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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깨달은 자리 도착한 혜초스님 눈에는 눈물이 …한국 최초의 세계인 혜초스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② 불교의 중심지였던 왕사성, 날란다 대학, 보드가야
  • 최진아/이지연
  • 승인 2011.09.05
  • 호수 1513
  • 댓글 0

 

   
 
  혜초원정대 취재단의 이동경로  
 

붓다가 태어날 무렵, 인도에는 소왕국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붓다가 태어난 카필라 왕국도 그 중 하나였다. 그곳으로부터 동쪽으로 수백 km 떨어진 곳에는, 당시 인도에서 가장 강성했다는 마가다 왕국이 있었다. 마가다 왕국은 현재 인도의 파트나와 보드가야 지역을 아우르는 큰 왕국이었다.

 

구법승들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날란다 대학의 유적. 전성기에는 1만 명이 넘는 학생과 1천여명이 넘는 교수가 배움의 길을 이어 나갔다고 한다.  
 

현재 파트나와 보드가야 지역은 인도 사회의 중심부는 아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인도의 중심이었다. 특히 마가다 왕국의 수도인 라즈기르는 인도 내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라즈기르는 왕사성(王舍城)이라고도 불리는데, 초기 불교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붓다 생전에 붓다의 가르침이 가장 활발하게 전해진 곳이기도 하다.

5세기 경, 라즈기르와 멀지 않은 곳에 불교 대학이 생겼다. 세계 최고(最古)이자 최대의 불교대학인 날란다 대학이 그것이다. 날란다 대학은 라즈기르에서 약 13km 떨어져 있는데 차로 30분 거리다. 12세기 이슬람에 의해 파괴되기 전까지 날란다 대학은 불교 학문의 중심지였다.

동시에 세계 최대의 종합대학이었다. 날란다 대학의 전성기 때에는 만 명에 가까운 학생들과 천 명이 넘는 교수진이 있었다고 한다. 수치상으로만 봤을 때, 교수 1인 당 10명의 학생들을 맡았던 셈이다. 당시 날란다 대학의 교육여건이 지금의 대학들과 비교해 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법승들이 인도로 떠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날란다 대학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입학이 쉽지 않았다. 당나라 현장 스님이 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따르면, 유학하러 온 10명 중 7~8명은 입학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입학하기 어려운 날란다 대학에 신라의 스님들이 있었다.

신라의 구법승 혜업(慧業) 스님과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스님이다. 혜초(慧超) 스님도 수학(修學)했다고 전해지지만 안타깝게도 혜초가 남긴 ‘왕오천축국전’ 어디에도 날란다 대학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현재 날란다 대학은 과거의 위용을 찾아보기 어렵다. 드넓은 평지 군데군데 붉은 벽돌의 건물터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남아있는 불교 유적 중 가장 거대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반 이상의 형체가 남아있는 제3스투파는 과거 날란다 대학의 크기를 짐작하게 했다. 아무리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평지가 계속됐다. 뜨거운 태양을 피할만한 나무 그늘조차 찾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1500여 년 전 세워진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학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100여 명이 함께 수업을 들었다는 강의실. 교수가 서있어야 할 것만 같은 교탁. 수백 명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다는 식당. 2개의 침대가 놓여진 2인 1실 기숙사까지. 대학의 모습 그 자체였다. 불상이 남아 있는 강당 터에서는 그대로 앉아 ‘자아와 명상’ 수업을 들어야 할 것만 같았다.

파괴되기 전, 날란다 대학이 어떤 형태와 구조를 가지고 있었을 지는 구법승들이 남긴 여행기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당나라 의정(義淨) 스님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절의 형태는 직사각형이고, 지붕은 성(城)과 같이 네 모서리 처마가 직선이다. 건물 둘레는 긴 회랑으로 이어져 있다. 방들은 모두 벽돌로 되었으며, 대들보 위에 판자를 가로로 깔았다. 서까래를 쓰지 않고 벽돌을 평행으로 놓아 그 위를 걸을 수 있게 했다. 절은 모두 일직선으로 돼 마음대로 돌아 자기 방으로 갈 수 있다. 승방의 뒷벽은 바깥으로 면해 있고, 각 방의 넓이는 사방 1장이다. 방의 뒷면에 창이 설치됐으며, 창문은 처마와 접하고 있다. 방의 입구는 제법 높으며, 열린 상태로 문이 달려 있어 출입이 자유롭다. 모든 방들이 서로 바라볼 수 있는 형태며, 발(簾)을 걸지 못하게 했다.”

지지부진한 날란다 대학 복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고, 가장 컸던 불교대학 날란다 대학의 입구. 현재는 유적만이 남아 있으나 복원운동이 이뤄지고 있다.  
 
최근 들어 인도정부가 불교성지 개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불교 발상지라는 이점을 활용해 다른 불교 국가로 분산되고 있는 성지 순례자를 다시 인도로 불러 모으겠다는 것이다.
특히 인도 정부는 신 날란다 사원을 중심으로 날란다 대학 복원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취재단이 방문한 신 날란다 대학은 관리인조차 찾아보기 힘든 상태였다. 신 날란다 대학임을 밝히는 건물 하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인도 정부가 최근 불교에 대해 관심을 쏟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었다.
취재단이 불교 성지를 방문하는 내내, 그곳으로 견학을 온 인도 학생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주정부에서 불교 성지 견학비용을 지원해줬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학생들을 데리고 날란다 대학 터에 온 한 교사는 “학생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불교를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라며 “이 기회를 통해 학생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모노리프트의 역설, 라즈기르

   
 
     
 
붓다 당시에 가장 많은 사상가들과 수행자들이 모여들었던 마가다의 수도 라즈기르. 이곳은 오늘도 불교 순례자들과 자이나교 순례자, 온천에 모여든 힌두교인들의 번잡함이 이어지고 있었다. 고행자의 모습으로 왕사성을 지나던 부처의 모습, 빔비사라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 모습 등등 모든 것에 부처님의 체취가 느껴졌다. 이러한 부처님의 체취를 찾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현재 많은 사람들은 라즈기르를 찾고 있다.

