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革(문혁)과 李杜優劣論(이두우열론) 再燃(재연)

  지난 71年(년) 11月(월) 公刊(공간)된 郭沫若(곽말약)의 ‘李白與杜甫(이백여두보)’는 東洋學界(동양학계)의 耳目(이목)을 모았었다. 그가 中共(중공)의 要人(요인)인데다 文學人(문학인)의 領首(영수)라는 점에서도 화살이 集中(집중)됐다. 특히 1966년 7월 文化革命後(문화혁명후) 호된 비판을 거쳐 나온 論著(논저)로 종래의 杜甫至聖論(두보지성론)을 뒤엎은 보람판이란 점에서 學界(학계)의 눈총을 샀다. 이러구러 요지경 속이다.
  사실 來往(내왕)은 없었지만 杜甫尊崇(두보존숭)의 업적은 익히 짐작하고 있다. 馮至(풍지)의 ‘杜甫傳(두보전)’과 蕭滌非(소척비)의 ‘杜甫硏究(두보연구)’ 등은 새빨간 少壯學者(소장학자)들을 시켜 毛澤大(모택대)의 문예정책의 갈기를 가른 컴파스였다. 이로 말미암아 杜甫(두보)의 위대성이 擴播(확파)되고 杜詩(두시)의 社會性(사회성)이 提高(제고)되어 마치 千年前(천년전)의 杜甫(두보)가 中國共産党(중국공산당)을 위해 환생한 듯한 착각까지 안겼었다. 各市(각시)의 인민문학사로 하여금 ‘杜甫詩選(두보시선)’의 數種(수종)을 印行(인해)하여 杜甫(두조)의 바람을 일구고, 上海商務印書館(상해상무인서관)의 宋本(송본) ‘杜工部集(두공부집)’ 影印(영인), 中華書局(중화서국)의 ‘杜甫硏究論文集(두보연구논문집)’ 刊行(간행), 그리고 嗣奭(사석)의 ‘杜臆(두억)’, 施鴻保(시홍보)의 ‘讀杜詩說(독두시설)’ 등 전문서를 간행하여 文字(문자)이래 최고로 받든 인민시인에의 고비를 느꾸지 않았다.
  出版許可(출판허가)는 물론 用紙(용지)의 배급까지 받는 中共(중공)으로서는 여간한 用心(용심)이 아니었다. 특히 1962년 杜甫生誕(두보생탄)1천2백50주년紀念大會(기념대회)는 국내뿐만 아니라 國外(국외)까지도 법석이었었다. 各國(각국)의 杜詩學者(두시학자)를 대대적으로 초빙해서 杜甫(두보)의 자랑으로 組織力(조직력)을 품앗이했었다. 그때 郭沫若(곽말약)은 開會辭(개회사)를 통해 杜甫(두보)의 顯彰(현창)을 수놓은 大會長(대회장)이었다. 비록 輕飛行機(경비행기)였지만 各國(각국)의 대표를 태워 杜甫(두보)의 발자취를 하늘에서 더듬게 하는 조심까지 보였었다.
  당시 거기에 參列(참렬)했던 日本國(일본국)의 土岐(토기)시는 그의 ‘杜甫草堂記(두보초당기)’에서 그 보람찬 동안을 과한 것을 읽었다. 심지어 成都(성도)에는 杜甫硏究圖書館(두보연구도서관)이 있어 온 거리가 杜甫(두보)로 누벼졌고, 학생들의 연필까지도 ‘杜甫(두보)’의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그러니 두보의 莞花草堂(완화초당)은 聖域(성역)으로 꾸며져 市民(시민)의 崇仰(숭앙)을 독점했다고 擧國的(거국적)인 尙社風(상사풍)을 기리고 있음을 읽었다. 그런데 1970년 杜甫(두보)1천2백 周忌(주기)는 별로 대단치 않았던지 소식이 전혀 끊겼었다. 물론 文化革命(문화혁명)의 무자비한 隊列(대열)이 有識(유식)을 짓밟던 서슬이었고 보니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듯 神主(신주)처럼 모시던 杜甫(두보)를 再評價(재평가)하는 동시에 批判(비판)의 대상이 됐다는 것은 실로 놀랍다. 물론 少康(소강)이 낭만을 불러 李白(이백)을 치키는지도 모른다. 郭沫若(곽말약)이 진작 卷頭(권두)에 搞(고)한 ‘毛澤東語錄(모택동어록)’이 열쇠의 초점임은 뻔하다. “지난 시대의 文藝作品(문예작품)을 놓고 우리 無産階級(무산계급)은 우선 作者(작자)는 人民(인민)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던가, 또한 역사상에 진보적인 의의가 있었던가 없었던가를 살펴서 거기에 따라서 새로운 태도를 취해야 한다”의 낙인을 찍어 古典(고전)에서 封建的(봉건적)인 잔재를 발려버리고 그 民主性(민주성)의 精華(정화)를 흡수하는 것은 民族(민족)의 新文化(신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그 民主性(민주성)과 革命性(혁명성)을 강조하고 있음이 뚜렷하다. 이는 參與意識(참여의식)이 대단하고 門閥觀念(문벌관념)이 굉장하고 功名心(공명심)이 무서운 愛國燐民(애국인민)의 杜甫(두보)를 막다른 골목으로 모는 갈쿠리가 됐던 것이다. 權勢(권세)에게 빌붙는 送贈詩(송증시)가 태반이고, 그들과 어울린 杜甫(두보)를 喪家狗(상가구)로 몰고 있다.
