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타이에 대하여 글을 쓸까하니 한 가지 생각나는 일이 있다. 美國(미국)에 가서 처음으로 講義室(강의실)에 들어갔을 때의 이야기다. 나는 그 때 모처럼 나간 그 海外旅行(해외여행)을 위하여 새로 지어 입은 上下(상하) 흑곤색의 수트에 역시 곤색에 흰 줄이 쳐진 아주 점잖은 넥타이를 매고 강의실 중간쯤에 앉아 있었다. 온통 白人學生(백인학생)들 틈에 혼자 有色人種(유색인종)으로 앉아 있는 異質感(이질감)과 겹쳐서 더욱 어색한 느낌으로 몸 둘 바를 몰랐던 까닭은 내가 교실을 한 바퀴 휙 둘러보았을 때에 도무지 나처럼 正夢(정몽)으로 차려입은 학생이 하나도 없어서 여러 면으로 내가 유표하게 들어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쪽 학생들은 대체로 잠바, 스웨터, 티셔츠, 반코트 등을 즐겨 입는데, 그 옷의 종류 모양 색깔이 어쩌면 그렇게도 千差萬別(천차만별)인지 우선 놀라게 된다. 그리고 그 옷들을 다리미질 하거나 위아래를 맞춰서 수트로 차려입는 일이 적어도 캠퍼스 안에서는 눈을  씻고 볼래야 볼 수 없다.
  그런 환경에서, 유독 나 혼자 한국이 신사만이 특히 애용하는 흑곤색 수트를 말끔히 차려입고, 게다가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매고 앉아 있으니 누가 보아도 旅行(여행)에 나선 복장이거나 파티에 다녀오는 차림이었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젠틀맨이고, 똑바로 말하면 틀림없는 촌놈이었다.
  체구나 용모와 言語(언어) 등 白人社會(백인사회)에서 흔히 느끼는 묘한 콤플렉스에 짓눌려 처음부터 어색한 기분으로 앉아있던 나에게 내가 촌놈이라는 이식이 겹치자 나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心理的(심리적)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敎授(교수)의 말소리는 귀갓으로도 들리지 않고, 시간이 경과할수록 學生(학생)들의 視線(시선)이 따갑도록 온 몸에 느껴지는 自意識(자의식)이 가중해 갔다.
  나는 슬며시 넥타이를 풀어서 봉창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그렇게 노타이 차림을 하니까 기분은 매우 인퍼말한 기분이지만, 코트를 입고 타이를 매지 않은 자기의 모습을 상상하니 그것이 더욱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들어서 그럴 바엔 차라리 넥타이를 매고 포멀한 차림으로 버티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봉창에서 다시 타이를 꺼내가지고 만지작거리다가 그럭저럭 한 시간이 지났던 것이다.
  나는 그 날로 당장 다운타운에 가서 모양이 이상하게 생긴 스웨터 한 벌을 사 입었고 다시는 교실에서 타이를 매지 않았다. 그 때 美國大學(미국대학)에서 겪었던 그 기분을 지금껏 잊지 않고 있는 터이라 나는 가끔 한국 大學(대학)에서 학생들이 교실에서 와이셔츠에 타이를 매고 선생보다 몇 배나 좋은 양복으로 正裝(정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자네는 여기가 파티장소인 줄로 아나, 아니면 콘서트에 나온 기분인가’하고 빈정대주곤 한다.

  사실 한국학생들은 특히 그들이 上級班(상급반)쯤 되면 흔히 넥타이를 매고 교실에 나타나는 수가 많고, 심지어는 野遊會(야유회)에 까지 타이를 매고 나와서도 그것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타이를 매기를 좋아하는 것이 찬양할 만한 일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대체로 한국 사람은 넥타이를 愛用(애용)하는 편이다.