그 중 영축산은 부처가 마하가섭존자에게 이심전심의 마음법을 부촉한 유명한 법화경을 설법지로 알려져 있다. 많은 이들이 깨달음의 형상을 찾기위해 찾는 영축산. 우리가 영축산을 찾았던 그날도 어김없이 많은 이들이 영축산을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영축산을 직접 오르는 이보다 모노리프트를 타고 영축산으로 향하는 이가 더 많았다. 1952년 성지순례를 최초로 시작한 일본이 관광객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설치한 모노리프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찾은 이곳에 모노리프트가 설치됨으로써 수행의 일환인 걷기, 오르기 등을 도외시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씁쓸한 현실이었지만, 많은 이들이 영축산에 접근할 수 있는 모노리프트를 탓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모노리프트가 주는 편안한 유혹을 뿌리치고 영축산을 오르는 인도인 싱(59)씨. 그는 “부처님과 같이 훌륭한 분처럼 영축산을 걸어 올라가며 내면을 고찰해보고 깨달음을 얻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혜초스님이 소원했던 곳, 보드가야

라지기르에서 버스를 타고 3시간 쯤 곡예질주를 했을까.
우리는 깨달음의 땅, 보드가야에 도착했다. 보드가야의 유래는 ‘가야’라는 지역 명칭에 깨달음이라는 뜻을 가진 ‘보드’가 앞에 붙어 만들어진 것이다. 부처가 이 곳에서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든 이후에도 ‘보드가야’라는 지역 명칭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부처는 종교에 관계없이 인도인들에게 ‘존경받는 분’인 것 같았다. 고행에 지친 육신을 이끌고 네란자라강을 지나 마침내 보드가야에서 대자유인의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 이곳 보드가야는 부처의 깨달음을 생각하며 순례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옛날 혜초스님과 많은 구법승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발걸음은 마하보디 대사원으로 향했다.

마하보디사원은 서기전 3세기에 아소까 황제에 의해 처음 건립됐다. 보리수 아래 있는 부처가 깨달음을 성취한 자리인 ‘금강좌’ 위에 건립된 것이라 전해진다.
마하보디 대사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을 벗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신발을 무료대여소에 맡긴 후 맨발로 돌계단을 밟는 순간 전해지는 뜨거움. 걸으면 걸을수록 느껴지는 따가움. 맨발로 걷는 낯섦. 이 모든 감각이 함께 전해졌다. 이보다 더 험한 길을 맨발로 수행했을 부처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사원 안으로 들어가자 스님 6분이 불상 앞에 앉아 수행을 하고 있었다. 인도의 오후 3시, 40도가 넘는 열기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수행하고 있는 스님들을 보자 문득 혜초스님의 모습이 겹쳐졌다. 신라시대 이곳을 찾았던 혜초스님의 모습도 이러했을까?

마하보디대탑 뒤 보리수 앞에 앉아 수행 중이던 미국인 힌두교 수행자 제임스(41)씨. 힌두교와 다른 깨다달음을 얻고 싶어 왔다는 그는 “부처님의 자기 수양을 통한 깨달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감격을 표현했다.
마하보디 대사원은 한 변이 45미터인 정사각형의 기단 위에 법당으로 사용되는 건물이 있고, 그 위에 한 변이 15미터인 정사각형의 하단부를 가진 피라미드형의 탑이 세워져 있는데 지면으로부터 55미터의 높이로 조성돼 있다. 외부에는 감실모양의 칸이 있고 그 안에 불상과 보살상이 부라조돼 있다. 전체적인 모양은 힌두교의 사원양식처럼 가운데를 가장 높이 탑형식으로 쌓고, 네 모퉁이에도 탑 형식으로 낮게 쌓여져있었다. 이러한 마하보디 대사원을 본 혜초스님은 감격스러움을 왕오천축국전에 남겼다.

급기야 마하보리사에 도착하고나니 내 본래의 소원에 맞는지라 무척 기뻤다. 내 이러한 뜻을 대충 오언시로 엮어본다

보리수가 멀다고 걱정 않는데
어찌 녹야원이 그리 멀다 하리오
가파른 길 험하다고만 근심할 뿐
업연의 바람 몰아쳐도 개의찮네.
여덟 탑을 친견하기란 시로 어려운데,
오랜 세월을 겪어 어지러이 타버렸으니
어찌 뵈려는 소원 이루어지겠는가.
하지만 바로 이 아침 내 눈으로 보았노라.

不慮菩提遠     焉將鹿苑遙
只愁懸路險     非意業風飄
八塔誠難見     參差經劫燒
何其人願滿     目覩在今朝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마하보디 대사원에서 혜초스님은 감격을,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수행자들은 붓다에 대한 존경을 느꼈다. 포르투칼에서 온 청년 프랜시스구(20)은 “부처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도록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며 “나를 더욱더 발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족 중 유일한 불교도라는 인도인 낙칸바바(55)씨는 “이곳에서 부처의 깨달음을 느끼고 나면 시끄럽던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처음부터 브라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수행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 붓다. 카스트제도가 깊이 뿌리박힌 이곳, 인도에서 붓다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인 셈이다.

최진아/이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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