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명이 떠나 한 명이 돌아 오기 힘들었던 신라 구법승 들의 애환 곳곳에
도전하고 성취하는 건학이념 되새긴 계기

한국 최초의 세계인 혜초스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① 콜카타, 혼돈스런 구법 여정의 첫 기착지

“열 명이 떠나면 1명도 살아 돌아 오기 힘들다”
지금으로부터 1천여 년 전 인도로 떠나던 스님들을 가리켜 한 말이다. 그만큼 인도로의 여정은 멀고도 험난했다. 대부분의 스님들이 목숨을 걸고 구법의 여정을 떠났다.
붓다의 나라인 인도에서 붓다가 남긴 진리를 찾기 위해서 였다.
우리는 그들을 구법승(求法僧)이라 부른다. 당시 그들의 여정이 얼마나 위험천만했는지는 여러 기록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404년, 지맹(智猛)스님이 15명과 함께 인도 순례를 떠났다. 인도에 도착했을 때 이미 10명이 세상을 달리했다. 그리고 나중에 장안으로 돌아온 이는 지맹(智猛)스님과 담참(曇讖)스님 단 둘뿐이었다.
422년에는 법용(法勇)스님이 25명을 이끌고 인도에 갔다 오니 살아남은 이는 4명이었다. 또 7세기 구법승의 전기를 다룬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60명이 인도로 가고자 했다. 이 가운데 39명이 인도에 도착했다. 19명이 인도에서 입적하고 6명만이 귀국했다.”

혜초원정대가 취재를 위해 떠난 길은 그런 길이었다. 험난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하기 힘든 길, 그 길위에서 혜초스님이 걸었던 길의 의미를 생각하고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혜초원정대는 길을 떠났다.

목숨 걸고 떠난 구법여정

물론 지금도 인도의 불교성지를 찾는 여정은 쉽지 않다. 반나절 동안 비행기를 타야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정의 반 이상을 버스와 기차에 의지해야 한다. 하지만 목숨을 걸 정도까진 아니다.

하지만 혜초스님같은 8세기 이전의 구법승들에겐 목숨을 건 여행이었다. 인도에 가기 위해선 뜨거운 태양과 모래바람이 날리는 사막을 수 십 여 일 동안 견뎌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적도 부근의 험한 바다의 파도와 맞서 싸워야 했다.

교통이 발달한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무엇이 그들의 발길을 인도로 이끌었을까. 목숨보다 가치 있는 것, 왜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을지 모른다. 단지 욕망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꿈꿨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스무 살 혜초의 도전정신

많은 구법승 중 순례여행기를 남겨 현재까지 전해오는 스님은 중국의 법현(法顯)스님과 현장(玄奬)스님, 의정(義淨)스님과 신라의 혜초(慧超)스님 정도다. 그 중에서도 현재의 인도인 오천축국을 비롯해 간다라, 아랍(대식국), 페르시아(파사국) 등 서아시아 지역까지 기록으로 남긴 것은 혜초스님이 유일하다. 2만km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그는 4년 간 40여 개국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 담았다. 그것만으로도 혜초스님은 위대한 한국인이며 세계인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스무 살의 나이에 구법여정을 떠났다는 것이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혜초스님을 떠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택한 혜초스님의 도전정신, 그것이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다.

혜초스님은 중국 광저우에서 출발해 현재의 인도네시아를 거쳐 천축국, 즉 인도로 들어갔다고 추정된다. 3개월 동안의 항해를 마치고 그가 처음 도착한 곳은 인도의 동쪽 해안이었을 것이다. 혜초스님이 인도에 도착했을 때는 번성했던 불교가 서서히 정체성을 잃어갈 무렵이었다. 또 서쪽에서 일어난 이슬람의 파도가 몰아 닥치기 직전이었다. 당시 인도는 동서양의 문화를 연결해 주는 통로였다. 모든 학문의 중심지였고 문화의 집결지였다. 구법승들에겐 붓다가 탄생하고 깨달음을 얻은 곳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혜초가 인도에서 가장 처음 접한 곳은 지금의 콜카타였을 가능성이 크다. 해로를 이용한 대부분의 구법승들은 콜카타 근처 벵갈 주(州)의 탐룩(Tamluk : 탐나입티국 耽羅立底國)를 거쳐 갔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두 얼굴의 도시, 콜카타 

