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美術(불교미술)기원 實感(실감)

  지난 2월29일 ‘뉴델리’ ‘담담’空港(공항)에 처음으로 내렸을 때는 밤도 늦었기 때문에, 도중 내려다 볼 수도 없었다. 그후 산지(Sanchi)大塔(대탑)ㆍ아잔타(Ajanta)石窟(석굴)ㆍ엘로라(Ellora)石窟(석굴)ㆍ봄베이(Bombay)大學(대학)ㆍ뿌우나(Poona)大學(대학)ㆍ마드래스(Madras)大學(대학)ㆍ인도博物館(박물관)ㆍ산티니케탄(Santiniketan) 등, 전국을 두루두루 누비고서, 國際(국제)산스크리트會議(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인디아ㆍ에어라인’으로 ‘캘커타’에서 다시 ‘뉴델리’로 갈 때에는 끝없이 黃褐色(황갈색)으로 펼쳐있는 광막한 平野(평야)가운데 한 줄기 띠처럼 굽이굽이 굽어져 있는 푸른 ‘갠지스’江(강)의 흐름을 내려다 볼 수가 있었다. 그 ‘갠지스’江流域(강유역)에 우리 一行(일행)이 비로소 발을 디딘 것은 1주일간의 회의가 끝난 후 부터였다.

  예부터 힌두敎徒(교도)의 巡禮者(순례자)가 전국으로부터 모여드는 ‘갠지스’江邊(강변)의 바라나시(Baranasi)는 힌두敎徒(교도)의 聖地(성지)로서 일찍부터 번성하여 온 도시다. 그 江(강)물에 몸을 적시며, 江邊(강변)에 앉아 香(향)을 태우며 呪文(주문)을 외우는 일은 그들이 품고 있는 평생의 소원이다. 강변에 마련되어있는 여러 목욕터인 가아트(Ghat)는 먼 동 트기 전부터 붐비고 있었다. 초입 길가 양쪽에 즐비한 露店(노점)은 제각기 꽃과 香(향)을 사가지고 가라고 오가는 사람들을 부르고 있었다. 입추의 여지도 없는 여러 가아트 가운데 ‘다사스와메드ㆍ가아트’(Dasaswamedh)를 겨우 뚫고 나가 江(강)에 배를 띄어 뱃사공이 노 젓는 대로 저만큼 떨어져 나가 있었기 때문에 江(강)줄기를 오르내리면서 그 가아트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가까이 다가가서 볼 수 있었다. 푸른 색, 노란 색, 하얀 색, 붉은 색 등으로 입은 사아리(sari)를 입은 채 江(강)물에 적시는 젊은 女人(여인)들의 살결이 나그네에게는 異國(이국)의 情感(정감)을 가지게 하는데 남음이 있었다. 그 후, 힌두大學(대학) 構內(구내)에 있는 시바 寺院(사원)에 갔을 때, 案內者(안내자)는 神聖(신성)한 ‘갠지스’의 그 江(강)물을 날마다 새로이 갈아 시바神(신)에게 올린다고 알려주었다.
