니 갠지스강은 인도인들에게 또 하나의 신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2500년전 붓다가 이곳에서 전파하려던 가르침이 이대로 잊혀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씁쓸함을 느꼈다. 갠지스강을 사이에 놓고 힌두교, 불교, 시크교 등 여러 종교가 나뉜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교와 신들 속에서 살아가는 인도인들. 수많은 신들 중 어떤 신을 믿든 간에 힌두교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힌두교의 최고 성지인 바라나시에서 삶을 마감하는 것. 신들이 인간의 땅을 잘 찾아올 수 있도록 불길을 밝혀 신들을 위한 축제를 펼친다.

2500년전, 35세의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한달음에 달려와 첫 설법을 펼쳤던 피라날사국. 8C 혜초 스님이 이곳을 들렀을 때도 불교는 이미 힌두교에 흡수된 상태였다. 취재단이 찾은 지금의 인도에서도 불교를 믿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델리대학 불교학과 싸판드라 꼬마르 반디(50)교수는 “불교는 힌두교와의 교리적 유사성과 더불어 이슬람교의 침입으로 인도에서 갖는 영향력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설명했다.
불교의 발생지 인도.

그곳은 이제 불교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뿌리 깊은 카스트제도 속에서 인간의 평등함을 주장했던 붓다의 가르침. 그 가르침은 더 이상 인도에서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일까.

화장터에서 본 삶과 죽음의 경계

다음날 새벽 4시 반,  갠지스강으로 향하는 바라나시 시장은 일출과 함께 시바 신을 맞이하기 위해 강변으로 향하는 행렬이 장관을 이뤘다. 그들은 갠지스강에 몸을 담그며 시바 신의 생명력을 받고 그 강가에서 죽은 자를 불태워 시바 신의 곁으로 떠나보낸다.

인도인들에게 갠지스강은 종교인 동시에 생활터전이고,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이별의 장소이기도 하다. 갠지스강에는 기쁨, 슬픔, 사랑, 믿음이 모두 녹아있다. 마치 우리의 삶처럼. 우리의 삶과 닮은 갠지스강에는 100여개의 가트가 존재한다. 가트란 '성스러운 곳'이란 뜻으로 계단으로 이뤄진 선착장을 이르는 말이다.

선착장이라고 해봐야 말 그대로 계단뿐이다. 강변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하나의 가트인지 구분하기도 모호하다. 그 중에는 빨래하는 가트도 있고, 목욕하는 가트도 있고, 화장을 하는 가트도 있다. 그 중에 2개의 가트에서 화장이 행해진다. 그들이 이곳에서 화장을 하는 이유는 죽은 이가 윤회의 굴레를 끊고 좋은 곳으로 떠날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갠지스강에서 배를 타고 20분정도 가면 화장터를 볼 수 있다. 취재단이 화장터에 방문한 이른 이침에도 화장은 진행되고 있었다. 한 주검이 불에 타고 있다. 살이 타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그 안에 기름이 함께 흘러 나온다. 뿌연 연기가 하늘로 날아가고 있다. 살과 근육이 다 타들어가자 뼈가 나온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의 형체는 없어져간다. 가족들은 나머지 뼈를 조각내서 갠지스강에 떠내려 보낸다.
사람이 죽어서 하얀 뼈만 내놓기까지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허무했다.

수십 년을 이 세상에 살아왔던 사람이 반나절도 되기 전에 하얀 뼈가루로 남겨진 다는 것이. 산 자들이 주검을 응시하는 동안에도 갠지스강는 무심히 흐른다. 끝없이 생성과 소멸의 윤회를 거듭하는 갠지스강. 강은 오늘도 숱한 자식들의 주검을 그렇게 받아 안고 있다. 주검을 에워싼 불꽃들과 자욱한 연기는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갠지스강을 두고 삶과 죽음의 관계가 미끄러지고 있다. 한 쪽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다. 더 이상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또 한쪽에서는 목욕을 하며 신에게 기도한다. 좀 더 잘 살게 해달라고.

혜초스님 길따라 길은 이어지고

 갠지스강은 삶과 죽음의 경계이자 동시에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다. 인도인들은 어머니의 강, 갠지스강으로부터 나와 갠지스강으로 돌아간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다. 자연으로부터 나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화장터 광경을 보고 있자니, 티베트의 속담 하나가 떠올랐다. 내일과 다음 생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어제의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내일과 다음 생으로의 엇갈림을.
내가 지금 걷는 이유는 내일과 다음 생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올 것이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혜초 스님도 이곳을 지났다. 내일과 다음 생의 사이에서 놓쳐서는 안 될 무엇이 혜초 스님을 이곳으로 이끌었을까. 아니 무엇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을까. 눈물겨운 길을 걸어갔을 혜초스님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나에게 묻고 있었다.

이지연 기자 ljy88918@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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