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 華麗(화려)한 9세기 工藝(공예)의 代表作(대표작)

  俳敎工藝(배교공예)②
  敏哀大王石塔舍利(민애대왕석탑사리)합
  塔(탑)은 부처님의 뼈(舍利(사리))를 모시는 무덤이다. 따라서 탑의 주인공은 사리인 것이다. 어떤 절은 물론하고 거의 탑이 없는 곳이 없는데 그것은 바로 부처님이 남기신 뼈(舍利(사리))를 예배하는 곳이 절이기 때문이다. 初期(초기)의 불교는 불상을 예배하지 않고 사리를 모신 탑만을 예배했다. 그래서 탑은 절의 중심부분이 되었고 예배의 중심대상은 사리가 차지했던 것이다. 비록 후대에 내려와서 불상이 예배의 주대상이 되고 불상을 모신 법당이 절의 중심부가 되었지만 그러나 탑도 여전히 조성되었고 舍利(사리)에 대한 신앙, 또한 날로 깊어갔다. 이것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말이 三國遺事(삼국유사)에서 一然(일연)스님이 지적한 ‘寺寺星張(사사성장) 塔塔雁行(탑탑안행)’이라는 말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塔(탑)의 나라다.
  특히 石塔(석탑)은 우리나라에서만 독특하게 발달하였으므로 美術史的(미술사적)으로 우리나라를 평할 때 ‘石塔(석탑)의 나라’라고 通稱(통칭)하고 있는 것이다.
  山野(산야) 도처에서 그리고 어느 곳의 절이거나 石塔(석탑)이 서 있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이 말은 지극히 당연한 한국의 대명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우수한 석탑 속에는 사리가 반드시 봉안되어 있고 또한 사리는 지극히 중하게 모셔지고 있어서 귀중한 몇 겹의 장치 속에 놓여 지고 있다. 그 장치를 우리는 舍利盒(사리합)이라고 말하고 있다.
  盒(합)은 보통 外盒(외합)과 內盒(내합)으로 되어 있고 그 속에는 舍利甁(사리병)이 있어서 병 속에 사리를 모시고 있다. 이런 盒(합)이나 병은 매우 정교하게 되어 있다. 당시의 기술이 허락하는 한 최대의 정성과 기술을 다하여 제작하기 때문에 이들 舍利關係遺物(사리관계유물)들은 古代工藝品(고대공예품) 중 가장 名品(명품)들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석가탑, 황룡사탑, 황복사탑, 왕궁리탑, 송림사탑 등의 호화찬란하고 기교 정밀한 사리유물의 佛敎工藝名品(불교공예명품)들이 그 좋은 예인 것이다. 이들과 똑같은 類(류)의 유물을 우리 박물관도 소장하고 있다. 그것은 敏哀大王(민애대왕)을 위하여 조성했던 삼층석탑 속에 들어 있었던 ‘舍利關係遺物(사리관계유물)’이다. 外盒(외합)은 金銅板(금동판)으로 4각형으로 짰는데 각 판마다 석가약사, 미타, 미륵의 四方佛(사방불)을 정교하게 새겼으며 밑판에는 內盒(내합)을 놓는 연꽃대좌를 마련하고 있다. 內盒(내합)은 납석으로 만들었는데 주둥이(口緣部(구연부))에는 구름무늬로 새겼고, 몸체에는 불행하게 돌아간 신라의 敏哀(민애)대왕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둘러가며 새겨놓고 있다. 하단부에는 연꽃을 겹겹이 조각하여 외합의 연꽃받침과 함께 앙연과 복연을 이루게 했다. 외합과 내합 사이는 나무로 만든 적은 小塔(소탑)들이 99개 정도 들어 있었겠지만 지금은 몇 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민애대왕은 9세기 초 신라 말에 왕위에 올라서 귀족 간의 치열한 왕권쟁탈의 좌중에서 23세로 희생된 비극의 인물이었다.
  만들어진 것은 이 사리 유물 이만 그가 돌아간 지도 24년이 지난, 정세가 안정된 때이다. 그의 가까운 인척이던 동화사 주지 心地王師(심지왕사)에 의하여 젊은 나이에 돌아간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사리유물들은 섬세, 화려하던 9세기 공예품의 대표작인 동시에 신라사의 이면을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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