  돌로 만든 커다란 황소를 붉은 색으로 칠하여 모셔놓은 黃金寺院(황금사원)(Golden Temple)은 ‘바라나시’의 수많은 힌두敎寺院(교사원) 가운데서도 가장 이름난 곳으로, 시내의 큰 길에서 꺾어든 길목서 부터는 뒤에서 밀고 밀어 닥치는 善男善女(선남선녀)의 무리에 휩쓸려 발을 디딜 곳조차 찾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우리가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鹿野苑(녹야원)은 바로 이 ‘바라나시’에서 8km지점인 ‘사르나드’에 자리 잡고 있지만, 여간 한적하지를 않았다. 사진으로만 보아온 높이 33m의 다메크塔(탑)을 눈 앞에 보며 鹿野苑內(녹야원내)로 들어섰을 때, 나도 모르게 ‘역시 잘 왔구나’고 감탄하며 合掌(합장)했다. 푸른 잔디로 뒤덮인 그 사이를 朱紅色(주홍색)의 砂巖(사암)가루로 다듬어 굳혀 놓은 빨간 길이 整然(정연)하게 뻗치고 있는 苑內(원내)는 그야말로 公園(공원)그대로였다. 붉은 꽃이랑, 노란 꽃이랑, 原色(원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핀 염천아래의 苑內(원내)는 더욱 印象的(인상적)이었다. 카아키色(색)의 國民服(국민복)차림을 한 고용인 둘이 각각 길다란 칼과 같은 낫을 폭넓게 좌우로 휘두르며, 휴지 한 장 흩어져 있지 않은 그 잔디밭을 고르게 가꾸고 있었다. 잔디밭은 東(동)쪽 언덕 앞에 이르러 끝나, 활엽수 니임나무(Neem Tree)가 몰려있는 언덕 위 그늘에서는 10여명의 어린이들이 늘고 있었다.
  아쇼카王(왕)이 세웠던 달마라지카寺院(사원)은 검붉은 벽돌의 壁(벽)과 礎石(초석)만이 남아 있었지만, 苑內(원내) 북쪽 넓게 펼쳐진 그 遺構(유구)로 보아 당시의 壯觀(장관)을 그려보는데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쇼카王(왕)의 石柱(석주)는 그 밑 部分(부분)만이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오고 있어, 이를 위해 殿閣(전각)이 세워져 있다. 자기를 버리고 앞서 떠나버린 교진여등의 다섯 比丘(비구)들을 찾아 이곳까지 오시게 되었던 붓다께서 成道(성도) 후, 처음으로 說法(설법)을 하신 바로 그 자리를 길이 빛내고 있는 다메크塔(탑)도 일찍이 아쇼카王(왕)이 세운 것이지만, 當時(당시)의 흔적은 밑의 부분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驪州(여주) 神勒寺(신륵사)에 있는 塼塔(전탑) 벽돌에 새겨져 있는 것과 같은 여러 文樣(문양)을 다메크塔(탑)에서도 여기저기서 찾아낼 수 있었으니, 佛敎美術(불교미술)의 기원이 역시 印度(인도)에 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무너지고 있는 서북쪽 둘레를 수리하기 위하여 높다랗게 꼭대기까지 가로 세로 그물처럼 발판이 둥근 塔(탑)의 둘레를 3분의1이나 덮이고 있었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두어시간이나 그 塔(탑)그늘에 앉았었던 것은 비단 뜨거운 햇살을 피해서 쉬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일찍이 鹿野苑(녹야원)을 찾았던 慧超(혜초)스님의 모습을 그려보았던 것이다. 문득 무라간다꾸띠 寺院(사원)의 壁畵(벽화)가 생각이 나서, 苑內(원내)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그 곳으로 발을 서서히 옮겼다.

  파묻혀진 이 古代佛敎都市(고대불교도시)의 옛 영광과 壯(장)함을 부흥시키려는 큰 願(원)을 세웠던 ‘세이론’의 담마빠아라師(사)(Dammapala)가, 그 옛날 붓다께서 成道(성도)하신 후에 처음으로 4개월간의 雨期(우기)룰 지내셨던 오두막 그 자리에 1천9백31년에 세워 놓은 것이 바로 무라간다꾸띠 寺院(사원)이다. 法堂(법당)에 들어서서 禮佛(예불)을 마치고 나니, 언제 들어왔었는지 푸른 ‘사아리’를 입은 한 중년의 부인이 禮佛(예불)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20여명으로 구성된 獨逸人觀光團(독일인관광단)들이 들어서서는 함께 따라온 안내자로부터 좌우의 벽에 그려져 있는 摩耶夫人(마야부인)의 꿈, 鹿野苑(녹야원)에서의 說法(설법), ‘수자따’의 우유죽 供養(공양), 빔비사아라王(왕)의 歸依佛(귀의불), 열반에의 길 등, 21幅(폭)의 佛傳圖(불전도)에 대한 설명을 듣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鹿野苑(녹야원)을 나올 때, 삼삼오오 떼를 지어 들어서는 사람들 가운데 오렌지 色(색)의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유난이 눈에 비치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卍字(만자)가 들어있는 胸章(흉장)이 달려있었다. 그들이 ‘아난다ㆍ말가’ 즉 ‘幸福(행복)의 길’이라는 새로운 힌두敎(교)의 한 派(파)에 속하고 있는 宗敎人(종교인)임을, 한 시간 가량 후에 鹿野苑(녹야원)앞 큰 길 건너 博物館(박물관)에서 또 다시 만났을 적에 그들로부터 자기소개를 받고서야 알았다.
