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니소스’에서 유래된 축제의 의미

홍윤기
철학과 교수
우리가 축제(祝祭)를 단순히 축하제전(祝賀祭典, festival, celebration)이 아니라 축복제례(祝福祭禮, carnival)의 줄임말로 이해하는 데 동의한다면, 지구상의 모든 ‘축제’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실행되는 관행이 술을 마시는 것(飮酒)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별다른 반례를 대지는 못할 것이다.

취하도록 술을 마시는 것,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다가 가끔 목숨의 위험도 무릅쓰는 일이 허용되지 않는 축제를 상상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축제를 한다면서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넌센스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물을 수 있다. 축제에서 왜 술을 “마시는가?” 그런데 축제와 술의 관계를 더 정확하게 알려면 이렇게 평범하게 물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축제 때 술마시고 광란을 떠는 것은 단지 습관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의무이기도 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축제와 술의 관계를 물으려면 이렇게 물어야 한다. 축제 때에는 왜 술을 “마셔야 하는가?”

고대 유럽부터 있어온 그 모든 축제의 원형을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제에서 찾는 것은 이제 한국의 모든 문화연구가들 사이에서도 통용되는 학술적 통설이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트라키아 지방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 디오니소스제의 더 시원적 원형이 이집트 문명의 중심축인 오시리스 숭배에 있다는 것도 한국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오시리스, 디오니소스, 그리고 나중에는 예수 경배로 이어지는 이런 축제의 핵심을 이루는 스토리 라인이 ‘죽음과 부활’을 핵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아직 충분하게 새겨진 것 같지 않다.

위의 세 인물들은 신화에서 모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다는 서사로 축제 촉발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오시리스의 몸은 열네조각으로 갈가리 찢겨 사방으로 흩뿌려지는데, 그의 누이이자 아내인 이시스가 찾아낸 것은 오직 그의 ‘생식기’뿐이다.

제우스의 서자인 디오니소스는 헤라의 질투로 사지를 찢기워 버려졌으나 그의 이복누나인 아테네에 의해 ‘심장’만 건져진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는데 그의 가족들에 의해 ‘육신’만은 온전하게 보존된다. 그리고 이 생식기, 심장, 육신은 그네들의 ‘죽음’ 이후에 ‘다시 살아난다.’

이렇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再生), 또 다시 활력을 되찾는 것(復活)은, 인간이라면 거의 모든 이가 바라는 일일 것이다. 더 나아가, 자기가 실제로 그럴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죽었다 살아나는 일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축제는 ‘살아있는’ 것을 기뻐하는 잔치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난’ 것을 기뻐하는 제사이다. 따라서 죽을 일이 없다면 축제 같은 것을 열 일이 아니다. 죽을 일이 없다면 죽는 것과 유사한 일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술, 광기,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폭동에 가까운 광란이 축제에 필수적인 이유는 그것이 인간 존재의 심연인 죽음을 실제로 체현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음까지 각오하면서 그 모든 문화들이 축제를 수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상당수의 축제들이 겨울을 벗어난 봄의 초입에 열리는 것은 생명을 만개시키는 계절적 순환, 우주적 이법에 인간을 접속시킨다는 보다 심층적인 의미를 근거로 한다.

다시 말해서 축제는 우주의 로고스를 전인적으로 체험하기 위해 세속의 일상성에서 벗어나는 일종의 내재적 초월이다. 술은 죽지 않을 만큼 인간을 죽여주기 때문에 취한 상태에서 인간을 벗어나게 한다. 그것은 다시 살아날 생명에의 기약이다.

그런데 상업화되어 술을 단지 소비하기만 하는 요즈음의 축제들이 과연 이런 우주론적 아우라를 전달할 수 있을까? 다시 살기를 바랄만큼 자기를 죽여줄 일을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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