  벼슬을 위해서는 禽獸(금수)가 무안하게 ‘奉贈(봉증)’의 웃전을 놓는 짐짓을 아주 못마땅하게 다루며 疎脫(소탈)한 李白(이백)을 견주고 있다. 특히 杜甫(두보)의 地主生活(지주생활)을 함부로 뇌까리고 있다. 하긴 농사를 지어 곳간을 풍성케 한 杜甫(두보)다. 마름을 두고 종을 거느리며 귤밭도 다스렸다. 울타리를 뚫고 들어와 대추를 따먹는 과부를 어엿비 여겼지만 그것은 눈가림이라 심히 꼬집고 있다. 차라리 蜂起(봉기)에 가담한 李白(이백)이 한결 革命的(혁명적)이며 民主的(민주적)이라 推仰(추앙)하고, 杜甫(두보)의 字戱(자희)에 不過(불과)한 反動的(반동적)인 인색이라 몹시 나무라는 先後倒錯(선후도착)이 무섭도록 作爲的(작위적)이다.

  한편 杜甫(두보)의 종교신앙을 들어 李白(이백)의 奔放(분방)을 오히려 꼽고 있다. 따라서 杜甫(두보)의 “致君堯舜上(치군요순상) 再使風俗淳(재사풍속순)”은 허울 좋은 방패로 ‘每飯不忘唐(매반불망당)’의 기림은 人民詩人(인민시인)의 이름을 받았으나 실은 때 묻은 少壯(소장)들의 儒家的(유가적)인 씨앗이 저지른 잘못이라고 개를 패듯 나무라고 있다. 嗜酒(기주)만 해도 李白(이백)보다 一頭(일두)가 높은 杜甫(두보)라면서 李白(이백)에게는 全作(전작)의 16%에 해당하는 飮酒詩(음주시)가 있지만, 杜甫(두보)는 무려 21%가 넘는다고 初步的(초보적)인 統計(통계)까지 곁들이고 있다.
  하여간 郭沫若(곽말약)의 ‘李白與杜甫(이백여두보)’는 從來(종래)의 杜甫第一觀(두보제일관)에 찬물을 껀진 警告(경고)이자 文化革命(문화혁명)의 된서리를 맞은 他意的(타의적)인 制動(제동)에 의해 꾸며진 脚本(각본)임에 틀림없다.
  이는 10年前(년전) 杜甫生誕紀念大會(두보생탄기념대회)에서의 杜甫觀(두보관)과 10年後(년후) 文化革命後(문화혁명후)의 李白觀(이백관)과는 너무도 相反(상반)된 異論(이론)임에서 문제가 야기된다. 이것이 大詩人(대시인) 郭沫若(곽말약)의 著作(저작)이고 게다가 文化革命的(문화혁명적) 觀點(관점)으로 뜯어 맞춰진 自家撞着(자가당착)이라서 衆目(중목)을 끌었다.
  그러나 李杜(이두)의 優劣論(우열론)은 언제고 마무리가 될수는 없다. ‘揚杜抑李(양두억이)’가 거셋는가 하면 ‘斥杜尙李(척두상이)’로 활개를 편 것이 學風(학풍)이었다. 사실 李白(이백)은 仰望不及(앙망부급)의 천재이고 杜甫(두보)는 攀錄取著(반록취저)의 地才(지재)라는 점에서 學詩者(학시자)는 그 可能性(가능성)에 솔깃해서 평생을 씨름했던 것이다. 더구나 우리 前修(전수)들은 李朝(이조)에 접어들면서 蘇軾(소식)과 李白(이백) 대신 杜甫(두보)에 쏠려 ‘杜詩諺解(두시언해)’가 판을 치고 이 풍토는 마침내 科擧(과거)의 必須書(필수서)가 되어 ‘由蘇入杜(유소입두)’와 ‘由陞入杜(유승입두)’의 사다리까지 놓여 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李白(이백)을 저버린 것은 절대 아니다. 李白(이백)이 回生(회생)해도 杜甫(두보)의 作興(작흥)에는 不及(불급)함과 같이 杜甫(두보)가 換生(환생)해도 李白(이백)의 卽興(즉흥)은 어림도 없다. 요는 各者(각자)의 嗜好(기호)에 따라 운두가 앉혀지는 법이지 그 優劣論(우열론)을 억지로 뒤바꿔서까지 國論(국론)을 宣明(선명)해야 할까 곰곰 생각킨다.
  끝으로 이 目的(목적)을 위한 異論(이론)이 이웃인 中共(중공)에서 꾸며졌는데도 이제야 겨우 論難(논란)케 되었으니 딱하다 못해 한심스러워 절로 머리가 짓숙는다. 日本國(일본국)의 讀杜論(독두론)은 당장 自作(자작)인양 誌面(지면)을 누비는 판이라 더욱 면구스럽다. 내남없이 覺醒(각성)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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