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集刊行(전집간행)을 계기로 본 生涯(생애)와 遍歷(편력)

  未堂(미당) 徐廷柱敎授(서정주교수)(文理大(문리대) 國文科(국문과))의 詩作生活(시작생활) 36年(년)을 決算(결산)하는 全集(전집)이 나왔다. 本校(본교)의 前身(전신)인 中央佛敎專門學校出身(중앙불교전문학교출신)인 徐廷柱敎授(서정주교수)는 大學(대학) 在學中(재학중)인 1936年(년) 東亞日報(동아일보) 新春文藝(신춘문예)에 ‘壁(벽)’으로 當選(당선). 그 후 36年(년)동안 韓國詩壇(한국시단)의 代表的(대표적)인 詩人(시인)으로 韓國的(한국적)인 固有美(고유미)와 新羅精神(신라정신), 특히 佛敎美(불교미)의 높은 영역을 개척해 왔다. 詩(시)ㆍ詩論(시론)ㆍ傳記(전기)ㆍ隨想(수상)등을 5권에 엮은 ‘徐廷柱(서정주) 文學全集(문학전집)’은 現役詩人(현역시인)으로는 최초의 全集(전집)이다. 韓國詩(한국시)의 頂上(정상)을 誇示(과시)하는 問題作(문제작)들로서 韓國文壇(한국문단)과 東國文學(동국문학)의 자랑스러운 業績(업적)이 되고 있다. 지난달 16일엔 신문회관에서 盛大(성대)한 出版記念會(출판기념회)를 개최, 未堂(미당)을 받드는 3백여 門下生(문하생)과 各界(각계) 有名人士(유명인사)들이 모여 그의 文學的(문학적)인 業績(업적)에 찬사를 보냈다.
  “나이 쉰여덟이나 되어서 겨우 自己文學(자기문학)의 全集(전집)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별로 부지런한 꼴도 되지는 못하지만, 적당한 게으름의 덕으로 그래도 목숨을 부지하고 文學(문학)을 해 온 나 같은 사람의 마음의 걸음걸이로는 自足(자족)해야 할 일”인가 싶다는 未堂(미당)-. 그가 처음으로 詩(시)를 공부하기는 17ㆍ8세 時節(시절)이다. 그는 주요한의 ‘아름다운 새벽’ 및 三人詩歌集(삼인시가집) 속의 詩篇(시편)들을 좋아했다. 주요한의 民謠風(민요풍) 詩(시)들은 ‘民族(민족)의 質(질)’이 잘 배어 있는 傳統的(전통적) 語風(어풍)이었던 까닭이다. 그 다음은 金永郞(김영랑)의 ‘國唱(국창)의 가락’ 같은 小品(소품)들 속에서 우리말의 떳떳함을 가까이 했다.

