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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3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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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동국가족상 수상자- 임학과 허문실 하종태 동문 가족“동국인 부부에서 동국인 가족으로, 6명이 동국인입니다 ”
   
 
   
 
캠퍼스를 떠나 낯선 곳에서 문득 만난 대학동문은 매우 반갑다. 마치 큰 공통점이라도 발견한 듯 손을 맞잡고 반가워하고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캠퍼스의 즐거웠던 기억을 나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처음 만난 사람일지라도 가족과도 같은 끈끈한 유대감이 느껴지곤 한다. 그런데 가족이 동문이면서 동문이 가족인 사람들은 어떨까? 여기에 선배가 남편으로, 자녀가 후배가 된 특별한 가족이 있다.      

화창한 봄날, 캠퍼스에서 만난 하종태(임학87졸), 허문실(임학88졸) 동문 가족은 여전히 학교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했다. 

“학교가 많이 변했어요. 팔정도도 더 예뻐지고, 도서관도 더 커졌네요. 안그래요, 여보?”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한 부부는 모교의 달라진 모습에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이번에 동국가족상을 수상한 허문실 가족은 그야말로 동국 동문회다. 허문실 씨의 어머니 고(故) 이영숙(국어국문57졸) 여사를 비롯하여 남편인 하종태 씨, 오빠 허정(연극영화88졸) 씨가 모두 우리대학 출신이다. 뿐만 아니라 자녀인 하경수(경영1) 군은 이번에 11학번으로 우리대학에 입학했고 인기 탤런트 이윤미(연극영상학부07졸) 씨와는 조카와 고모 사이다.

허문실 동문이 우리대학을 선택한 것은 어머니인 고 이영숙 여사의 도움이 컸다. 우리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고 이영숙 여사는 적극적으로 우리대학에 입학할 것을 조언했다고 한다. 이것이 허문실 동문과 우리대학의 첫 번째 인연이었다.

허문실 동문과 하종태 동문의 인연 역시 우리대학에서 맺어졌다. 두 사람은 선후배 사이로서 함께 대학 생활을 했다. 남녀 교제(交際)가 자유롭지 않았던 당시 분위기 때문에 재학시절에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지만 졸업하고 나서 교제를 했고 결국 결혼에 성공했다.

“제가 원래 대학원에 진학(進學)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남편이 대학원을 가지 말라는 거예요. 자기랑 결혼하자고……. 그 때 이 이가 잡지만 않았어도 우리대학 교수님이 됐을 텐데. 호호”

허문실, 하종태 부부의 대학 생활은 추억과 낭만이 깃들어 있었다. 당시 농과대학 임학과였던 그들은 매 주말마다 현장 실습 때문에 전국을 돌아 다녔다. 고기를 굽고 술잔을 기울이며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르던 것이 엊그제 같다며 회상(回想)했다. 허문실 동문은 대학시절 농과대학 학생회 활동을 했다. 사회적으로 어수선한 80년대, 학생자치 조직이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팔정도에서 퍼포먼스하던게 생각이 나네요. 억압(抑壓)받는 민중을 상징(象徵)하는 엎드린 사람들을 제가 밟고 지나가는 거였죠. 앞에 나서는 것이 싫어서 안하려고 했는데 연극영화과였던 우리 오빠가 기획한 건데 안할 수가 없더라고요”

허문실 동문과 하종태 동문의 만남은 특별했다. 기자가 하종태 동문에게 그녀와의 첫 만남에 대해 묻자 당황한 듯 손사래를 쳤지만 천천히 그 때를 회고(回顧)했다.

“원래 임학과에 여자는 별로 없었죠. 그러니 눈에 안 띌 수가 있겠어요? 내가 임학과 학생회장도 했는데 항상 웃고 있다고 이 사람이 칭찬을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사람이다 싶었죠” 

하종태 동문은 현재 산림조합 상무이사를 맡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산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평소 산과 산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전공도 임학을 택했고 결국 직업까지 산과 떼어 놓을 수 없게 되었다. “임학과 말고는 다른 과는 생각도 할 수 없었지요. 전공을 정해 놓고 대학을 정하니깐 명성이나, 실력이나 우리대학만한 곳이 없더라고요”

허문실 동문은 원래 의상디자인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보다 유망한 진로를 택하기 위해 임학과에 입학하게 됐다.

“생소했죠. 임학과라니. 도시에서 나고 자랐는데 어떻게 나무 이름이며 식생(植生)이며를 알 수 있겠어요. 그나마 우리대학의 전통과 저력을 믿고 꾸준히 했죠. 어찌됐던 짝도 만나고 잘 된거 아니겠어요? 호호”   

그때나 지금이나 등록금은 대학생들에게 큰 고민거리였다. 하종태 동문도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학 생활 내내 도서관 근로 장학생으로 일했다.

“학비를 마련하느라 도서관에서 근로 장학생을 했죠. 매번 바뀌는 근로 장학생을 계속하려고 원칙(原則)을 칼 같이 지켰어요. 한 번은 대학원생이 도서를 연체(延滯)를 했는데 케이크까지 사오면서 봐달라는거에요. 케이크는 먹고 대출 불가 도장을 찍어줬죠. 하하”

당시 등록금은 60만원.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공부하면서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면 충당될 수준이었다. 그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짬나면 공부하는 지금의 역전된 상황을 안타까워 했다.

그들은 요즘 대학생들의 놀이 문화를 걱정했다.

“어쩌면 그렇게 술을 먹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아들도 자취를 하는데 속 버릴까 걱정이에요. 우리 때는 적당히 한 순배(巡杯)씩 돌면 일어나서 노래도 부르고 시국(時局)에 대해 토론도 하면서 지금처럼 폭음은 안했던 것 같아요”

자녀까지 우리대학을 보낸 부부의 모교에 대한 생각은 깊었다. 오랫동안 숙고(熟考)해온 의견인 듯 그들은 신중하게 학교 발전제안까지 내놓았다.

“불교는 모든 걸 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비라는 것 역시 그런 의미 아닐까요? 우리가 먼저 타 종교에 대해 수업도 개설(開設)하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학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우리 대학의 위상(位相)이 높아질 것 같아요”

그리고 후배들에게 부탁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예전만 못한 우리대학의 위상에 조금 속상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에겐 100년이 넘도록 꿋꿋이 버텨온 저력이랄까? 특별한 것이 있잖아요. 우리 후배님들 모두가 열심히 노력한다면 여러분들은 물론이고 우리대학도 크게 빛을 내지 않을까요?” 

이들이 학교를 졸업한지 20여 년이 지났다. 씩씩하게 동악의 언덕을 오르내리던 준수(俊秀)하고 아름다웠던 청년들은 이제 중년이 됐다. 선배를 생각하는 마음은 부부의 정으로, 후배를 걱정하는 마음은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자애(慈愛)로 바꿨다.

하지만 동악이 맺어준 부부 동문의 마음에는 여전히 20대의 열정이, 그리고 모교에 대한 사랑이 엿보이는 듯 했다.

배종성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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