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代差(세대차)의 苦憫像(고민상) 그려

  심리학과 사회학의 照明燈(조명등)을 밝혀 ‘에릿히 프롬’이 現代(현대)의 孤獨(고독)한 人間像(인간상)을 이야기할 즈음, ‘샐린저’는 作家(작가)의 憐憫(연민)에 찬 눈을 돌려 한 少年(소년)을 주시하였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가난한 火田民(화전민)의 아들이 아니었고 破片(파편)을 맞고 쓰러진 어버이의 주검 앞에 慟哭(통곡)하는 戰爭孤兒(전쟁고아)의 모습도 아니었다. 오히려 豊饒(풍요)를 極(극)한 先進社會(선진사회)를 背景(배경)으로 작품을 전개한다. 外面的(외면적)으로는 아주 平凡(평범)한, 그래서 특별히 素材(소재)가 될 것도 없는 少年(소년)이지만 ‘샐린저’의 充滿(충만)한 社會連帶意識(사회연대의식)은 深淵(심연)을 드러내 보일 욕구를 갖게 한다.
  그래서 世代(세대)와 環境(환경)을 看破(간파)하게 되었고 少年(소년)을 ‘極端(극단)의 利己(이기)와 反抗(반항)’이라는 狀況(상황)속에 집어넣어 告發(고발)의 端緖(단서)를 마련하고 있다. 어제의 젊은이들이 겪어 보았고 現在(현재)의 젊은이 또한 經驗(경험)하고 있는 內心(내심)과 社會(사회)와의 斷絶(단절)은 日常(일상)의 단면임을 아는 이는 많지만 그 밑바닥에 서식하는 허다한 병폐의 수술을 위해 나선 자는 드물다. 이러한 沒理解(몰이해)와 無關心(무관심) 속에 ‘샐린저’가 疑視(의시)한 絶緣(절연)된 少年(소년) ‘홀든ㆍ코필드’는 소위 世代差(세대차)에 敏感(민감)하다.
  퇴영적인 사회와 變革(변혁)없는 思考方式(사고방식)에 食傷(식상)하고 僞善(위선)을 혐오하고 固陋(고루)한 慣習(관습)을 배격한다. 언제인가부터 우리 세대에서 자주 쓰이게 된 世代差(세대차)라는 말은 “傳統(전통) 속에 合流(합류)되는 保守(보수)와 進步(진보)의 秩序(질서)”라는 ‘꽁트’의 念願(염원)을 짓밟아왔다. 固陋(고루)한 旣成(기성)을 攻擊(공격)만 할 것인가? 未熟(미숙)한 自己(자기)를 防禦(방어)만 할 것인가? ‘홀든ㆍ코필드’의 고민은 정녕 모든 靑少年(청소년)의 번뇌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否定(부정)해 본다. 그러면 그에게 새로운 世界(세계)가 展開(전개)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나 싸워야 하는 너무도 많은 것- 오히려 그것은 매너리즘과 퇴폐의 歡樂的現實(환락적현실)과 僞善(위선)으로 權威(권위)의 分身(분신)이 되고자 하는 人間(인간)들 때문에 고민하는 모든 젊은이들-에서 그는 도피하게 된다. 그는 現代(현대)의 作家(작가)들에 의해 자주 묘사되었듯이 大量物質(대량물질)속에 파묻혀 헤어나지 못하고 車軸時代(거축시대)의 信號機(신호기)마저 고장난 社會(사회)를 사는 모든 사람의 괴로움이다.
  이미 오래 전에 ‘베르레느’는 “大都市(대도시)의 아들로 태어나/더럽혀진 반역의 아들로 태어나/나는 거기 모든 것을 求(구)하고/(中略(중략)/나는 너무 일찍 태어 낳는지/ 늦게 태어 낳는지/ 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아는가?”라고 고민에 가득한 싯귀를 읊었다. ‘홀든ㆍ코필드’의 유일한 希望(희망)을 의미 깊게 묘사하여 ‘샐린저’는 “여하튼 저 널따란 호밀 밭에서 무슨 장난인가 치고 있는 이들 모두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어, 수천 명의 꼬마들, 그 주위에는 아무도, 나 이외에는 큰 놈이란 없거던. 난 어떤 절벽 끝에 서서 꼬마들이 뛰어 놀며 달리다가 어디로 가고 있는 지를 보지 못할 때- 그 곳이 절벽 끝인데 말야, 내가 어디선가 튀어 나와서는 그 애들을 붙잡아 주어야 한다는 거야, 그게 내가 하루 종일 할 일 전부야”
  그의 소박한 바람 속에서도 ‘큰 놈’을 意識(의식)한 이유는 무엇일까? 꼬마들을 돌보아 주려는 것은 斷絶(단절)을 극복하려는 念願(염원)인가? 그리하여 他人(타인)의 ‘이데아’를 純粹(순수)한 世代(세대)로서 輕視(경시)하기에 부끄러움이 없고 孤獨(고독)한 自己(자기)의 ‘에고이즘’을 이겨내어 超自我(초자아)에 이르겠다는 것인가? ‘샐린저’는 無觀心(무관심)한 모두를 向(향)해 ‘홀든ㆍ코필드’를 이야기 하고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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