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 1960년 : 국내 대학 처음으로 연극학과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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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입학생은 20명. 입학때 진행을 본 것은 김재형, 김선경(영화감독), 김명용(영화감독), 정해창(탤런트)등이었다. 첫 강의는 1960년 4월 4일에 시작되었으나 4·19 학생의거와 5·16군사혁명이 잇달아 일어나 첫 해부터 휴강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감독 데뷔의 붐 형성

유현목은 1956년 흑백영화 ‘교차로’를 만들어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 작품이 크랑크 인 되던 날 이곳에는 출연자 강명을 비롯 박성복, 이영, 정일택, 하한수 등 많은 영화예술연구회(이하 영연) 동인들이 모여들었다.

이 때는 ‘교차로’보다는 영연에 대한 추억에 사로 잡혔다. 영연창립총회가 있던 1948년 초반에는 100여명이 참여했는데 결국 영화가 제작단계에 들어가니 모두 빠져 나가고 20여명밖에 안 남았다. 그것도 극연 멤버가 전입해 와서 단단한 정예멤버만 남게 되었다.

‘해풍’을 영종도에서 찍기 위해 모였는데 스스로 찍으려다 보니 촬영기문제, 그리고 전체적인 도움을 줄 분이 필요했다. 수소문끝에 당시 현역감독인 김성민 감독을 떼를 쓰다시피 하여 고문 감독으로 확정을 지으니 자연스럽게 촬영에 원용일 기사가 섭외되었다.

영연은 촬영을 위해 한달간을 예상하고 영종도에 합숙했는데 반달도 안 돼 제작비가 바닥이 났다. 유현목은 김태균, 김형걸 등을 최취사를 찾게 했다. 눈물을 쏟으며 간청하자 최취사가 뒷감당을 해 주었다. 촬영은 완료되었으나 현상부터 녹음까지의 과정이 남아 유현목은 이형근에게 회장직을 넘겨주고 수완을 기대했다.

그러나 시공관에서는 변사없는 무성영화로 첫선을 보였고 녹음자금 마련으로 최종 완성 명동어귀 USIS시사실에서 재학생을 대상으로 시사회를 가졌다. 1949년 한국대학 최초의 극영화 이수령 작‘해풍’은 김용환, 김형걸, 신신오, 백신자, 심명익, 손흥주, 강명, 이성구 등이 출연했었다.

여하간 영연은 6·25가 없었다면 그 명백이 이어졌을 것이다. 유현목의 영화계 진출로 박성복은 ‘눈물’(1958) 이영은 ‘오늘도 내일도’(1959) 정일택은 ‘청실홍실’(1957) 하한수(영수)는 ‘목포의 눈물’(1958) 이성구(병용)는 ‘젊은표정’(1960)으로 감독 데뷔, 강명은 ‘교차로’ 배우로 진출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故 유현목 교수가 연극학과 후배에게 연기 지도를 하고 있는 모습.

 

사극의 왕 김재형 재학 시절

김재형은 경기 상고 재학시부터 극단 신협 작품에 출연하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이철향과 신무대 실험극회를 창단, 활동을 펴고 있었다.

창단공연은 이철향작 ‘푸른 꿈’을 연출한 이후 이철향작 ‘제5계절’을 연출했다. 이 즈음 장한기는 동국대 교무과장으로 있으면서 서라벌대 이광래 교수와 함께 소극장 원방각을 창단, 활동을 펴고 있었다.

김재형은 신무대 실험극회, 소극장 원방각 공동후원으로 학생회 최초로 연극반연구발표회 겸·신입생환영공연으로 오학영처녀작 ‘명암지대’를 연출하였다.

이 공연은 ‘밀고’, ‘산골’이후 동국연극이 실험한 획기적인 작품이었다는 평이다. 이 공연후 학생위원회는 1959년 4월 초파일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이경제작‘법의(法衣)’를 김재형이 연출하여 주목을 받게 된다.

 

연극경연대회 포스터.
그후 전통을 살리기 위해 명칭을 극예술연구회(이하 극연)로 바꾸어 정해창, 김선경, 김명용 등과 함께 에밀리 셀든 작‘성대(聖帶)를 공연하고 신무대 실험극회의 이근삼 작‘원고지’를 연출하였다. 그리고 제4회 대학방송극 경연대회에는 출연자로, 제5회 경연엔 오학영 작 ‘인간유희’를 연출, 주목받는 연출가가 되었다.

 

1960년엔 문예부장을 맡아 전국대학 최초로 ‘전국남녀 중고교연극경연대회’를 주최하였고 1961년엔 신무대실험극회의 후라스코의 ‘제8요일’을 연출하고 졸업과 함께 KBS-TV의 PD로 들어갔다.

이후 40여년간 250여편의 드라마 연출 그러나 그는 1982년 영화 ‘춘희’를 감독했으나 흥행에 참패, 2010년 광주에서 연극으로 회귀 마지막으로 ‘김치’를 연출했다.

연극학과 창설

교수가운데 양주동, 피천득, 김기림이 극연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온데다 최재서, 최정우, 김재남등도 연극에 관심이 많았다.

실제에서도 극예술연구회는 전국대학 가운데 공연예술을 잘하는 전통이 내려 왔으며 학문적으로도 한하균이 ‘소도연구소고(蘇塗硏究小考), 이종찬이 ‘한국가면극’, 이효영이 ‘유진 오닐연구’ 김정근이 ‘버나드 쇼우 연구’등이 나올 만큼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희곡 ‘산골’ ‘지하촌’ ‘태풍’과 입센의‘유령’을 소극장 원방각에서 공연한 장한기는 동국문학회 조직과 함께 ‘희극론’을 발표하고 ‘가면무극고’, ‘고전극의 동서개관’등을 발표하면서 동서양 연극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내외적으로 연극에 대한 관심이 모아질 때, 그리고 교무과장직을 맡으면서 장한기는 유치진을 ‘희곡론’강사로 초빙하고 함께 백성욱 총장에게 필연성을 강조, 설립약속을 받아내는데 성공, 취지문, 커리큘럼, 계획표등 을 작성, 문교부에 신청, 1959년 연말에 인가를 얻어 연극학과의 창설이 국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이즈음은 1953년 서라벌예교(전문대)에 연극영화과, 1959년 중앙대에 연극영화과, 1960년 동국대에 연극학과, 1961년 한양대에 영화학과 순으로 생겨 동국대학만 유일한 연극학과였던 것이다. 교수진용은 유치진, 이해랑, 김정환, 장한기등 4명에 양주동, 여석기, 이광래, 이근삼등이 강사로 초빙되었다.

첫 입학생은 20명, 그중 피천득아들 세영만 고교시절 연극을 했고 현역 성우로 활동하고 있었다. 입학때 진행을 본 것은 김재형, 김선경(영화감독), 김명용(영화감독), 정해창(탤런트)등이었다.

첫 강의는 1960년 4월 4일에 시작되었으나 4·19 학생의거와 5·16군사혁명이 잇달아 일어나 첫 해부터 휴강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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