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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3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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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 연극 80년사 <4> 실험소극장 개관1960년 ~ 1970년 : 동양 초유의 실험소극장 개관으로 앞서가

   
   
1960년대에 들어 우리대학의 연극학과는 전문적인 시설을 갖춘 소극장을 현재의 동대신문사 자리인 대학본관 1층에 마련하고 우리나라 연극계를 주도해 나간다. 진취적인 감성으로 유치진, 이해랑, 장한기 교수의 지도로 장욱제, 이성웅, 김무생등의 배우들을 배출하며 위상을 공고히 해나갔다.

연극계의 심벌로 부상

우리대학 교육방송국은 연세대에 이어 두번째로 대학방송국 인가를 받았다. 1960년 6월 14일 첫 전파를 쏘아올렸으며, HMYB라는 콜사인으로 매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청취자를 찾아갔다.

같은 해 9월 5일 현재의 대학본관1층 동대신문사 위치에 준공된 실험소극장은 94석 규모에 관련 제반시설을 갖춰 동양 초유의 시설을 자랑하기도 했다.

개관작품으로는 ‘오 머나먼 나라여’를 무대에 올렸는데 당시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양동군 강사의 연출로 김기일, 마영달(이성웅), 피세영, 김흥우, 김호정(진홍) 등이 출연하여 눈길을 끌기도 했다.

특히 이곳이 연극계 세미나장, 극단 실험극장 등으로 사용되면서 이후 신무대 실험극회, 칠일회 창립의 초석이 되기도 했다.

또한 유치진, 이해랑, 김정환, 장한기 등 저명 교수를 비롯해 오학영, 이근삼, 김승규 등 동문 극작활동도 활발해졌고, 김재형 문예부장의 주도로 ‘전국남녀 중고연극경연대회’를 통해 청소년의 기대를 고조시키기도 했다.

더욱이 미국 유타대학 ‘뎀 양키스’공연과 콜로라도 대학극단의 ‘Bells are ringing’ 연이은 공연, 1963년 전동문 재학생 연극, 영화, 방송관계자 총결집 동국극회의 창단과 장호(김장호)동문의 시극동인회의 창단, 그리고 1967년 국내유일의 연극전문지 ‘연극학보’의 창간은 우리대학 연극영화학과 (63년연극·영화학과 통폐합 조치에 의함)는 연극계의 심벌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공연 전통 창조

   
 
   
 
학생회 연극반에서 활동하던 김선경이 작품 ‘고래’를 동계방학 간 워크숍공연으로 기획하여 정진(수황), 김호정, 이유정(수영), 김기일, 윤석균, 피세영, 김흥우가 가담, 1961년 1월 공연되었다.

김선경은 이후 신무대실험극회에서 활동하다가 영화조감독을 거쳐, 1972년 ‘잘 살아다오 내 딸들아’로 데뷔, ‘빌리 장’, ‘낮과 밤의 두 황제’, ‘흑룡’, ‘산동 물장수’, ‘악녀의 밀실’ 등을 비롯, 1985년 23번째 작품 ‘마지막 여름’을 끝으로 요절하고 만다.

‘고래’에 이어 ‘신입생환영공연’을 마련하자고 김재형이 제안, 학생회에서 제작비 일부를 대어 ‘월출’이 공연되었다. 그리고 1961년 부터는 이해랑 교수의 지도로 ‘나는 살아야 한다’가 최초의 ‘실습공연’으로 상연되었다. 여름방학에는 오닐의 ‘위험지역’(1기), ‘동으로 카티푸를 향하여’(2기)를 연습하였고 그 결과 ‘겨울 워크숍 공연’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졸업공연’은 1964년 유치진 작품 ‘왜싸워’를 시작으로 ‘오이디프스왕’, ‘겨울과 봄사이’, ‘세일즈맨의 죽음’순으로 이어졌다. 더불어 졸업생을 환송하는 공연도 있어야 한다고 여겨 1963년 12월 말에는 하유상 작품 ‘회색의 크리스마스’를 ‘졸업환송공연’으로 올리기도 했다. 이밖에 ‘원어극공연’, ‘지방순회공연’도 비정규적으로 지속된 바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동국연극’의 공연전통이 마련된 것이다.

