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 原語公演後記(원어공연후기)

  셰익스피어 비극의 범주에 넣으면서도 막상 대하고 보면 그러한 감흥을 못 느끼는 작품이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차라리 어떤 면에서는 희극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성 싶다. 햄릿, 맥베드, 오셀로, 리어왕과 같은 4대 비극과 판이하게 드러나는 점이 있다면 그건 전자는 주로 성격비극인데 비하여 후자는 운명비극이라는 사실이다. 극중 인물들 자신이 스스로의 성격결함에서 비롯되는 비극이 전자의 경우이고, 그와는 달리 어쩔 수 없는 운명 내지는 숙명의 굴레 속에 스스로의 자멸과 파탄을 초래하는 것이 후자의 예이다.

  희곡에 있어서 플롯(plot)보다 성격(character)표출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미 무대극으로서는 부적합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인 그의 작품에 있어 더욱 그러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이 무대에 올려놓을 만한 성질의 작품이 못 된다는 사실은 능히 수긍이 가고도 남는 바이다.
  그러기에 본고장인 영국, 그것도 셰익스피어를 전문으로 하는 기성극단들이 아예 외면해 버리는- 설사 공연한다 해도 주목할 만한 관심의 대상도 못되곤 하지마는- 추세는 자못 시사적이다.
  이러한 징크스를 향해 패기 넘치는 도전을 감행함으로써 무대극으로서 일말의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다는 데에, 지난 12일 드라마ㆍ센터에서 마티네와 야잔 두 차례에 걸쳐 국내 최초로 시도한 전 5막 22장의 원어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학생극이 기성인들의 그것과 두드러진 특징을 지닌 게 있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실험무대로서의 성격이 아닐까 한다. 따라서 그네들은 나무를 보고 숲을 못 보는 식의 미시적 안목을 용감하게 제거하고, 학구인으로서 젊다고 하는 신념과 투지와 패기로 일관하는 것이다.
  어느 작품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한 낭만적인 연시로 더불어 극본으로서는 성공의 묘를 보이면서도, 비극이라는 ‘테마’ 앞에는 맥을 못 추는 이 작품의 난점은 어디 있는 것일까. 첫째는 극의 기본요소로서의 3일치를 무시하고 있으며, 둘째가 일관성 없는 무수한 등장인물의 출몰 및 중반에 이르도록 좀체로 드러나지 않고 있는 두 주인공의 성격결여이고, 셋째가 지나치리만큼 장황한 대사와 두 주인공이 구사하는 ‘알레고리’와 ‘메타포’ 포착의 곤란 넷째가 작품의 기저에 깔려있는 상징의 미와 ‘이미저리’의 난해성 등이다. 이렇게 많은 난제를 안고 있는 대작을 실험극의 무대에 올려놓았다는 엄청난 배포 하나만으로도-위험한 모험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던 게 사실이지마는-어느 정도까지의 실수와 역부족은 ‘커뮤플라즈’가 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배역진 각자가 그들 나름대로 요령 있게 처신하는 것은, 연출자나 무대감독의 보이지 않는 세심한 배려가 있기 때문이다. 관객이라고 하는 예리한 눈이 순간적인 면에까지 주의를 기하는 것은, 그네들의 숨은 노력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막이 내리기도 전에 무대 전면을 암흑으로 만들어 놓음으로써, 줄리엣의 침실에서 하단하다가 계단에 넘어지는 장면(4막4장에서의 캬푸렐 부인과 유모 역)이 그 좋은 본보기다. 이런 경우 관객은 연출자와 무대감독이 누군가 하는 것을 알고 싶어 두리번거리는 것이다. 채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캬스트’진각자가 재치 있는 행동을 보여줄 때 뒤에 숨어 있는 연출진의 효과는 더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13~14양일간 걸쳐 아카데미의 창단 공연자품 <쥐덫>에서도 ‘스텝’진의 일원으로서 역량을 더해준 연출자의 고군분투를 다소 동정해 마지않는 것이다.
