實驗(실험)과 硏究(연구)가 前衛劇(전위극)의 生命(생명)

  현재 연극계에서 일상용어화 되고 있는 전위연극이란 단어는 실상은 이질적인 몇 가지 部類(부류)의 내용이 합성된 것이나 그것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전위연극이란 세계 제1차 대전 후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치관의 변질이라는 압력에 의해 事實主義(사실주의) 演劇(연극), 혹은 自然主義(자연주의) 연극의 근본인 <리얼리즘>이 빛을 잃게 되면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특성에 의해 被現主義(피현주의), 超現實主義(초현실주의), 叙事劇(서사극), 恐怖劇(공포극) 등으로 분류 호칭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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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위연극의 생명은 역시 실험과 연구에 있을 것이며, 전통극의 파괴가 필수조건이라 하겠다. (연극자체의 파괴가 아니라) 그러나 전통극을 실시에 그 전부를 완전 폐허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며, 따라서 분야별 개혁이 시도될 것이며 그 서두는 대부분 극작가와 연출가였다.
  극작가는 프로이드의 영향으로 인한 인간심리의 심층을 파헤치려는데 주력했고, 연출가는 무대의 구조와 구성에 개혁을 시도했다.
  작품은 작가마다 특이한 수법이 연구되었으니 현실보다는 신화적인 이야기, 격렬한 절규나 그로테스크한 유머, 혹은 새로운 언어의 창조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연출은 무대를 변형시켜 보기도 하고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구성해보기도 하며 선과 색채와 대사와 행동과 물체를 결합시키려고 하였으니, 추상적인 장치라던가 웅장한 전체 같은 것이 시도되었다.
  특히 이때의 모든 연극인들은 무대의 구조를 개혁해보려고 노력을 했다.
  독일에서는 라인할트가 一九一九(일구일구)년 베를린의 그릇세ㆍ샤우스필하우스에서 鬪技場(투기장)의 형태를 한 극장을 실현하였다. 그러나 반원형의 전방이동 스테이지는 예나 다름없이 프로세니움ㆍ아취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소련에서는 메이엘홀드가 막과 프로세니움ㆍ아취를 없애고 스포트라이트를 노출시켰다. 오프로쁘코프는 무대와 객석을 한 자리에 설정하였고, 또 圓形劇場(원형극장)을 추진했으며 결국 一九三二(일구삼이)년 워싱턴에서 펜트하우스라는 원형극장의 건설을 보게 되었다. 그의 V字變形劇場(자변형극장)(一九二四(일구이사)년 뎃사우의 바우하우스 극장)이나 전체적 종합 극장의 설계는 오늘날의 극장건축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은 연극개혁의 야심은 결국 몇 사람의 선각자만의 업적으로서 그치게 했을 뿐이며, 2차 대전 직후 재건된 독일과 소련의 극장들은 예나 다름없이 전통적인 형식을 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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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현주의 연극은 중부 유럽이나 독일이외에서는 별로 상연되지 않았지만 그 영향은 현재에 까지 줄기차게 미치고 있다. 이 연극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등장인물은 어떤 전형에 의해 바뀌어졌고, 성격이나 갈등이나 환경 따위의 개념은 버려졌으며, 서정은 극적요소로 바뀌어졌다. 이미 행동이나 장면은 없고 다만 리듬과 긴장만이 내용과 관계가 있게 된다. 대본은 교훈극의 논리적 양상을 보여주며 새로운 인간은 일상성에서 초현실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 있어 관객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일련의 주인공이 되어 숨을 거둔다.
  표현주의 연극은 오늘과 같이 잘못 문명화된 세계를 통해서 노인의 상징을 살해하려고 하는 도발과 폭력의 연극인 것이다.
