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교 演映科卒業公演(연영과 졸업 공연)‘세 자매’를 보고

  精神(정신)의 淨化作用(정화작용)으로 演劇(연극)은 종합예술의 권좌를 이루고 있다. 물론 거기엔 舞臺(무대)와 觀客(관객)들 사이에 유기적인 연결이 되어 일종의 ‘너와 나의 카타르시스’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情緖的經驗(정서적경험)은 공감을 가져와 훌륭한 舞臺美學(무대미학)으로 승화하게 된다.
  본교 演劇映畵科(연극영화과) 卒業公演(졸업공연)이 안톤ㆍ체홉의 ‘세 자매’로 지난 21ㆍ22양일간 國立劇場(국립극장)에서 성황리에 상연되었다. 침체된 韓國劇界(한국극계)에 아카데믹 드라마를 추구하여 大學演劇(대학연극)으로서 새바람을 일어 많은 시사점을 남겨 주었다. 더구나 映畵(영화)ㆍTV 등의 눈부신 발달로 나날이 演劇(연극)과 觀客(관객)과의 거리가 벌어지고 있어 斜陽藝術(사양예술)이라 부르지 않는가.
  人生(인생)을 재창조하려는 연극인물의 表現意志(표현의지)와 더불어 관객들은 항상 재미에 굶주리고 있다. 독일의 ‘쉴러’는 “무대는 人生(인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도장이요, 종교요,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비교적 체홉의 作品(작품)들은 단조로운 분위기에 知的(지적) 정수가 응축되고 있다.
  특히 전체적인 앙상블에 중점을 두어 진부한 리얼리즘에서 새 차원의 극복으로 딛고 서야 될 것이다. 이점 무게 있는 레퍼토리를 선정한 이번 공연의 벽두부터 모험이었는지 모르겠다. 공부하는 자세로 임한 게스트와 스탭진은 ‘무대를 위한 무대’에만 멈추지 않았으리라 믿지만.
  고도의 정밀성으로 리얼리즘을 구현하기엔 ‘무대 위에서 人生(인생)의 眞實(진실)을 추구’하는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에서부터 시작된 힘겨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이런 조바심 속에서 이번 公演(공연)은 기성 극단의 안일성과 매너리즘의 타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참신한 아마추어리즘의 大學演劇(대학연극)에 분명 활력 있고 성실한 자세가 절실하리라 본다.
  뚜렷한 藝術性(예술성)이 없어 평범한 수준의 작품 해석과 교통정리식인 演出(연출)의 부재는 큰 과오가 아닐 수 없겠다. 東洋人(동양인)으로서 西歐(서구)의 번역극을 상연할 때 갖는 作品(작품)에 대한 觀點(관점)의 확고한 연출 의식이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국적 불명의 舞臺(무대)에서 과연 관객은 무엇을 공감하며 재미를 찾겠는가.
  行動(행동)쪽의 협소와 단조로운 音調(음조)엔 기초적인 훈련이 다시 검토되어야겠다.
  그리고 엄연히 舞臺美術(무대미술)도 演劇(연극)의 중요한 일익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이 다만 背景(배경)을 위한 장식품이 아님은 자명하리라 본다.
  성의와 創意力(창의력)이 없는 무대장치는 전체적인 연극 분위기에 큰 손실을 가져다준다. 장난감 같은 小道具(소도구)까지 단조로운 무대는 작품의 해석에서부터 ‘재미’를 앗아가고 있다. 조명의 활용 또한 없어 더욱 부채질한 감이 없지 않다.
  아카데믹ㆍ드라마에 發音(발음)이 부정확하다든지 臺詞(대사)를 터무니없이 빼는 실수 등은 감싸주자. 다만 발랄하고 성실한 연구의 意志(의지)가 물씬 풍긴다면 그것만으로도 가볍게 극장문을 나설 수 있을 것이니까.
  하여튼 침체와 안일 속에서 허덕이는 한국 상업극단에 참시한 새 목소리는 믿음직스럽게 들려올 것이다.
  다만 公演回數(공연회수)채우듯 ‘큰 아픔’없는 무대는 삼가야 될 것이다. 演劇的(연극적)인 기초 훈련도 중요하겠지만 뚜렷한 우리의 演劇精神(연극정신)의 정립에 앞장서야할 것이다.
  단절된 傳統劇(전통극)의 계승 문제, 상업성위주의 레퍼토리 선정문제, 흥행으로서의 번역극을 무조건 선택한다든가, 더욱 創作劇(창작극)의 불모, 小劇場(소극장) 등 좁은 무대, 무대미술ㆍ조명등의 낙후성, 이렇듯 모든 것이 참담한 분위기에서 줄기차게 演劇(연극)이 이어져 온다는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겠다.
  大學劇(대학극)에서는 타성의 기성극단보다는 실험성이 강하고 뭔가 ‘새롭고 참신한 무대’를 가져야겠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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