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代(대)의 진지한 詩作(시작)태도

  좀 기이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黃甲周(황갑주)씨와 咸東鮮(함동선)씨는 다음 몇 가지 점에서 미묘한 일치를 보이고 있다. 첫째로 나이. 두 시인이 다 40세쯤 되었다.
  둘째로 處女詩集(처녀시집). 두 시인이 다 處女詩集(처녀시집)을 낸 것은 몇 해 전인데, 그 때에는 제각기 생활면에서 중대한 변화를 보여 주고 있었다. 黃甲周(황갑주)씨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咸東鮮(함동선)씨는 濟州(제주)에서 서울로, 즉 풍토와 습속이 크게 다른 곳으로 제각기 옮겨 앉고 있었다. 그 뒤로 두 시인은 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애쓰면서 각각 40세쯤에 이르러 제2시집을 내게 된 것이다. 本人(본인)들은 저마다 다른 길을 갔다고 주장할는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두 시인이 서로 비슷한 체험을 하며 詩人(시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處女詩集(처녀시집)에 비해 보면 제2시집에 와서는 두 시인이 다 자기 나름의 변화를 보여준다. 먼저 黃甲周(황갑주)씨의 경우는 처녀 시집 ‘저 來年(내년)에라도’에서 서울의 生活(생활)을 담담하게 노래한 데 반해 제2시집 ‘하늘이 따라와’에서는 낯선 미국의 생활을 상당히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咸東鮮(함동선)씨의 경우는 처녀 시집 ‘兩後開花(양후개화)’에서 다분히 自然(자연)의 정서를 노래한 데 반해 제2시집 ‘꽃이 있던 자리’에서는 스모그 속의 生活(생활)을 많이 노래하고 있다.
  두 시인이 다 詩(시)의 내용면에서 생활환경의 변화에 相應(상응)한 변화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두 시인이 다 달라지지 않는 점이 있다. 그것은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詩(시)에 대한 태도이다. 매우 조심스럽게 古典的(고전적)인 詩(시)의 패턴으을 固守(고수)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主知的(주지적)인 시인들의 작품에서 보는 패턴스의 파괴적인 요소는 보이지 않고, 표현상의 無理(무리)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새로운 환경을 그들 나름대로 매우 조심스럽게 처리하여 들려주는 진지한 노력이 있을 뿐이다.
  간혹 主知(주지)적인 傾向(경향)의 작품에 실망하여 ‘抒情(서정)의 고갈…운운…’하는 사람이 있거니와 黃(황)ㆍ咸(함) 두 시인의 경우는 제 아무리 드라이한 풍토 또는 습속에 처하게 되어도 抒情(서정)은 결코 고갈할 수 없다는 하나의 반증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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