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동 계곡의 淨水(정수)를 보고 한강물의 탁한 물을 볼 때 한강을 탓하고 있을 것은 못 된다.
  어디서 잘못됐는지 조차 모르는 상처로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 우리는 자신을 탓해야 된다.
  아픔의 상처는 쉬 잊어도 번민의 아픔은 쉬 잊을 수 없는 것.
  공부에 열중해서 연구에 몰입하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거리감과 부러움을 쉽게 감지하곤 필요 없는 조언으로 그 거리감을 메우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모두 제3류에서 허둥대며 기어오르는 사람 속에서 안타깝게 허우적거리는 슬프지도 않은 사람, 어쩌면 나는 그보다 더 깊은 계곡에서 바둥대는 지도 모른다.
  우리들 젊은이들은 짙은 염세주의적 경향의 너울을 쓰고 시간 속에서 잘난 듯이 걸어가고 있다. 아니 뛰는지도 모른다.
  내가 잘난 것이 아니라 남이 못난 것이요 남이 잘난 것이 아니라 내가 못났는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무작정 먹고, 마시고….
  아카시아는 5월에 만발한다.

  4월에 아카시아 꽃을 기대할 수는 없다. 더욱이 12월의 기대란 웃음을 자아낼 넌센스라고 우리는 그저 비웃을지도 모른다. 반에서 꼴찌를 면치 못하면 열등생이 갑자기 그 반에서 수석을 했다. 우리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기막힌 말을 이미 지어놓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났다’
  아마 12월에 아카시아가 피었다고 하면 우리는 얼마나 당황할 것인가.
  그러기에 ‘아카시아 꽃은 12월에 핀다’라는 말을 우리는 만들어 놓고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수업료의 인상 때마다 한바탕씩 투덜대고서야 납부한다. 그것도 마감이 지나 2차 등록이 되어서야…(물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이야 예외지만) 우리는 그 돈을 쓸 줄만 알았지 찾는 방법은 모르고 있는 불행한 사람들이 아닐까.
  우이동 물을 보다가 한강물을 보고 감탄할 것은 없다.
  수업료 액수가 많다고 투덜대며, 他校(타교)의 수업료가 싼 것을 보고 부러워할 것도 없다. 오월을 맞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를 무감각한 인간들로 만들어 놓는다. 오월을 우리의 아침으로 보자.
  우이동 계곡의 맑은 물을 우리 집 식수로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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