  外國詩人(외국시인)으로는 ‘보들레르’와 李太白(이태백). 가장 뼈저리게 自己(자기)를 詩(시)에 犧牲(희생)한 보들레르-.
  ‘거지와 猶太人(유태인)과 黑人(흑인) 毒婦(독부)와 이, 벼룩 등 寄生蟲類(기생충류)의 第一隣人(제일린인)’이었던 보들레르를 좋아했다.
  詩集 ‘花蛇(화사)’의 世界(세계)가 그러한 人間刑罰(인간형벌)의 밑바닥과 통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神仙(신선) 李白(이백)을 배우면서 자기를 坐定(좌정)했다는 未堂(미당)이다.
  그의 詩精神(시정신)에 더 큰 영향을 주기는 佛敎(불교)의 부처님과 독일의 ‘니체’이다. ‘니체’는 ‘디오니소스’的(적) 生(생)의 悅樂(열락)과 肯定(긍정)을 未堂(미당)의 多難(다난)한 靑年時節(청년시절)에 권고해 주었다고 告白(고백)한다. 그러나 그리스的(적) 神性(신성)은 아폴로的(적) 壁(벽)에 막혀 타개할 길이 없다는 것을 그는 20代(대)에 터득-. 이 모든 정신적 방황 속에 歸依(귀의)한 곳이 佛敎(불교)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져가는 永遠(영원)의 輪廻(윤회)를 해탈하라는 ‘불타’의 門(문) 안에 들어온 것이다.
  朴漢永大宗師(박한영대종사)의 門下生(문하생)으로 스님이 손수 삭발을 하여 入門(입문). 東大門(동대문)밖 開運寺大圓庵(개운사대원암)內(내) 中央佛敎(중앙불교)전문講院(강원)에 入學(입학)한 것이 그것. 1935년 스님이 校長(교장)을 겸임하고 있던 中央佛敎專門學校(중앙불교전문학교)(현東大(동대))에 스님의 권고로 入學(입학)했다. 다음 해에 詩壇(시단)에 데뷔, ‘詩人部落(시인부락)’誌(지)의 發行人(발행인) 겸 편집인이 되어 우리詩文學史上(시문학사상) 빛나는 업적을 쌓기 시작했다.

  徐廷柱(서정주)교수는 1915년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出生(출생)했다. 中央高普(중앙고보)시절엔 光州學生(광주학생)운동의 주모자로 退學(퇴학)을 당하기도 했었다. 38년에 첫 詩集(시집) ‘花蛇(화사)’를 발간, 그 뒤에는 滿洲(만주)를 전전하기도 했고 41년엔 女學校(여학교)교사, 해방 후에는 東亞大(동아대)교수, 48년에는 東亞日報(동아일보) 社會部長(사회부장)과 文化部長(문화부장)을 역임, 政府樹立(정부수립) 후에는 문교부 初代藝術課長(초대예술과장)으로 敎壇(교단)과 言論界(언론계), 官職(관직)등을 편력했다. 6ㆍ25戰亂時(전란시)에는 全州戰時聯合大學(전주전시연합대학), 朝鮮大(조선대)교수로 54년부터 東大(동대)교수와 서라벌藝大(예대)교수로 오늘에 이르렀다. 54년부터 藝術院會員(예술원회원), 55년엔 美(미)아시아재단 自由文學賞(자유문학상)을 수상했고 60년에 5ㆍ16문예상 本賞(본상), 66년에 藝術院賞(예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그간의 저서로는 시집으로 ‘花蛇(화사)’(38년) ‘歸屬途(귀속도)’(64년) ‘徐廷柱詩選(서정주시선)’(55년) ‘新羅抄(신라초)’(60년) ‘冬天(동천)’(68년) 등 5권이 있고 ‘詩文學槪論(시문학개론)’등의 文學論叢(문학논총)이 있다.
  이번 ‘徐廷柱(서정주) 文學(문학) 全集(전집)’ 全五卷(전5권)은 그간 詩集(시집)과 近作(근작)을 묶은 ①‘詩集(시집)’, 詩論(시론) 詩人論(시인론)의 ②‘文學論叢(문학논총)’, ‘내마음의 遍歷(편력)’과 ‘天地有情(천지유정)’을 묶은 ③‘自傳(자전)’, 韓國(한국)의 美(미) 등의 ④‘隨想(수상)1’ ⑤‘隨想(수상)2ㆍ傳記(전기)’로 구성하고 있다.
  앞으로는 對話(대화)의 美(미)를 살리는 劇詩(극시)와 小說(소설)을 執筆(집필)할 것도 예정하고 계시다.
  舍堂洞(사당동) ‘예술인의 마을’로 自宅(자택)을 옮긴이래 서재에서 ‘木鐸(목탁)’으로 손님을 맞는 未堂(미당)-. 由來(유래)가 있는 작은 佛像(불상)과 新羅土器(신라토기)들의 이야기로 언제나 어린애 같은 그런 미소를 잊으시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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