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의 역사
2004년 16대 국회는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건을 자행했다.

이 사태를 두고 당시 미국의 ‘믿을만한’ 신문은 ‘정치적 상식(political commonsense)에 어긋나는 정치적 접근’이라고 논평한 바 있다.

미국의 시각에서 나온 압축적인 상황정리였다. 다행히 민의는 다음 총선에서 탄핵의 당사자들을 ‘응징’했다. 이렇게 보면 민주주의는 분명 대중의 정서적 공감과 이해의 공유라는 기반에서 전개된다. 이는 여론이라는 형식으로 살아 꿈틀거린다.

그러할진대 ‘상식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는 포퓰리즘(populism)에 빠진 것’이라고 감히 주장한다면?

최근 우연히 필자의 손에 잡힌 신간이 바로 ‘상식의 역사’이다. 원제가 ‘상식-정치사’이듯이, 정치사 방면의 연구서이다.

저자의 입장을 요약하자면, “상식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기둥 중 하나로 남아 있는 포퓰리즘의 인식적 토대이며 또 포퓰리즘을 정당화하는 바탕이 되어주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민주주의의 영원한 위협의 하나이다.”

이러한 주장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현명한 독자라면 저자의 역사관이 18세기 영국의 버크(Edmund Burke)의 프랑스혁명에 대한 태도와 동일선 상에 있음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혹은 현대판 ‘엘리트 정치론’의 많은 아류들 중의 하나로 분류될 법하다.

이 책에서 서술의 수렴 지점은 서구 근대 민주주의 이념이 형성되는 18-19세기 시대공간이다.

저자는 ‘보통 사람들의 세계 인식’에서 출발한 거대한 흐름이 ‘상식 공화국’을 건설하게 되는 18세기 지점, 즉 서구 공화정의 체제 수립 이면에 어떻게 포퓰리즘이라는 ‘저열하고 통속적인’ 결과가 초래하는지에 관심이 있다. 비록 저자가 오늘날 미국의 극우 보수주의 흐름인 티파티(tea party)도 포퓰리즘의 범주에 속한다고 규정하면서 일종의 ‘중도적 센스’도 보이지만, 그의 위태로운 정치관은 여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비판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어원상 공통감(sensus communis)인 상식은 앎의 초보적인 단계인 감각능력과 관련이 있다. 다소 소박해 보이는 이 용어는 철학에서도 분명한 자리를 갖고 있다.

흄(D. Hume)의 극단적인 회의론에 지친 영국 철학자들이 상식적 앎의 질서에서 모든 철학함의 출발로 삼자고 주장한 것이 그 정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즈음 독일 철학자 칸트(I. Kant)도 ‘판단력비판’에서, 모든 인간이 체험하는 취미판단의 바탕에 동일한 감정상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고전적인 용어인 공통감을 그 근거로 삼았다.

당시 칸트에게도 프랑스 혁명은 충격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혁명을 ‘인간이성의 승리’로 평가하면서, 동시에 혁명의 과정에서 수반되는 부작용을 인간 이성의 한계, 즉 이율배반 개념으로 이해했다.

여기서 저자가 칸트를 반(反)혁명론자 내지 상식의 파괴자로 해석한 것에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오늘날에도 그러하지만, 대중의 선택이 언제나 옳지만은 않았다. 그렇지만 보편선거 이외에 대안은 없다.
오히려 남과 똑같이 한 표만 행사한다고 투덜대는 윤똑똑이를 비판해야 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기득권 엘리트를 감시하는 것이 지금으로선 더 급선무이다.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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