  학생이 교실에서 타이를 매고 있는 것 즘이야 보통이지만, 때로는 南大門市場(남대문시장)에서 露店(노점)을 하는 사람도 때 묻은 와이셔츠에 타이를 매고 있는 수가 있고, 피크닉에 나간 老紳士(노신사)들, 운동장에서 축구구경에 열중하고 있는 중년신사들도 타이를 맨 사람들이 꽤 많이 눈에 뜨인다. 門(문) 밖에 나갈 때엔 반드시 正裝(정장)하는 버릇이 몸에 밴 이 땅의 점잖은(?) 분들은 어떤 경우에 간혹 코트를 벗는 일은 있어도 타이만은 푸는 일이 적다. 여름엔 차라리 반소매의 셔츠를 입을망정 타이만은 꼭 맨다. 누가 생각해도 소매가 짧은 것보다는 넥타이를 매는 것이 더 더울 것 같지만, 신사들은 끝내 넥타이에 집착한다. 그러나 넥타이는 맸지만 옷 저고리는 벗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나 끝내 正裝(정장)을 허뜨리지 않는 의미에서 저고리를 팔에 걸치고 다니는 모습이나, 그것이 어쩐지 부자연하게 보이는 것만은 마찬가지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여름에 半(반)소매에 타이만을 매고 코트를 입지 않는 모습은 그것이 아무래도 본연의 西歐風(서구풍)이랄 수는 없고 東南亞的(동남아적)인 修正主義者(수정주의자)의 스타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것은 여름만 되면 흔히 볼 수 있는 大統領(대통령)이하 長官(장관)들이 노타이에 코트를 입고 있는 어색한 차림과 다를 바가 없다. 그 분들은 오나가나 冷房(냉방)속에 사니까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을 터인데 국민들에게 무슨 示範(시범)의 뜻으로 그런 차림을 하는 모양이지만 타이를 固守(고수)하는 保守的(보수적)인 국민들은 도무지 그걸 따르지 않고 노코트에 타이를 매는 것을 오히려 멋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금년은 어떨지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넥타이는 왜 매는 것인가. 나는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慣習(관습)의 힘이 참 무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넥타이를 매는 사람치고 그것을 한 번도 저주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침 出勤時間(출근시간)이 바빠서 허둥지둥할 때에 가장 약을 올리는 것이 넥타이이다. 바쁜 손으로 그것을 매노라면 단번에 제대로 매지는 일이 없다.
  어떻게 매면 길어져서 혁대 밑으로 쑥 내려오고 어떻게 매면 초싹턱 밑으로 기어 올라오고, 어떻게 매면 매듭이 두루룽 수리가 된다. 얼굴을 七面鳥(칠면조)같이 붉으락푸르락 신경질을 내다간 결국 그것을 봉창에 구겨 넣어 가지고 나와서 차중에서나 사무실에 와서 매는 수도 있다.
  내가 넥타이를 저주하는 것은 반드시 그것을 매는데 시간이 걸려서 그러는 것만은 아니다. 넥타이에 대하여 사람들이 갖는 가장 불쾌한 감정은 그것이 주는 拘束感(구속감) 때문이다. 사람의 몸 중에서도 가장 자유스러워야 할 숨통과 聲帶(성대)가 있는 부분을 꽉 졸라매고 하루를 지내는 고역이란 보통의 일이 아니다.
  특히 이 더운 여름철에 바람 한 점 통할 수 없이 종일 목을 묶고 다니다 보면, 칼라에 땀이 흥건히 배어있어 축축하고 답답하고, 때로는 피부가 칼라에 스쳐서 쓰라린 수도 있다. 그래서 누구나 집에 돌아오면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넥타이를 풀어버린다. 그리고서 후유하고 한 숨을 내쉬면 그 解放(해방)의 快感(쾌감)이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나는 女子(여자)가 男子(남자)보다 행복한 점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女子(여자)들은 넥타이의 구속을 받을 필요가 없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實用性(실용성)이란 한 가지도 없고, 이렇게 저주의 대상임을 매일 체험하면서도 東西(동서)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넥타이의 불편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데는 반드시 관습과 習性(습성)의 힘만이 아닌 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東洋(동양)과 西洋(서양)에서 각각 다르지 않나 생각된다. 敎會(교회)에 갈 때 音樂會(음악회)에 갈 때, 招待(초대)받은 파티에 갈 때에 꼭 넥타이를 매는 西洋(서양)사람들의 넥타이 倫理(윤리)가 그대로 여기서 전해 왔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넥타이가 그것이 한 가닥 끄나풀에 불과하지만, 매우 造化(조화)의 작용을 부리는 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느끼는 넥타이의 매력이 있다. 애 녀석이 그것을 매면 不良氣(불량기)가 싹 가시고 건실한 靑年(청년)으로 보인다. 허술한 신사도 일단 넥타이를 매면 의젓하고 점잖게 보이며, 돈 없고 권세 없는 월급쟁이도 그것을 매면, 몸이 뚱뚱한 경우엔 社長(사장)같이 보이고, 야위고 깡마른 사람은 學者(학자)나 藝術家(예술가)처럼 보인다. 못생긴 사람은 좀 더 낫게 보이고, 점잖은 사람은 더욱 威嚴(위엄)을 갖춘다.
  失業者(실업자)들이 들끓는 茶房(차방)에 가봐라 제각기 차 한 잔 시켜놓고 뻐기고 앉아 있는 그 넥타이紳士(신사)들에게서 과연 失業者(실업자)를 의양으로 가려낼 수 있겠는가.
  그것은 모두 넥타이의 美德(미덕)이다. 그들에게 넥타이와 茶房(차방)이 없었던들, 그들은 과연 각자의 그 좌절감과 콤플렉스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이런 넥타이의 效用(효용)을 십분 알고 있기에 속은 엉망이어도 거죽만은 근사하게 꾸미고, 내용보다는 形式(형식), 실속보다는 멋과 虛勢(허세)에 치중하는 한국의 紳士(신사)들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보다도 넥타이를 愛用(애용)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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