연극ㆍ영화ㆍ방송계 진출

1962년 드라마센타 개관공연을 시작으로 스텝 캐스트로 이영식, 유흥렬, 이성웅, 피세영, 한수철, 김흥우, 김기일, 이일웅, 김영일, 김무생, 이신재 등이 참가했고 방송계는 1961년 KBS-TV에 피세영, 김기일, 김호정이 합격한 이래 송창호, 이일웅, 이신재, 김용호 등이 진출했다. 또한 1963년 성우모집에는 동아방송(DBS)에 이완호, 김무생이 합격,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편 김기일은 MBC 악역 탤런트로 유명해 졌는데 ,그는 ‘제3극장’, ‘사계’, ‘춘추창단원’을 거쳐 MBC로 자리를 옮겨 정착했다. 제3극장의 ‘새우잡이’, ‘카니발 수첩’에서는 노래와 춤, 그리고 악기 다루는 솜씨가 빼어나 뮤지컬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다분히 보였으나 뮤지컬이 지금처럼 붐을 형성치 않아 방송에 전념했다.

MBC 개국과 함께 KBS에서 옮겨 악역배우로 정평이 나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사랑과 야망’과 ‘제2공화국’을 꼽을 수 있다.

김호정은 입학하면서 한재수의 한일배우학원 출신들로 구성된 ‘8월극장’에 가담, 오학영의 ‘꽃과 십자가’에서 명연기를 보여주었고 MBC개국과 함께 자리를 옮겨 ‘수사반장’의 서형사역으로 인기를 모았으나, 1971년 지병으로 돌연 활동을 중단, 1978년 요절했다.

이성웅(마영달)은 1965년 ‘제3극장’을 전세권, 이영식과 함께 창단했고, 이듬해에 자유극장, 1969년에는 춘추, 1971년에는 산울림 창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성우생활을 이어갔고, 이후 KBS-TV의 탤런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재학시에는 ‘오 머나먼 나라여’, ‘왜 싸워’, ‘카니발 수첩’, ‘따라지의 향연’, ‘신의 대리인’, ‘한꺼번에 두 주인을’, ‘비쉬에서 일어난 일’, ‘소’, ‘꽃피는 체리’, ‘가위 바위 보’, ‘건강진단’, ‘환절기’, ‘동물원이야기’ 등에 출연하였다. 그는 키도 훤칠하고 리더십도 있어 탤런트협회장을 지낸바 있고, 이후 인천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1979년 ‘야 곰례야’에서는 마영달 역을 맡아 인기를 모으자 이름까지 등장인물명으로 개명했다. 이 작품은 TBC에서 첫방송되어 중간에 방송통페합으로 마지막 방송을 KBS에서 끝낸 인기 연속극이었다.

장욱제(시권)는 재학시절에도 날쌘 동작과 고음의 음성으로 작품속에서 인기를 독차지하였는데 1970년대초 가장 인기있었던 드라마 KBS ‘여로’에서 정민의 아들 ‘영구’ 역을 맡아 인기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후 ‘영구’라는 독특한 캐릭터 때문에 방송출연이 뜸해지자 1973년부터 영화 ‘두형제’, ‘용구와 용팔이’, ‘촐세작전’, ‘성춘향전’, ‘검은 띠의 후계자’등에 출연하기도 했으나 이후 연기생활을 접고 전업했다.

김무생은 성우생활을 하면서 ‘동우극회’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자유극장, 산울림 등의 창립단원으로 활동했다. ‘소’, ‘왜싸워’, ‘제17포로 수용소’, ‘해녀뭍에 오르다’, ‘석학’, ‘동물원의 호박꽃’, ‘대머리 여가수’, ‘마리우스’, ‘흑인창녀를 위한 고백’, ‘광무제의 밀사’, ‘고도를 기다리며’, ‘비쉬에서 일어난 일’, ‘겨울 사자들’, ‘가위 바위 보’, ‘건강진단’, ‘환절기’, ‘블렉 코메디’, ‘밤으로의 긴여로’ 등의 연극에서 중후한 연기를 보여주었고, 만년에는 방송극의 대표적인 연기파 탤런트로 활약했다. 2005년 4월16일 폐렴으로 별세했다.

한편 1963년에는 연극영화 통폐합으로 ‘연극영화학과’가 되었고, 1969년 유치진 교수가 퇴임하면서 유세형 교수가 영화부문을 전담하게 되었다.

김흥우  연극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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