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 1955년 혼란한 시국상황서도 창작극 공연해 극찬 받아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한 공연

 해방후 양주동, 피천득, 김기림 교수와 고암선 강사는 극예술연구회 (약칭·극연)가 1947년 태동하는데 많은 힘이 되었다. 극연의 회원은 50여명. 막상 베나벤테의 ‘가장인생’을 첫 작품으로 정하고 읽기 연습에 들었는데 앞길이 막막했다.

50여명의 회비로공연자금은 될 수가 없었다. 회원들은 상의한 끝에 선배들을 찾아 지원요청을 할 생각을 해냈다. 몇몇 선배들을 찾아보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날 최후의 희망을 안고 정동소재 중앙방송국 김준호 선배를 찾아갔다.

사정이야기에 김선배는 전국대학 최초로 방송극을 제작·방송하여 출연료를 몽땅 제작비에 털어넣는 생각을 해냈다. 조성하,조효경은 애란의 작품 <완 딸라>를 방송극화하는데 앞장섰던 일등 공신이다.

 방송극 때문에 중단했던 연습은 ‘하면 된다’는 신념 아래 당시 전문 연출가 박춘명을 초빙, 본격 연습에 들게 된다. 이때의 출연은 조성하, 한재수, 조효경, 강신탁(명), 이강현, 장진건 등이었고 중앙극장에서의 공연이 약속된 상태.

이때 공연비는 바닥이 나고 공연을 포기할 상태였다. 이것을 알게 된 지도교수 김기림이 월급을 가불해주어 준비가 완료되었다. 막이 오르자 관객이 어찌 많이 몰렸는지, 단 한 차례공연에 들어간 제작비를 모두 뺄수 있었다. 초대손님을 많이 초청하다보니 기부금이 답재한 것이다.

격렬한 이데올로기의  충돌

이데올로기의 충돌 속에서 다음 공연 제작비를 마련한 극연은 바로 체홉의 ‘앵화원’을 채택, 이강현, 조성하가 반씩 나누어 번역, 고암선 연출로  공연했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히로인을 심옥택이 맡았으나 후에 사정으로 이혜경이 출연하였고 조성하의 경우는 늑막염이 걸려 자리에 눕게  되자 부랴부랴 김진복으로 배역(配役)을 바꿨으나 이사정을 늦게 안 김진복이 중간에 그만두어 조성하가 완쾌될 때까지 기다려 상연(上演)하는 의리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 작품은 공연이 끝나고 다시 기획되어 청년 예술극장이란 이름으로 돈암교에 있던 동도극장에서 상연했다. 이때 좌익계 학생들이 대거(大擧) 극장에 뛰어들어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1948년 까지는 혜전 후기의 조성하, 이강현, 김형걸 (회장)이 주축이었고 1949년 한국 연극학회가 주최한 제1회 대학극 경연부터는 조성하가 극연을 리드했다. 이 경연엔 모두 기성작품이나 번역극(飜譯劇)을 들고 나갔는데 동국대만 조성하의 처녀작 ‘밀고’를 들고 나가 주목을 끌었다.

‘밀고’는 한재수, 맹후빈이 공동 연출했고  박영민, 조항, 조효경, 한재수 등이 출연했는데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일등상을 받은 작품으로 각 언론은 이 공연을 ‘이 나라 학생극의 신기원’. ‘한국연극  발전상 최소한 30년의 시간을 단축시켰다’고 극찬(極讚)했다.

 이 경연을 계기로 학생연합 서클인 ‘학막(學幕)’이 만들어 졌는데 처음엔 연극토론등 학구적 모임으로 시작되더니 한 두달 흐르면서 좌우익으로 양분된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으로 바뀌어 버렸다.

처음엔  조성하. 한재수 등이 참가했으나 서울대(김기영), 고려대 우익 (김경옥), 동국대학은 그곳에서 탈퇴(脫退)하고 사범대, 상과대, 고대 좌익만의 중심으로 지속되었다.

1949년말부터 혼자서 어디를 다니다간 언제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라 밖을 나설때엔 집단으로 다니거나 또는 포켓에 재크 나이프를 두 어개씩 지니고 다녀야 했다.

이 즈음의 연극은 사상 싸움의 도장이 되었던 것이다. 동국대는 체홉의 ‘앵화원(櫻花園)’을 공연하여 좌익으로 착각되어 공연 때는 조용한 편이었으나 우익임이 밝혀지자 더 큰  적색테러를 당하고 돌멩이 세례에 칼부림까지 받았다.

전쟁중에도 부산서 연극공연 하기도

동대 극연은 오닐의 ‘느릅나무 밑의 욕망’을 연습 중 6.25가 발발, 일부는 군입대,일부는 종적을 감추고 일부는 피난길에 올랐다. 학교도 부산으로 피난, 임시교사에서 문을 열었는데 이 때 연극반엔  박영민, 강신탁, 조항, 강숙자(유정) 등이 모여들었다.

피난지에서는 박영민 주도 아래 싸르트르 작 ‘더러운 손’을 공연했다. 박영민 번역ㆍ연출, 강명 기획, 조항 미술, 출연엔 박영민, 정봉문, 최성호, 김규태, 정준현, 조병수, 강숙자등이 출연하여 1951년 겨울 부산 동아극장에서 상연하였고 대성황을 이루었다.

힘을 얻은 박영민은 같은 작가의 ‘무덤없는 죽음’을 다시 선정, 1952년 2월 부산극장에서 공연하였다. 그리고 언커크의 지원으로 대구, 마산 등지를 순회공연까지 했다. 부산 피난지에서의 학생들은 학업보다 연극공연이 유일한 낙이며 생활의 전부였다.

전시(戰時)였기에 연습중에도 영장이 나와  입대하였고 때에 따라서는 길거리에서 영장이 발급돼 입대 하는 등  연습의 차질(蹉跌)이 생기기도 했다.

따라서 박영민, 조항, 강숙자 등은 극단 신협 문예중대에 입대하게 되고 1953년 휴전이 되자 동대 연극은 흐지부지한 상태가  된다. 서울로 상경한 동국대 극연은 1954년 제2회 전국 대학극 경연대회가 11월에 있게되었는데 동대 연극은 장한기의 창작 ‘산골’을 가지고 출전했다.

연출에 김두천, 출연에  조민자, 오태근, 조철문, 조용수, 최재복, 박영근, 천선녀, 홍대훈 등이었다. 이 공연에서도  동대연극은 단체상 특상에 개인연기상에 조철문, 조민자가 수상했다.

장한기는  졸업 직전 광주 보병학교 CSMC 훈련중 자작 ‘지하촌’을  김인호 연출로 상연, 우수패를 수상하기도 했다. 입대 훈련을 받고 돌아온 장한기는  ‘동국문학’을 창간 하였고 제3회 경연에는 유치진의  ‘푸른성인’을 공연하였는데 박영근, 천선녀, 오태근, 배효경, 김재식, 조철문, 김영숙, 최재복등이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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