  博物館(박물관)의 규모는 작았지만 알뜰하게 진열하여 놓은 것이 좋았다. 특히 玄關(현관)복판에는 일찍이 달라마지카寺院(사원)에 서있었던 아쇼카王(왕)의 石柱(석주) 윗부분인 獅子石柱頭(사자석주두)가 육중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애초 한 돌로 만들어진 이 獅子石柱(사자석주)가 높이 鹿野苑(녹야원)에 서있었다. 그 모습을 慧超(혜초)스님은 보았었다. 英國(영국)의 통치로부터 벗어나 1천9백50년 희망과 自信(자신)을 가지면서 새로 독립했던 印度人(인도인)들이 그들의 祖國(조국) 인도의 상징으로 택했던 것은 바로 이 獅子石柱頭(사자석주두)였다. 잘 닦아진 灰色(회색)의 그 사자기둥머리는 윤이 나고 있어, 어제 막 만들어 낸 것처럼 생생하여 紀元前(기원전) 3世紀(세기)의 것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피비린내 나는 侵略戰爭(침략전쟁)이 있은 후, 勝利者(승리자)이면서 전쟁을 포기하여 버린 아쇼카王(왕)은 붓다의 가르침을 믿고, 그 佛敎(불교)를 사람하고 佛敎(불교)를 널리 內外(내외)에 폄으로써 붓다의 慈悲(자비)를 실천으로 옮길 것을 天職(천직)으로 여겼다. 이 王(왕)때에 와서 印度(인도)는 처음으로 통일국가를 마련할 수 있었으며 平和主義(평화주의)와 博愛主義(박애주의)의 정책이 베풀어져 나갔다. 이 때 佛敎敎團(불교교단)의 분열을 꾀하려는 僧(승)이나 女僧(여승)은 누구를 막론하고 敎團(교단)에서 추방시킬 것을 강력히 경고하였던 것이니 鹿野苑(녹야원) 獅子石柱(사자석주)아래에도 이를 새겨 놓았던 것이다.
  鹿野苑(녹야원) 남쪽으로 中國寺院(중국사원)이 隣接(인접)해 있었고, 다시 여기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큰길가에 西藏寺院(서장사원)이 있었는데, 자줏빛 僧衣(승의)의 젊은 西藏僧(서장승) 서너名(명)이 우리를 앞지르고 寺門(사문)안으로 들어선 것은 좋았으나, 그 가운데 健壯(건장)한 한 僧(승)은 僧衣(승의)를 뒤집어쓰고 갔었기 때문에 속옷을 들어낸 그 꼴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아쇼카王(왕)은 파라문敎(교)에 대해서도 보호를 하였다.
  하나의 진리로 통하는 여러 갈래의 宗敎(종교)를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에 아쇼카王(왕)의 宗敎政策(종교정책)이 있었다. 힌두大學(대학)의 그 시바寺院(사원) 入口壁面(입구벽면)에 ‘힌두敎徒(교도)와 佛敎徒(불교도)는 神聖(신성)한 眞理(진리)의 두 分家(분가)들이다.’라는 標語(표어)가 있었지만, 도시 힌두교에서는 불교를 힌두敎(교)의 한 派(파)로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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