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아 기자
“동우탑이요? 잘 모르겠는데요?” 우리대학 학생들에게 동우탑이 어디냐는 질문을 하면 대부분은 이와 같은 반응이다. 동우탑이 만해광장 깊숙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동우탑의 비문(碑文)은 아래와 같다.

“고(故) 노희두형은 4월 19일 의거 시에 애국학생운동의 선봉자로서 참가하여 열렬히 투장(鬪將)하다가 경무대 앞에서 총탄을 맞아 청운(靑雲)의 꿈을 못 다 이룬 채 22세를 일기로 애석하게 세상을 떠났다. 오늘 우리들은 형을 영원히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정성껏 이 글을 새겨두노라.”

본지의 전신인 동대시보 125호(1960년 4월 30일자)에는 ‘학생 피에 보답(報答)하라’는 제목으로 당시의 생생한 기록이 실려 있다. 51년 전 우리대학 학생들은 불의에 맞서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3·15부정선거를 규탄(糾彈)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시체가 유기(遺棄)됐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에 최전선(最前線)에서 혁명을 주도하던 당시 법학과 3학년 노희두 선배가 장렬하게 생을 마감했다. “아무리 독재정권이라 하더라도 어린 학생들에게 총을 쏠 수 있겠는가, 그러자 학생들이 그냥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떨어졌습니다”

당시 우리대학을 다니던 양승조 씨의 증언에서 알 수 있듯 1960년의 봄은 매섭도록 잔인했다. 그리고 지금 4·19혁명은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혁명’이자 ‘승리한 혁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대학은 고려대학교와 함께 4·19혁명을 이끈 중추(中樞)였다. 이에 우리대학은 추모식을 가지고 4·19등반대회를 여는 등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선열(先烈)들을 기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많은 학생들은 학생민족운동의 산실(産室)인 동우탑의 위치와 뜻조차 모르는 실정이니 실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붉은 선혈(鮮血)로 나부끼는 우리들의 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는 박두진의 시처럼 자유의 깃발이 휘날리기까지는 수많은 청춘의 선혈(鮮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4월이 지나는 길목,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동우탑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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