  표현주의자들의 공적은 연출이나 무대수법의 활용분야에 있어 더욱 현저하게 나타난다. 자연주의나 인상주의에 대해서 반발함으로서 표현주의는 수공업자적인 무대의 재현이나 과장하는 태도를 거부한다. 작품의 특징을 이용하여 무대나 극장을 자연주의가 구성을 사실처럼 만드는데 필요하다고 인정한 모든 과잉상태에서 해방시켰다.
  알벨띠, 볼헬트, 오널, 와일더, Tㆍ윌리암스, 뒤렌마트 등의 작품들 가운데 표현주의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며, 브레히트는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연극의 혁신적인 시도가 낡은 연극 관중의 무관심이나 적의를 불러일으키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관중을 찾았으나 결국 찾지를 못했고, 그것은 환멸을 뒤따르게 했고 갖가지 실험을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새롭다고 하더라도 소박한 관중들은 본능적으로 리얼리즘의 연극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피스까들의 좌절, 메이엘홀드의 연극의 十月(시월)계획의 실패의 원인이 관중의 냉대에 있었다.
  성공한 실험도 있으나 극히 단기간에 끝났으며, 그나마 정치체제나 사회형태에 밀접하게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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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一八九六(일팔구육)년 파리에서 상연된 알프레드ㆍ쟈리의 유부王(왕)(Ubu-Rio)은 초현실주의의 효시의 작품으로 그 성과가 퍽 컸던 모양이다. 이 작품은 그 동안 내려오던 무대상의 약속 같은 것을 아예 무시하고 있었다.
  그 후 쟈리의 영향을 받은 아뽈리넬의 ‘티레시아스의 유방’과 꼭또의 ‘에펠탑의 신부’등의 작품이 뒤를 이었으며, 이는 인간 스스로의 허점, 공허, 그리고 자신의 눈에 익은 그 하찮은 노릇들을 보고 허허 웃는 것이다.
  이 초현실파의 이론은 앙또냉ㆍ아르또에 의해 확립을 보게 되었다.
  아르또가 활동한 기간은 일ㆍ이차 대전을 모두 거치게 되는데 특히 이 기간에 대두된 건 초현실주의이며 리얼리즘의 분쇄였다.
  아르또는 “연극이란 성격을 설명하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 자는 누구냐?”고 물었다.
  그가 가장 깊이 간직한 꿈은 화려한 예술적 구경거리가 아니라 관객과 배우사이의 친목을 이루어주는 새로운 연극을 프랑스에다 수립하는데 있었다.
  그것은 원시사회에서 보는 것처럼 呪術(주술)의 연극이요, 문화전체가 그 생기와 진정한 표현을 찾을 수 있는 한 개의 집단적 예술이 되는 것이다. 그가 연극을 위해 바란 것은 자신이 반ㆍ고흐의 그림에서 보았던 바로 그 광란과 격동이었다.
  그는 연극상연은 모름지기 일종의 人間開眼式(인간개안식)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 동안에는 관중은 두려움 내지는 무서움까지도 느낄 것이며, 극도에 이를 때 관중은 자신의 이성을 잃고 말게 될 것이며, 이러한 연극행위에 使嗾(사주)받은 공포와 광란의 경험을 느끼면서 관중은 비로소 초인간적 성질의 새로운 일련의 진실을 터득하는 입장에 서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연극을 危險(위험)과 殘酷(잔혹)에 귀결시키는 방법을 제안하였다. 이것으로서 귀신을 불러낼 수 있다고 하며, 그렇게 될 때 무대 위에서 말해지는 말은 꿈속에서 갖는 그런 힘을 갖게 될 것이며, 언어가 呪文(주문)이 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의 기본적 이론과 보조를 같이 하며 아르또는 예술이 人間悟性(인간오성)을 훨씬 넘어 形而上學的(형이상학적) 진실에 이르기를 꾀하는 경험임을 주장하고자 했다. 그의 주장은 연출부문에서 현대에 가장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현재 그의 추종자들은 세계 곳곳에서 활발한 실험과 연구와 활동을 하고 있으며 전위연극의 장래는 이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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