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에서 사람의 철학을 배웠다”

대학산악부 사상 최초로 마나슬루를 등정했던 사람, 메모리 모듈을 생산하는 기업체의 회장, 이인정 동문의 이력은 화려하다. 그가 산 사람으로 살며 배운 ‘사람의 철학’과 우리대학과의 인연을 들어봤다.

 

당당한 풍채와 거침없는 걸음걸이, 호탕한 웃음. 기자와 악수하는 그의 손은 거칠고 억셌다. 이인정 동문은 전형적인 ‘산(山)사람’이었다. 기업의 회장다운 날카로움 대신 산을 닮은 호방함이 느껴졌다.  

이인정 동문에겐 많은 직함이 있다. 주식회사 태인 회장, 대한산악연맹 회장, 아시아산악연맹(UAAA) 회장. 그 밖에도 주한 네팔 명예 영사와 대한체육회 이사, 한국 등산 학교 교장 등 굵직굵직한 단체의 장을 역임했다.

그의 화려한 직함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산과 관련된 것이다. 산과 그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산 때문에 시도했던 월남전 참전

그의 산(山) 사랑은 유별나다. 우리 대학에 입학한 계기도 대학 산악부 중에 최고로 꼽혔던 우리대학 산악부의 명성 때문이었다. 대학생활도, 학업보다도 산이 우선이었다. 주말마다 산을 찾았고 주중에는 등산계획을 짜고 등산장비를 손보았다.

그는 1967년 월남전에 지원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지원동기가 당시 베트남의 선진화된 등산장비 때문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참 젊은 치기(稚氣)였었죠. 생사가 엇갈리는 전쟁터에서 등산장비 하나 구해보겠다고 지원했으니. 그래도 당시 우리나라에 없던 좋은 등산장비를 많이 들여오긴 했어요. 허허”

대학을 졸업하고는 미국 유학 길에 오르려고 비자까지 발급 받았지만 산과 사람이 그리워 끝내 가지 못했다. 1980년, 그는 동국산악부원들과 히말라야의 8천 미터급 14개 자이언트 중 하나인 마나슬루를 등정했다.

단일 팀으로는 최초였을 뿐더러 대학 산악부에서도 최초였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동국산악부를 장식했다. 하지만 산이 그에게 명예와 영광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설악산 등반사고, 인생의 전환점

마나슬루 등정을 위해 설악산에서 빙벽 등정을 연습하던 중, 눈사태로 10명의 동지들을 잃었다. 바로 눈 앞에서 동지들이 눈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그 때가 그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반환점이었다.

10명의 동지들을 잃은 그는 한동안 큰 슬픔에 잠겼다. 하지만 방황 속에서도 그는 산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경건한 마음으로, 엄숙한 마음으로 산을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산은 정말 변화무쌍해요. 어느 때 가더라도 산은 사계절을 다 품고 있지요. 그만큼 경외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산을 대할 때마다 두렵고 또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히말라야 등반 때 위험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말도 마세요. 한 번은 에베레스트를 오르는데, 셀파(현지인 등반 가이드)가 내 짐을 모두 들고 없어져 버린 겁니다. 비상식량, 물, 장비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죠. 6시간을 헤맨 끝에 겨우 구조됐어요. 지금 생각해도 이건 기적입니다”

말 그대로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그는 지금은 대한산악연맹과 아시아산악연맹 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일본산악연맹 50주년 기념식에 초청 받았다. 세계산악연맹 회장인 마이클 회장과 여성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자인 다베이 준코 여사 등 등반계의 세계적 VIP들이 참석한 큰 행사였다.

그는 행사에서 나루히토 일본 황태자와 같은 자리에서 함께 했다. 웬만한 유명인사와는 함께 자리를 하지 않는다는 나루히토 황태자와의 만남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나루히토 황태자는 의외로 등산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준프로 산악인이었다고 한다. 그는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한국 등반계의 성과를 한껏 뽑내고 왔다고 자랑했다.

박영석 동문과의 특별한 인연

우리대학이 낳은 세계 최고의 산악인 박영석 동문과의 관계도 특별하다. 그가 대학 산악부 최초 마니슬루를 정복하고 귀국했을 때, 환영행사로 공항에서 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다.

이를 본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박영석 동문은 반드시 동국대학교에 들어가고 말겠다는 꿈을 갖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대 산악인이 품은 마음 속 결기(決起)의 시작 뒤에는 이인정 동문의 뜻하지 않은 조우(遭遇)가 숨어있었던 것이다. 

 

 

기업인으로서도 이인정 동문은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이인정 동문이 회장으로 있는 주식회사 태인은 메모리 모듈, 반도체 부분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두고 있다. 창업 초기 20억 원이던 매출을 2010년 400여 억 원으로 신장 시키는 눈부신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이 공로가 인정되어 그는 지난 16일, 38회 상공의 날 행사에서 석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이러한 성과의 뒤에는 ‘인간중심’이라는 그의 경영철학이 뒷받침 하고 있다.

그의 경영철학 역시 산에서 배운 가르침이었다. “히말라야의 거봉(巨峯)들을 오르려면 절대 혼자 못 갑니다. 모두 함께 가야 돼죠. 그것도 체력이 제일 약한 사람한테 맞춰서 천천히. 그것이 등정의 정석이고 인생의 기본입니다”

이런 그의 인간 중심 철학은 사회공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90년부터 지금까지 총 377명에게 문화체육 활성화 기금으로 5억 7000만원을 지원했다. 산악 박물관, 산악 도서관을 설립하고 대한산악학교도 만들었다.

또한 우리대학 총동문회 상임 부회장을 맡으면서 매년 꾸준히 기부금을 내고 있다. 기자가 기업인으로도, 산악인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것이 동문의 한 사람으로 자랑스럽다고 말하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난 성공이라는 말이 싫습니다. 돈 많이 벌고 인정 받으면 그게 성공인가요? 무엇보다 남을 도와줄 수 있는 마음이 얼만큼 있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난 아직 멀었어요” 그의 진심 어린 인생관을 들으며 다시금 숙연해 졌다.

인터뷰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그의 후배들이 찾아왔다. 75학번부터 88학번까지 다양한 세대의 동문들이었다. 그들은 우리 대학 산악부 출신이면서 대한산악연맹 회원들이었다.

등산학교 만드는 것이 남은 꿈

“이 사람들이 다들 사회에서 한 몫씩들 하고 있습니다. 우리대학 기질도 그렇거니와 산악부 특유의 끈끈함으로 서로 이끌어주며 아직까지 연락하면서 돈독히 지내고 있습니다” 함께 모여 산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눈빛은 중년의 그것이 아닌 마치 처음 산을 오르는 2,30년 전 대학시절과 같은 설렘으로 가득해 보였다.

마지막 꿈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이제 그런 건 없습니다’하고 허허 웃다가 한참 생각에 잠겼다. "가장 큰 소원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사고가 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국립등산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것도 꿈 중에 하나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산에 대해 말했다. 산을 좋아했고 산에서 배웠고 산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 그는 마음까지 웅대한 산을 닮은 진정한 산사람이었다.

 

 

<프로필>

△1965년 중동고 졸업 △1972년 우리대학 상학과 졸업 △1975년 우리대학 경영대학원 무역학과 졸업 △1967년 월남전 참전 △1980년 마나슬루 등반대장 △1988년 (주)태인 설립 대표이사 취임 △1990년 태인 체육장학회 설립 △2005년 대학산악연맹 회장 취임 △2011년 제 38회 상공의 날 석탑훈장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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