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화로 한국화를 그리기 위해 태어났다"

월간 미술 주관 한국의 인기작가 1위, 한국일보 주관 2000년대를 빛낼 샛별 100인에 빛나는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스타작가. 풍류(風流)를 동경하고 스스로 애주가임을 자처하는 성실한 한량(閑良)화가.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그의 삶과 같은 캔버스가 뿜어내는 역동적인 에너지에 지금 세계 미술시장은 흠뻑 매료됐다. 그의 남달랐던 유년시절과 학창시절, 그리고 지금의 블루칩작가에 이르기까지 한 폭의 그림 같은 인생이야기를 들어봤다. 

 매캐한 매연냄새와 높은 고층 건물이 가득한 회빛 도시 서울 방배동. 그는 청량한 웃음과 함께 바람처럼 나타났다. 경쾌한 오렌지색 체크 남방, 거꾸러진 모양의 재치 넘치는 안경을 걸친 그의 나이는 올해로 51세다. 하지만 그에게서 단 한 가닥의 흰머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죽하면 미스터피자의 회장이 그의 호를 ‘영소(永少)’(영원한 소년)이라 지었겠는가.

“여기 있는 작품이 내가 주민들에게 주는 장미꽃 선물이야”라고 말하며 방긋 웃는 그의 손끝을 따라가 보니 6m의 거대하고 생동감 넘치는 당나귀가 그려진 벽화가 삭막한 도심 속 지친 사람들을 정글 속으로 손짓하고 있었다.

한 대의 비행기가 그의 물감만을 위해 이착륙(離着陸)할 정도로 지금 사석원은 한국의 가장 주목받는 중견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이틀 전, 홍콩 아트페어를 성황리에 마치고 돌아왔다는 그의 인생은 바람 따라 흘러가는 구름의 여정(旅程)과 흡사하다. 그에게 예술은 곧 일상이요, 일상은 곧 예술인 것이다.

고흐를 사랑한 어린 소년

“나는 말을 늦게 시작한 편이라, 친구가 없었어. 그저 배 깔고 그림 그리는 것이 유일한 삶의 낙(樂)이었지.”
그에게 그림은 유년시절의 가장 좋은 친구였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는 당시 양장점을 운영하던 재단사였기에 그가 그림과 함께하는 시간은 자연스레 길어졌다. 특히 사석원은 달력에 있는 명화를 모사(模寫)하는 걸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그가 따라 그리던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이었다. 그래서 그도 고흐와 같이 물감을 섞지 않고 바로 캔버스에 덕지덕지 바른다고. 한편 그의 유년시절은 우리대학과 인연이 깊다. 우리대학 근처에서 태어나 초, 중, 고를 장충동과 신당동에서 생활한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이기도 했다.

대학에 와서도 그는 결코 붓을 놓지 않았다. “사생을 좋아했기 때문에 늘 스케치북을 애인삼아 끼고 다녔어. 포장마차에선 안주를 굽는 아주머니를 그릴 정도였으니까.”

노력하는 자에게 운이 따른다는 말처럼 그의 화가로서의 삶은 술술 풀렸다. 1학년 겨울, 5.16장학생으로 선정되어 일본에 초청된 그는 동경예술대학 졸업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된다. “같은 대학생이 맞나싶을 정도로 그림의 크기도, 고민의 깊이도 컸었다”며 그는 당시 받은 깊은 인상을 떠올렸다. 이는 그가 여행과 인연을 맺게 된 촉발점(觸發點)이기도 하다.

그의 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대한민국 미술 대전에서 대상을 거머쥔 그는 대상 상금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나게 된다. “졸업하고 바로 프랑스를 갈 수 있었지”라며 천진난만하게 웃는 그는 대한민국 최초이자 유일의 미술특기 군 면제자다. 전두환 정권 다음에는 이 제도가 바로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여행은 그의 영감의 원천

“돈을 가장 아깝게 쓰지 않는 방법은 ‘여행’이다”말할 정도로 그는 여행을 유달리 좋아한다. 아랍, 아프리카, 남미, 중미등 그의 발을 거치지 않은 대륙은 없다. 특히 이란여행은 관광비자 1호를 발급받기도 했다. 그의 여행 호기심은 갈라파고스 섬도 마다하지 않았다.

‘여행이 영감의 원천’라는 그는 금강산을 다녀와 ‘금강산’전을, 아프리카를 다녀와 ‘하쿠나마타타’전을 열었다. 내년에 공개할 ‘폭포’전을 위해 전국의 폭포를 여행하기도 했다. 불혹(不惑)을 넘어 지천명(知天命)에 이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여행을 꿈꾼다.

호기심 많은 성실한 한량

“고백하나 할까? 어릴 적에는 한복의 고름이 떨어지는 선이 너무 예뻐 요정 집에도 자주 드나들었어. 하하, 오해는 마. 단지 정말 한복 고름이 너무 예뻐서였어”라며 천진난만하게 웃는 그. 얼마 전에는 자타공인(自他共認)의 애주가답게 대폿집을 기행(紀行)한 경험을 바탕으로 ‘막걸리 연가’라는 단행본을 내기도 했다. 술뿐이랴, 비록 지금은 끊었지만 옛날에는 담배도 18년 동안 하루에 세 갑 정도는 거뜬히 피웠다고 한다.

“바둑이나 골프와 같은 잡기엔 관심도 없어”라고 말하며 그림 말고는 별다른 취미가 없다는 그는 ‘마시고 떠나고 그리는 것’이 이번 생의 천직(天職)인 것 같다며 다시금 환하게 웃는다.

마지막으로 그는 후배들에게 당부했다. “배움에는 때가 있어. 미술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시간을 얼마나 투자했느냐가 성공의 성패(成敗)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해. 재주가 있는 친구들이 창의적으로 반짝 성공할 수는 있지만 절대 오래가지는 않는 법”이라며 학생들에게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실력을 키울 것’을 충고했다.

그의 작가노트에서 엿 볼 수 있듯 그에게 그림은 친한 친구이자 애인, 편한 배게, 즉 인생의 전부다. “내 그림은 백사장의 셀 수 없는 수조(數兆)개의 모래알 중 한 알에 불과해. 그러기에 못 그린다고 소심할 필요도, 잘 그린다고 우쭐할 필요도 없어. 그저 묵묵히 나아갈 뿐이지”라고 말하는 그의 인생은 마치 한 폭의 생생한 그림과도 같았다. 이 시대 진정한 멋을 즐길줄 아는 풍류화가 사석원. 그는 오늘도 해맑은 화폭(畫幅)에 희망의 물감을 붓질한다.

백선아 기자 amy@dongguk.edu

 

 

사석원 동문 프로필
△1960년 출생 △동국대학교 예술대학 및 동대학원 한국화 전공 졸업 △프랑스 국립 파리 제 8대학 졸업 △84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수상 △월간 미술주관 한국의 인기작가 1위 △파리, 도쿄 애틀랜타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 주최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