  이번 공연에서 원어극(原語劇)이 갖는 가장 큰 병폐로 지적된 것은, 첫째 극중 인물들이 너무 대사암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암송 인상을 어쩌지 못했다는 점과, 그에서 비롯되는 감정과 억양처리의 미흡을 들 수 있겠다.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라는 ‘핸디캡’이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만 이를테면 티볼트와 격투 끝에 죽어가는 머큐쇼를 불안고 있는 벤볼리오의 그것(3막1장에서)이나, 아들의 죽음을 전해 듣고 달려 나와 통탄하는 장면(5막3장에서의 몬테큐 역), 특히 한밤의 캬푸렐가의 정원에서 밀회를 즐기는 장면(2막2장에서의 줄리엣 역)은 사랑이라고 하는 승화된 감정을 느끼기에는 대사전달이나 표정이 너무 부실했던 것 같다. 때로는 금속성의 여운을 남김으로써, 분위기 조성은 실패로 끝난 것 같은 기미는 관객과의 가청(可聽)거리를 지나치게 오산한데서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마는 이 경우에 있어 원어극이 탈피할 수 없는 고질적인 병폐가 두드러진 현상으로 부각되었다고 여김은 속단이 될까?
  둘째로는 다양성 있는 동작과 시선처리의 부족이다. 말 한마디에 하나의 동작과 표정이 수반될 정도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변화무쌍한 그네들이기에 그러한 그들과는 대조적인 우리네가 자연스레 구사 표현하기란 상당한 훈련과 세심한 연출자의 주의가 요청되는 것은 어제오늘만의 얘기는 아닐 게다.
  셰익스피어는 때때로 그의 비극 속에 어릿광대나 바보 또는 개성이 특출한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카타르시스’적인 묘미를 잃지 않는다. 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예를 들면 줄리엣의 유모와 ‘머큐쇼’와 발사살, 그리고 ‘피터’의 하인들이 그러하다.
  이 작품이 비극의 부류에 속하면서도 희극적 요소를 더하고 있는 점이-글쎄 이미 400여년전의 그것을 오늘에 와서 모방하고 있다는 자체부터가 우선 희극이 아닐까?-바로 이러한 극중 인물들의 출연 때문이다. 경망스런 우행을 조금의 부담감 없이 능숙하게 해냄으로써 하인이라기에는 너무 귀엽다는 호감을 안겨준 장면(1막5장과 2막4장에서의 피터 역)이라든지. 유모를 상대로 짓궂은 남성 특유의 희롱과, 다음 순간에 닥쳐올 죽음도 모르는 채 노골적인 직설과 빈정거림으로 더불어 기대 이상의 연기를 보여준 장면(2막4장과 3막1장에서의 머큐쇼 역)등에서, 이미 관객은 가슴을 터놓는 공명심을 발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유모의 등장이라 하겠다. 그녀만이 지니는 독특한 개성미를 약간 쉰 듯만 듯한 육성으로, 조금은 수다스럽다는 강렬한 여운을 풍기면서 폭소를 자아내게 함으로써, 내부의 허실을 메꾸고 한껏 고양(高揚)된 관객들의 심적 체증을 해소시켜주는 ‘코믹ㆍ릴리프’를 구사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유모 역은, 극 전체를 이끌고 나간 활력소가 되었다고 보아서 좋겠다.
  이렇게 개성미 넘치는 극중 인물들의 활약이 클 때, 자연 그들의 그늘에 가려 관객들이 자칫 등한시하는 폐단이 있는데, 그 예가 바로 ‘티볼트’와 로미오, 그리고 영주 ‘에스카러스’역이다.
  단순미와 소름끼칠 만큼 차가운 표정으로 ‘하드ㆍ보일드’한 면을 보여준 티볼트역과 시종 조심스러우면서도 진지한, 거기에 당년 16세라는 로미오 상을 표출하기에 착실한 성실면을 보여준 로미오 역, 그리고 탄탄한 체구에서부터 영주라는 권위의식과 위엄을 강렬하게 풍기면서 완전히 관객을 압도하는 박진미를 유감없이 보여준 ‘에스카러스’역을, 안목 있는 관객이라면 감히 소홀히 넘겨보지 못했을 것이다.
  수많은 ‘징크스’를 향해서 과단성 있는 패기의 도전을 감행함으로써, 무대극으로서의 가능성을 시사케 한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예기치 못한 범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마는, 어차피 우리 인생부터가 모순과 ‘에러’투성이의 범벅이라는 쓸쓸한 사실을 감안해 볼 때, 보다 나은 차기(次期)공연에 좋은 자극제가 되리라 믿고픈 것은 어리석은 자위(自慰)의 소치 때문일까.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