인도는 불교와 힌두교 뿐만 아니라, 이슬람과 시크교 등 많은 종교가 혼재하고 있는 나라다.
콜카타. 한국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표현한 시성(詩聖) 타고르의 고향이며 마더 테레사가 빈민을 위해 온 생애를 바쳤던 곳. 또, 힌두교의 성자 라마 크리슈나가 가르침을 행했던 곳. 예술적으로 종교적으로 콜카타는 누구나 한번 쯤 호기심을 가져볼 만한 도시. 하지만 콜카타는 불행하게도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도시 중 하나다. 열악한 사회시스템과 강고한 계급제도인 카스트에 의해 미래를 희망할 수 조차 없는 곳이 바로 콜카타다. 천주교 수녀였던 마더 테레사가 빈민을 위해 생애를 바칠 만큼 인도 내에서도 가장 고통스런 도시다.

 하지만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콜카타는 인도의 수도였으며 대영제국의 제2의 도시였다. 그래서인지 콜카타 곳곳에서는 식민지 시절 지어 진 영국 풍의 건물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빅토리아 기념관, 콜카타 인도 박물관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취재단을 압도한 것은 다름 아닌 자동차의 경적소리였다. 시내의 모든 도로들은 자동차로 넘친다. 하지만 아무도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는다. 교통 신호나 차선이 없는 것도 아니다. 계속해서 울리는 경적이 충돌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일 뿐인 듯했다. 경적소리에 익숙해질 때쯤, 길거리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흙먼지로 가득한 보도(步道)에는 이것저것 벌여 놓고 앉은 잡상인들이 즐비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길거리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자고 있는 사람들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또 도로 위에서 밥을 짓고, 몸을 씻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동네 개와 하나의 쓰레기통을 두고 다투기도 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온데 간데 없고, 종교라도 없으면 이들의 삶은 단 하루를 버티기 힘들어 보인다.
콜카타 곳곳에서 살고 있는 빈민들은 타지에서 온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오는 것은 일자리를 구해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희망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 역시 그들을 반겨주진 않는것 처럼 보인다. 일자리는커녕 높은 물가에 삶은 점점 피폐해지고 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콜카타의 안타까운 도시빈민들은 그렇게 생겨났다.

붓다가 이야기 했던 것 처럼 고통속에 빈민으로 남겨진 이들의 땅, 인도에서 첫 발걸음을 내딛은 혜초스님은 무엇을 보았을까.

사랑 실천하는 마더 테레사 하우스
혜초원정대 취재단이 평생을 희생과 봉사의 정신으로 헐벗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다간 마더 테레사 하우스를 취재하고 있다.

 

도시 빈민들을 위해 마더 테레사는 평생 콜카타를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마더 테레사는 1950년부터 콜카타에서 빈민과 병자, 고아들을 위해 봉사했다. 마더 테레사 하우스에선 그녀의 뜻을 잇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1천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나이와 국적, 종교에 상관없이 마더 테레사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은 그곳에서 마더 테레사의 사랑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두 달째 봉사하고 있는 주장한 씨는 “사랑을 직접 실천하고 싶었다”며 그곳에서 봉사하는 이유를 밝혔다. 마더 테레사의 가르침은 중생을 고통속에서 제도하라는 붓다의 가르침과 결코 다르지 않았다.

피 비린내 진동하는 칼리 사원

콜카타는 죽음을 관장하는 칼리 여신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칼리 여신은 콜카타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칼리 여신은 붉은 얼굴에 혀를 길게 내민 채 콜카타의 거리 곳곳에서 인간을 노려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바로 싱싱한 피였다. 그래서일까. 칼리 사원 주변에는 특유의 피 비린내가 진동한다. 칼리 여신에게 살아있는 흑염소의 피를 바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원 내에선 비위가 약한 사람은 절대 보지 못할 광경이 펼쳐진다. 사제가 직접 흑염소의 털을 깎고 목을 베는 것. 쉽게 눈길을 두기 어려운 광경이다. 하지만 그만큼 칼리 사원은 인도인들의 종교에 대한 강한 믿음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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